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8화 (18/171)
  • #18. < 기황후(奇皇后)와의 협상 - 2 >

    "그러니까... 기황후께서 황자 전하를 출산한 이후부터 누군가가 기황후의 침실에 숨어서 기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7년째 말이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고용보의 설명을 들은 척무관이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자 고용보가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듯 펄쩍 뛰었다.

    "제가 한 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황후마마께서는 타고난 품성이 부지런하시고 아랫것들을 아끼시는 분이시라 간단한 청소나 침구 정리 등은 본인의 손으로 직접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흥성궁에서 일하는 궁녀들조차도 황후마마의 허락 없이는 감히 침실에 들어갈 수가 없지요. 남자들은 당연히 더더욱 접근 불가이고요. 황후마마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와 황자 저하 그리고 소인뿐이옵니다. 소인이 침실에 숨어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 폐하나 황저 저하께서는 더더욱 그러하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마마의 침실에서 일어났던 사소한 일이나 황후마마와 제가 나눴던 대화를 바얀 승상이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침실에 숨어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지요. 다행히 황후마마와 소인이 저쪽에서 죄를 뒤집어 씌울만한 일을 꾸미거나 그런 종류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기에 여태껏 무사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도청 장치 같은 것이 없어.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왕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척무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은신술(隱身術)이 극도로 뛰어난 무공 고수가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간도 크군. 들켰을 때의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지? 단순히 본인의 목숨만으로 끝날 일이 아닐 텐데. 삼족의 목이 잘리거나 자신이 속한 방파가 멸문을 당할 엄청난 일인데 말이야."

    척무관의 말이 끝나자 왕기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겠지. 하나는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일 테고, 다른 하나는 설사 실수를 하여 들키는 일이 있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봐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 것일 거야. 뒤를 봐줄 누군가는 당연히 현 원나라 황실의 실세인 바얀 승상일 테지."

    척무관이 즉각적으로 물었다.

    "저하께서는 그자의 배후가 바얀 승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좀 전에 듣지 않았나? 침실에서 은밀히 나눈 이야기를 바얀 승상이 알고 있었다고 말이야. 그건 승상이 실수를 해서 들킨 것이 아니야.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서고 자신과 돌이킬 수 없는 원한 관계가 생겼다고 해서 제1황후마저 죽여버리는 자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은가? 처음 몇 년간은 기황후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최대한 감추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기황후 쪽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니 바얀 승상이 슬쩍 흘린 것이야. 기황후 쪽에서 초조함을 느껴 행동거지나 말에서 파탄(破綻)이 드러나기를 노리고서 말이지. 당장 지금의 상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거세를 하지 않은 나나 척무관을 기황후가 위험을 무릅써가며 자신의 침실로 불렀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태껏 기황후가 나름 잘 참아왔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가?"

    "역시 영민하시옵니다. 저하.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황자 저하의 교육 때문입니다. 황자의 나이가 이제 어느 정도 차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여야 되는데... 황후마마께서는 황자의 몸속에 고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당신께서 황자 저하를 침실로 불러 일대일로 직접 교육하시기를 희망하고 있사옵니다. 그것이 고려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실이 황제나 승상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고용보의 말을 곱씹어 보던 왕기가 갑자기 매서운 눈길로 고용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노린 것이었군. 자정원사가 보기보다 머리가 참 잘 돌아가. 오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어."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하.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옵니까?"

    "어제 자정원사가 날 찾아와서 산삼을 건네준 것부터 시작해서 오늘 쾌검청랑과 척무관이 대결을 벌인 일 그리고 이렇게 내가 기황후의 침실로 불려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잘 짜인 한 편의 경극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이야. 생각을 해봐. 기황후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제법 오래전 일이었을 것이야.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침실에 숨어있다는 은신술이 뛰어난 자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무공이 뛰어난 고수를 불러야만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어."

    "어떤 제약들이 따른다는 것입니까?"

    "첫째, 황궁 외부에서 그런 뛰어난 고수를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야. 황실 내부의 은밀한 사정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반길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잘못했다가는 기황후가 자신의 황자를 황태자로 올리기 위해 외부 세력과 손을 잡으려 든다는 모함을 받을 수도 있을 테지. 둘째, 황궁에 있는 뛰어난 고수 중에는 바얀 승상과 끈이 닿지 않는 자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야. 그런 면에서 척무관이 딱이지. 강호에서 십대고수로 불릴 만큼 뛰어난 고수이면서 고려 출신이니 바얀 승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어."

    척무관이 들으면 들을수록 골이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어떤 문제가 또 남아있다는 것입니까?"

    "이번 일을 은밀히 추진할 수는 없다는 것이야. 척무관이나 나나 자정원사처럼 내시가 아니기 때문이지. 거세를 하지 않은 남자를 침실로 은밀히 부르는 황후라. 승상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머릿속으로 당장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래서 자정원사가 뒤에서 은밀히 쾌검청랑을 부추겼을 것이야. 그쪽이 이기면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식으로 말이지. 그런 이유로 오늘의 공공연한 대련이 벌어지게 된 것이야.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떠들썩하게 말이지. 그래야만 뒷말이 안 나올 테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따를 수밖에 없어. 척무관이 반드시 쾌점청랑을 이겨야 할 뿐만이 아니라 침실에 은신해 있는 고수를 간단히 제압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야. 숨어있던 고수가 발각될 경우 그 고수의 손에 기황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어. 궁지에 몰린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를 모르니까. 수틀리면 관련자들을 다 죽이고 도망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값비싼 산삼을 선뜻 내려준 것이야. 도살장에 끌려갈 소를 잘 먹이듯이 그거 먹고 힘내서 꼭 이기라고 말이지. 자정원사.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것이 있나?"

    정곡을 찔렸는지 어느새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있는 자정원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십니다. 저하. 마치 옆에서 절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알아맞히시는군요, 저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저하와 머리싸움을 하려고 드는 자들은 미친 자들일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지혜로우실 줄이야... 감히 저하를 기만하려 든 소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왕기가 순순히 시인을 하는 고용보를 나무라는 대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후 손을 내밀었다.

    "원나라로 끌려와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이렇게 머리가 뛰어난 자정원사가 고려의 앞날을 걱정해 주고 있으니 본 대군의 마음이 지극히 기쁘다네. 이번 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꾸미기 위해 본 대군이 숙위에 임명되는 날을 무던히도 기다렸을 테지? 머리가 뛰어나면서도 인내심까지 갖추고 있으니 인재 중에 인재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눈가가 붉어진 고용보가 왕기가 내민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으며 대답했다.

    "대군 저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 못 하는 한낱 짐승도 그럴진대 소인이 어찌 모국인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겠사옵니까?"

    "본 대군이 약속하지. 자네의 충심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이야. 언젠가 내가 그대를 휘하로 두게 되는 날이 오면 반드시 중용할 것이고, 죽어서는 고려의 백성들이 그대를 영웅으로 기억하도록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조하겠네. 이제 보니 기황후가 뛰어나서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어. 그대가 있었기에 용케 암투에 휘말려 죽지 않고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곧바로 목이 날아가는 곳이 황궁일진대 말이야."

    "저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기쁘오니 소인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뛰어난 그대이기에 본 대군의 질문에 충분히 답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네."

    "어떤 질문이옵니까? 대군 저하."

    "세 가지를 묻고 싶네. 첫째, 침실에 은신해 있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모른다고는 하지 말게나. 황실을 자유로이 드나들고 승상인 바얀과 끈이 닿아있으면서 은신술까지 뛰어난 무공 고수가 절대 흔할 리가 없어. 그대가 나름 알아서 조사를 해봤을 테니 당연히 짐작 가는 자가 있겠지?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간단해. 그자가 만약 척무관보다 뛰어난 자라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야. 난 허무하게 죽어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말해보게나. 마음속에 두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소인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심중으로 짐작이 가는 자는 한 명 있사옵니다. 정림방의 당주 중에 한 명인 은형암귀(隱形暗鬼)라는 자입니다. 믿기지는 않지만 소문으로는 은신술이 극성에 달해서 심장박동을 멈추고도 하루를 너끈히 버티는 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누구도 그자의 은신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자이지요. 승상인 바얀은 정림방의 방주인 팔비신장과 어렸을 때 같이 무공을 수련했던 죽마고우라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팔비신장이 바얀의 부탁을 받고서 은형암귀를 빌려줬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고용보의 말에 왕기가 척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척무관. 은형암귀라는 자와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는가? 난 첨들어보는 자라서 말이야."

    "숨어있는 자가 팔비신장 본인만 아니라면 문제없습니다. 그자의 은신만 발각할 수 있다면 소관이 일대일로 붙어서 가볍게 이길 것이옵니다. 하지만 저하. 소관도 그자의 은신을 발견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거야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되는 것이고. 척무관이 이길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고칠 필요는 없겠지. 자정원사. 두 번째 궁금한 것이 있네, 바얀의 진정한 속셈이 뭔가? 승상이 제아무리 권력의 실세라고 해도 상대방은 현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2황후야. 제1황후도 죽인 자가 2황후마저 죽인다? 제아무리 승상이고 적절한 명분이 있다고 해도 황제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미우나 고우나 황후들은 황제에게 있어서 자신의 부인들이야. 그런 부인들을 다 죽이는 자를 가만히 놔두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에 대한 대비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위험부담이 너무 커다고."

    "저하. 원나라 황실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습니다."

    "어떤 불문율인가?"

    "정실 황후는 반드시 옹기라트(弘吉刺) 가문 출신에서 뽑아야 한다는 불문율(不文律)이 있습지요. 이것은 칭기즈칸 이후 지켜져 온 원칙이옵니다. 바얀이 바로 그 옹기라트 가문 출신이고 그의 딸인 바얀코톡토(伯顔忽都)는 황제의 후궁들 중 한 명이옵니다."

    "아...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군. 걸리적거리는 황후들을 다 치우고 자신의 딸이 제1황후가 되게 할 속셈이었어. 황제와 승상의 딸 사이에 아들이 있는가?"

    "아직 아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 후사는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는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물어보겠네. 침실에 숨어있는 자를 발견할 간단한 방법을 놔두고 왜 이리 복잡하게 일을 꾸민 것인가?'"

    "간단한 방법이라니요? 저하.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자를 발견하기 위해 잘 훈련된 개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닌가? 제아무리 심장박동을 숨겨도 냄새를 숨길 수는 없을 것이야. 그대라면 개코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그건 저하께서 몽골족의 습성을 잘 모르셔서 그런 것이옵니다. 저하. 대초원을 떠도는 몽골 유목민들의 이동식 집인 게르(Ger)를 방문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한족들이 파오(包)라고 부르는 집 말입니다."

    "대초원에 가본 적은 당연히 없다네."

    "그래서 그런 것이옵니다..."

    고용보가 장황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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