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0화 (20/171)
  • #20. < 기황후(奇皇后)와의 협상 - 4 >

    - 스르륵

    시큼한 냄새를 쫓아 장수를 기원하는 목숨 수(壽)자가 커다랗게 수놓아져 있는 최고급 화문석 돗자리 위를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가고 있는 왕기의 머릿속으로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나는 2020년을 살았던 한국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거로 넘어와 강릉부원대군이 되고 지난 몇 달간 열심히 무공을 익힌 자로서의 생각이었다.

    2020년을 살던 한국인의 자아는 지금의 상황을 굉장히 모순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의대를 다니다가 해부학 실습시간에 처음으로 본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카데바(해부학용 시체)의 충격에 전과를 해서 공대로 간 놈이 이제는 검을 들고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직접 죽이려 들다니 말이야.'

    그런 왕기의 콧속으로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냄새가 마치 현실에서도 맡아지듯 강하게 섞여들어오기 시작했다. 해부학 실습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포르말린의 냄새와 카데바의 복부를 가르자 훅하고 풍겨왔던 시체 썩는 냄새와 강렬한 피비린내였다.

    현대인의 기억으로 인해 쫓아가고 있던 아이락의 냄새가 희미해지는 것 같자 과거로 넘어와 무공을 익힌 자아가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상대방은 정림방의 사대당주 중에 한 명이다. 못해도 절정이요 어쩌면 최절정의 고수일 수도 있어. 아직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화경의 고수일 가능성도 있는 거고. 그런 엄청난 고수를 상대하러 가면서 잡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정신 차려라!'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맹렬하게 깨어나면서 왕기의 정신을 다급히 하나로 모았다. 그러자 왕기가 객관적으로 현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은신해 있는 상대방도 침실의 상황이 평상시와 많이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야. 까딱 잘못하면 거꾸로 내가 죽을 수도 있어. 내가 고려의 대군이라고 해서 척무관처럼 손속에 사정을 둘 상대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과거로 끌려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사람을 죽이는 게 뭐 어때서? 이 시대는 야만의 시대이고 난 무공을 익힌 비정한 무림인이며 상대방 또한 나와 동일하다. 둘 다 상대방의 비정한 칼날에 맞아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자들이라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제대로 정신이 들었는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왕기의 몸에서 힘이 천천히 빠지면서 전신이 근육이 부드럽게 이완되기 시작했고, 콧속으로 파고드는 시큼한 아이락의 냄새가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척무관이 나보고 천하의 기재라고 말하지만 그건 내가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던 편법에 불과해. 난 무공을 익힌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이다. 지금의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상대방의 방심뿐이야. 자신이 숨어있는 위치를 절대 발견하지 못할 거라는 방심. 하지만 한방에 죽이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서 오히려 내가 죽는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기습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찔러야만 해.'

    왕기가 머릿속으로 매일같이 명치에 멍이 들던 시절에 척무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소관이 사용하는 찌르기 수법이 궁금하시다고요? 송학검법 중에 '학취습어(鶴嘴襲魚)'라는 초식입니다. 학이 뾰쪽한 부리로 물고기를 빠르게 습격한다는 뜻이지요. 정식으로 배우시고 싶으시면 소관을 스승으로 모셔야 하고 저희 가문에 이름 석 자를 올리셔야 합니다. 송학검법은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전절기이니까요."

    "고려의 왕위 계승자인 내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간단하게 요령만이라도 알려주게나."

    "요령은 어깨를 튕기면서 나오는 힘을 이용해 팔꿈치를 최대한 빨리 펴면서 손목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이지요. 미리 접어두었던 팔꿈치를 펴는 것은 찌르는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함이고, 손목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은 찌르는 도중에 속도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검 끝의 변화는 적지만 속도 하나는 일품이 되지요. 저하. 소관이 그 이상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저하의 재능이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 우뚝.

    그 어디에서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아이락의 냄새에 왕기의 발이 멈추어졌다. 고개를 들어 냄새의 진원지인 침실 구석에 있는 나무 천장을 바라보는 왕기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숨어있던 은신자가 천장을 뚫고 내려와 자신을 습격할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왕기의 머릿속으로 척무관이 마치 옆에서 충고를 해주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하. 날아오는 화살을 붙잡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날을 피하려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버려야만 진정한 무인이 되실 수가 있다는 뜻이지요. 절대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빠르게 정신을 추스른 왕기가 정기신을 일제히 깨우며 공포심을 떨쳐내었다. 그리고는 수도 없이 보았던 학취습어를 시전하기 위해 몸속에 남아있는 기를 끌어모아 어깨 쪽으로 빠르게 옮기면서 기황후의 침실로 오기 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수법을 하나 더 첨가시켰다. 마치 활의 시위를 당기듯 어깨를 천천히 뒤로 뺀 왕기가 팔을 시위에 맨 화살처럼 일자로 쭉 뻗는 사일검법의 초식과는 다르게 팔꿈치를 가볍게 접었다. 새파란 검기로 둘러싸여 있는 목검을 확인한 왕기가 마음속으로 천천히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검기라면 나무로 된 천장 정도는 가뿐하게 뚫을 수가 있을 거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다. 5, 4,  3, 2, 1 고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가듯 뒤로 넘어가 있던 왕기의 어깨가 빠르게 튕겨나가다가 앞으로 넘어올 때쯤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 탄력을 이용해 접었던 팔꿈치를 빠르게 쭉 피며 손목을 단단하게 고정시킨 왕기의 목검이 천장을 벼락처럼 빠르게 찔러들어갔다.

    - 콰아앙.

    무시무시한 속도로 찔러진 검의 속도가 음속을 가볍게 돌파했는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 대신 초음속 비행기의 소닉붐처럼 폭음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 푸우욱. 푹.

    나무로 된 천장을 두부처럼 가볍게 관통한 목검이 또 다른 무언가를 찌르는 느낌이 손끝으로 느껴지자 왕기가 처음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고함을 질렀다.

    "하압..."

    그리고는 검기로 둘러싸인 목검을 들고 앞으로 냅다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다다닥.

    한동안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걸어 다니던 왕기의 뜀박질 소리가 기황후의 침실에서 울려 퍼질 때 또 다른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 쫘아악.

    - 두두둑.

    마치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목검에 의해 나무 천장이 일자로 길게 베어졌고, 벌어진 그 틈 사이로 떨어진 시뻘건 핏물과 상대방의 잘린 내장 속에 담겨 있던 내용물들이 왕기의 머리위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핏물과 내장의 내용물을 뒤집어쓴 왕기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내장의 시큼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제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대견한지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했었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이야. 확실히 내가 변하긴 많이 변했어.'

    왕기가 무심한 손길로 머리 위에 떨어진 핏물들과 내장 내용물들을 툭툭 털어낼 때 척무관이 어느새 달려왔는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있겠나? 검에 찔린 건 내가 아니라 은신을 하고 있던 자인데 말이여.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네."

    왕기가 고용보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정원사! 지금 당장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상대방이 이 일을 덮지 못하고 우리 쪽에 누명을 씌우지도 못할 테니까. 황후마마와 황자 전하를 시해하려고 침실에 숨어있던 자객을 잡았다고 빨리 외부에 알리게나. 승상을 상대로 유리한 패를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화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나?"

    "알겠사옵니다. 저하.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황후마마의 침실에 자객이 잠입했다. 여봐라..."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침실 밖으로 다급히 뛰쳐나가는 고용보를 지켜보던 척무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 은신해 있던 자가 자객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히 자객이어야만 하네. 그래야 황제가 더욱 화를 낼 테니까 말이야."

    핏물을 왕창 뒤집어쓴 왕기가 손을 들어 눈가로 줄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기황후를 바라보자 기황후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기황후를 바라보며 왕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황후마마. 힘드시더라도 잠시만 더 기다리시지요. 천장에 있는 시체는 중요한 증거물입니다. 그자의 시체를 끄집어내서 잘 보관해야 하는 게 우선순위라서요. 시체가 정리되면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해보지요. 황후마마께서는 본 대군의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잠시 후 어수선했던 상황이 모두 정리되고 방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기황후가 왕기의 첫 번째 소원을 들은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대군이 고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황후마마. 원나라 황실이 제가 왕위에 올라가는 걸 반대하지 않도록 손을 좀 써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왕이 된 후 기씨 일족의 목숨만은 살려드리겠습니다. 고려의 조정을 어지럽히던 부원배들이니 목을 쳐서 깔끔하게 정리해야 마땅하지만 황후마마의 핏줄이기에 죽이지 않고 원나라로 몸성히 보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럼 친정 오라비들의 목숨을 염려할 일 자체도 없을 테니까요."

    가황후의 말에 왕기가 이전처럼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황후마마. 마마께서 보시기에 본 대군이 마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고려의 왕이 못될 사람으로 보입니까?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협박을 하고 계시는군요. 좋아요. 도와드리지요. 방해한다고 왕위를 쉽게 포기하실 분은 아닌 걸로 보이니까요. 지금의 고려에는 왕위에 올릴만한 다른 왕위 계승자가 없기도 하고요. 또 다른 소원은 무엇인가요?"

    "어제 보내주신 산삼보다 더 뛰어난 영약이 혹시 황실에 있습니까?"

    "강호 문파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내놓는 대신 황실에서 영약은 뺏지 않기로 해서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나마 몇 개 있던 건 승상이 가져가서 정림방주에게 준걸로 알고 있고요. 산삼이라면 몇 뿌리 더 있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산삼은 더 이상 약발이 안 받아서요. 그럼 다른 소원을 빌겠습니다. 저를 강호로 내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 대군의 신분은 볼모이며 황실의 인질입니다. 그래서 제가 죽게 되면 원나라와 고려 간에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전 대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있지요. 그걸 풀어줄 수 있는 건 원나라 황제뿐입니다. 황제를 설득시켜서 절 강호로 내보내 주시죠. 들어보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약속을 잘 지키는지 강호를 주기적으로 감찰하는 자리가 황실에 있다고 하더군요. 절 숙위에서 풀어서 그 자리에 앉혀주시는 걸 제 소원으로 하겠습니다. 황후마마를 지켜드리는 건 척무관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요."

    기황후가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에 시립해 있던 척무관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저하! 그것은 절대 불가하옵니다. 장차 고려의 왕위를 이으실 저하께서 강호행(江湖行)을 하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정 강행하시려거든 소관을 무력으로 꺾으셔야 할 것입니다."

    왕기가 끼어들지 말라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척무관을 노려보았지만 결기가 가득 찬 눈빛의 척무관이 왕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강하게 피력했다.

    "저하. 강호는 도산검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강호행은 강호의 낭만을 즐기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 옵니다. 저하께서는 아직 강호인들의 지독한 호승심과 공명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절 꺾을 정도의 실력이 아니시면 대군 저하를 강호로 내보낼 수가 없사옵니다. 정 가시고 싶으시면 절 밟고 가시라는 뜻입니다. 저하께서는 영민하시니 소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겠습니다."

    말을 끝낸 척무관이 자신의 뜻을 절대 철회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고, 생각도 못 한 척무관의 발언에 골치가 딱 아프다는 듯 왕기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으며, 그런 두 사람을 흥미롭다는 눈빛을 한 기황후가 번갈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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