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9화 (19/171)
  • #19. < 기황후(奇皇后)와의 협상 - 3 >

    "대군 저하. 양, 염소, 낙타, 소, 말이 대초원의 유목민들이 기르는 5대 가축입니다. 이동식 집인 게르를 짊어지고서 가축들의 먹이인 싱싱한 풀을 찾아 끝없이 대초원을 이동하는 유목민들의 삶은 참으로 가혹합니다. 대초원의 봄, 여름은 지극히 짧고 겨울은 춥고도 길지요. 몽골식으로 말하자면 3살 된 수소의 뿔이 추위로 얼어터져야 '이번 겨울은 제법 춥다'라고 표현할 정도이니까요. 그런 유목민들의 가축 사랑은 지극합니다. '백 마리의 말이 있어도 탈 말을 고르기가 힘들고, 천 마리의 양이 있어도 잡아먹을 양을 고르기가 힘들다'라는 몽골 속담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그에 반해 그들이 기르는 가축을 노리는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유목민들의 가축을 약탈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 상당한 돈이 되고 주인이 되찾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온갖 마적단과 강도떼들이 횡횡하는 곳이 바로 대초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호시탐탐 가축들을 노리는 야생동물로부터도 가축들을 지켜내야만 합니다.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종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 간에 등가교환을 하는 대상에 가깝습니다. 유목민들이 가축들에게 먹을 풀과 물을 끊임없이 찾아주고 약탈자와 맹수로부터 보호해 주는 대가로 가축은 젖과 털 그리고 고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개념인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유목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활과 칼을 쓰는 법을 배웁니다. 가축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자는 그러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연유로 대초원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들이 제법 많습니다. 만약 그 불문율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러 온 자로 보고 서슴지 않고 죽여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장황한 설명에 지친 왕기가 입을 열었다.

    "자정원사. 유목민들의 삶이 힘들다는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다들 뛰어난 전사로 성장하지 않나? 그런 유목민들을 규합한 칭기즈칸이 그 덕분에 드넓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거고, 그거랑 은신한 자를 찾는데 개를 이용하지 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저하. 유목민이 아닌 고려인이나 한족은 몽골족의 관습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드린 것뿐입니다. 만약 저하께서 몽골족의 게르에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상대방의 게르 안으로 무기가 될만한 것을 들고 가면 절대 안 되지요. 그런 것을 들고 가는 것은 내가 이 게르를 점령하러 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칫 강도로 오인받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둥그런 원형 형태의 게르 안에도 엄격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출입문에서 보아 바로 맞은편이 가장 상석이며 불상 같은 의미 있는 물건들이 배치되는 공간입니다. 게르의 주인인 남자의 자리도 이 구역이며 주인과 동급 이상의 남자 손님도 이 구역으로 안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출입문에서 오른쪽은 여성의 전용 공간이며 왼쪽은 남성의 공간입니다. 흥성궁이 황궁 정문의 오른쪽 방향에 위치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이가 어린 사람은 출입문 가까이에 자리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개와 관련된 이야기지요."

    기다리던 개의 이야기가 나오자 왕기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게르 입구에는 언제나 유목민들이 기르는 개가 지키고 있습니다. 저하의 말씀처럼 개의 뛰어난 후각을 이용해 가축을 노리는 적들의 침입이나 맹수의 습격을 사전에 빨리 알아차리기 위해서이지요. 몽골족들의 개는 사납고 흉포합니다. 가축을 노리는 야생동물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개의 흉포성을 죽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훈련받지도 않습니다. 게르의 개는 오직 그 게르의 주인인 남자와 호트아일에 속해있는 남자의 말만 듣도록 교육받습니다. 즉 게르의 주인이 밖으로 나와 개의 목줄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 게르를 방문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만약 그걸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가는 개의 습격을 받아서 죽어도 게르의 주인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자정원사의 설명을 듣고 있던 왕기가 물었다.

    "호트아일이라는 게 뭔가?"

    "호트란 건 고려 말로 하면 가축의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즉 호트아일이라는 것은 소수의 가정들이 모여서 가축우리를 같이 쓰고 있는 유목 집단을 일컫는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황후는 여인의 몸이기에 몽골족의 개를 다룰 수가 없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저하. 황후의 침실로 개를 들이는 것은 몽골족의 금기를 어기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그랬다가는 남녀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엄격히 정해져 있는 몽골족의 관습상 온갖 중상모략이 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 개를 빌리고 싶어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몽골족들은 자신의 개를 절대 남에게 빌려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유목민들에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개는 한낱 짐승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이자 힘든 목축업을 같이 하며 고생하는 동업자라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척무관이 물었다.

    "그럼 차라리 한족의 개를 빌려오면 되지 않겠나? 황성을 나가면 저잣거리에 개가 넘쳐날 텐데 말이야."

    척무관의 질문에 자정원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척무관님도 아직 몽골족의 관습에 익숙하지가 않으셔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몽골족들이 한족을 싫어하고 고려인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 개와 관련된 것이지요."

    왕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개 때문에 한족을 싫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저하. 잘 알고 계시겠지만 고려인은 개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이는 몽골족도 마찬가지이지요. 고려인들보다 더 심하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조드'가 닥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개는 잡아먹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한족은 개를 즐겨 잡아먹습니다."

    강릉대군의 기억을 더듬은 왕기가 대꾸했다.

    "그렇지. 한족들은 예로부터 개를 즐겨먹어왔지. ‘주역(周易)’과 ‘예기(禮記)’에 보면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가 개를 잡아서 먹고 제사에 바쳤다는 구절도 나와 있어. 구파일방중에 일방인 개방도들이 개를 잡아먹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고. 근데... 조드는 또 뭔가?"

    "조드란 것은 유목민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지요. 대초원에서 봄에 눈이 많이 내리고, 녹은 눈이 녹았다가 얼어붙어 오래도록 다시 녹지 않아서 가축들이 풀을 먹지 못해 쓰러지는 현상을 조드라고 합니다. '그 어떤 뛰어난 용사도 목이 잘리면 죽고, 그 어떤 부자도 조드 한 번에 전 재산을 다 잃을 수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지요. 저하. 한족은 개를 식량으로 보기 때문에 몽골족들은 한족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고려인들도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전쟁통에서는 가끔 개를 잡아먹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는 크게 뭐라 하지 않습니다."

    왕기가 현대인의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뇌까렸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진 비상 시기에 개를 잡아먹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로군. 하지만 한족은 먹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를 잡아먹으니 몽골족이 싫어하는 것이고. 현대의 중국에서도 개고기는 높으신 분들만 먹는 고급 음식으로 취급되고 있지. 하긴 비상 시기에 개를 먹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야. 한국에서 복날에 개를 잡아먹는 풍속은 일본군의 지독한 수탈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일제강점기 때 생긴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방과 6.25를 거치며 전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뿐이라고.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고 욕하는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야.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개고기를 ‘약용(藥用)’으로 언급했었고, 로마에서도 개고기를 먹었으며 조리법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개고기 식용은 문화가 아니라 야만이다’란 말을 한 브리짓 바르도의 프랑스도 전쟁이 터지면 여지없이 개를 잡아먹었다. 보불 전쟁 당시에도 그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예술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에서는 개고기를 팔았고, 파리지엥들은 그걸 사서 즐겨 먹었지.'

    왕기가 상념에 빠져있을 때 자정원사가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대군 저하. 그런 이유로 한족의 개는 황궁 안으로의 출입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를 이용하지 못한 것이지요. 만약 저하나 척무관이 그 은신자를 찾아내 주시면 황후마마께서 두둑한 포상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소인에게 언질 하셨습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왕기가 말을 받았다.

    "알았으니 개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격적인 대책을 의논해 보세. 척무관. 기황후의 침실로 들어가서 은신자를 발견하게 되면 오른손을 들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게나. 만약 그 은신자의 무공이 뛰어나서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생각되면 왼손을 높이 들고 외치게나. 도망치라고 말이야. 그럼 내가 자정원사와 함께 기황후를 모시고 밖으로 도망가겠나. 척무관도 적당히 상대만 하다가 곧바로 몸을 빼도록 해. 난 척무관이 살아서 계속 내 옆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저하. 저하께서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생각되면 소관도 곧장 도망을 치도록 하겠사옵니다. 저도 이국만리인 이곳에서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자정원사를 보며 물었다.

    "은형암귀는 몽골족인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거라 보네."

    "네. 그자는 몽골족입니다. 저하."

    이윽고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궁녀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건물이 가까이 보이자 세 사람의 입이 조가비처럼 꾹 다물어졌다.

    [기황후의 침실]

    원나라 황후의 침실이라기보다는 고려에 있는 권문귀족 안주인의 방을 보는 것만 같았다. 고려풍이 유행이라더니 나전칠기로 장식된 침대와 자개장 그리고 화장대가 비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화문석으로 제작된 돗자리와 방석이 구비되어 있었다.

    은신자가 눈치채지 않도록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방석에 앉은 왕기가 어지간한 집만 한 평수를 자랑하는 널찍한 황후의 침실을 둘러보고, 단단한 나무로 물샐틈없이 막혀있는 천장을 살펴본 후 속으로 뇌까렸다.

    '침실이 이렇게 넓고 사방이 꽉 막혀있으면 아무리 척무관이라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겠어.'

    왕기의 시선이 눈을 꼭 감고서 방석 위에 앉아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척무관에게 향하자,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기황후와 자정원사의 시선도 척무관 쪽으로 일제히 향했다.

    그러길 잠시 눈을 뜬 척무관이 도저히 못 찾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기황후의 입에서 안타까워하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믿었던 십대고수 마저도..."

    그 순간 왕기가 기황후를 부르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황후마마!"

    기황후의 말을 자르며 침묵을 강요한 왕기가 빠르게 반가좌를 취하며 반야심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반야심공을 대성했을 때 분명히 맡을 수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척무관의 땀 냄새를 말이야. 개가 없다면 내가 개가 되면 그만이야. 제아무리 심장박동을 정지시켜도 체취를 감출 수는 없어. 이방에 누군가가 숨어있다면 그자의 체취도 맡을 수가 있을 것이야. 민족마다 평상시에 먹는 음식이 다르기 때문에 체취가 달라진다. 왜구에게서는 단무지 냄새가 나며, 고기를 많이 먹는 서양인들에게서는 고기 누린내가 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내가 찾아야 할 냄새는 분명하다. 그것은...'

    - 쉬이웅...

    넓은 침실에 퍼져있던 공기들이 왕기 몸 주변에서 회오리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자 기황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런 광경에 익숙한 척무관과 자정원사가 기황후를 안심시키며 한쪽 편으로 이동시켰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왕기가 자신의 감각에 잡히는 체취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런 왕기의 감각에 시큼한 냄새 한 가닥이 잡혔다.

    '바로 이것이다. 몽골족들은 예로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이락'을 물 마시듯이 마신다. 대초원에서는 물을 찾기가 어렵고 기껏 찾은 물에도 기생충과 병균들이 버글거리기 때문이지. 마유주(馬乳酒)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말의 젖으로 만든 것만은 아니야. 말뿐 아니라 양이나 염소, 야크, 젖소의 젖을 이용해서 만드는 술이니까. 아이락은 한국의 막걸리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지.'

    눈을 꼭 감고 있는 왕기가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차고 있는 목검을 집어 들고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새파란 검기로 둘러싸인 목검을 위로 치켜든 왕기가 시큼한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서 사냥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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