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7화 (17/171)
  • #17. < 기황후(奇皇后)와의 협상 - 1 >

    고용보의 안내를 받아 왕기와 척무관이 기황후의 침실 쪽으로 막 출발하고자 할 때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원나라 병사들 중에 비교적 고위 무관으로 보이는 자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형제의 나라 고려에서 오신 강릉부원대군께서 어리신 나이에 이렇게까지 무공이 뛰어날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이에 감명받은 소인이 대군께 별호를 하나 지어드릴까 하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같이 흥분하며 재촉했다.

    - 어떤 별호요?

    -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 멋진 별호가 아니면 각오하시오.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에 목이 타는지 침을 크게 한번 삼킴 무관이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군께서 가만히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 제대로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를 선풍(旋風)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오. 대군이 검을 휘두름에 천지사방에 향기로운 꽃 내움이 진동하니 이를 향검(香劍)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외다. 따라서 본인은 대군의 별호를 '선풍향검(旋風香劍)'이라고 지었소이다. 그리고 사영 중에 한 명이었던 화산일영이 대군의 뛰어난 무공에 감탄하여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존경한다고까지 말하였으니 선풍향검을 후기지수 중에 으뜸이라는 사영사미보다 윗줄인 일군(一君)의 자리로 따로 올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다들 내 생각이 어떠하오?"

    - 선풍향검이라. 참으로 좋은 별호이외다.

    - 아주 적절한 별호요. 작명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소이다.

    뛰어난 무인을 존경하는 원나라 병사들답게 손을 위로 올리며 다들 입을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 선풍향검! 선풍향검! 선풍향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용보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왕기에게 고했다.

    "선풍향검에 사영사미 보다 한 단계 위인 일군의 지위에 올린다라. 저하. 아주 멋들어진 별호를 받으신 것을 경하 드리옵니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용보와 달리 왕기와 척무관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입을 모아 반대의 의견을 내었다.

    "이건 그다지 좋아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이오."

    "맞습니다. 저하.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고용보가 물었다.

    "저하. 원나라 병사들이 저하의 뛰어난 무공을 인정하며 칭송하는 것인데 왜 좋아할 일이 아니 옵니까?"

    "생각해 보시오. 현재 고려의 왕위는 원나라 황실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오. 그럼 원나라 황실이 원하는 고려의 왕은 어떤 왕이겠소? 자신들의 말을 잘 들으면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잘 따르는 꼭두각시 같은 왕을 원할 것이오. 물론 선왕이었던 충혜왕처럼 황음무도(荒淫無道) 했던 암군(暗君)도 곤란하겠지. 고려의 정국이 안정이 안되어 계속 뒤숭숭할 테니까. 본 대군도 들어서 잘 알고 있소.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다시 고려로 돌아와 복위한 충혜왕이 또다시 원나라로 압송되어 유배 판결을 받고서 계양(揭陽)으로 가는 도중에 독살을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지만 슬피 우는 백성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오."

    고용보가 왕기의 말을 받았다.

    "그건 소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이지요. 고려 백성들이 기뻐서 집 밖으로 뛰쳐나와 날뛰었다고 합니다. 암군이 물러났으니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나라 황실이 더 싫어하는 왕은 충혜왕 같은 왕이 아닐 것이오. 영민할 뿐만 아니라 무력까지 뛰어나 원나라 병사들마저 칭송하는 나 같은 자가 왕이 되는 것을 더 싫어할 것이오. 이건 내기를 해도 좋소이다. 뛰어난 왕이 고려를 안정시켜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몇십 배는 더 싫어할 테니까. 그대가 보기에는 원나라 황실이 나같이 뛰어난 자를 고려의 왕위에 오르게 가만히 놔둘 것으로 보이오? 현 원나라 황제인 혜종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자란 말이오?"

    왕기의 설명에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고용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 황제인 혜종이 성군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난 황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자도 아니지요.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원나라 황실은 고려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곤란하다는 거요. 나의 뛰어남이 너무 일찍, 너무 널리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소.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나조차도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하아..."

    말을 끝내며 왕기가 한숨을 크게 내쉬자 척무관이 그런 왕기를 위로했다.

    "저하. 자고로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하였사옵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뚫고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지요. 저하의 뛰어남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원나라 황실도 이미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고려각에도 황실의 이목이 쫙 깔려 있을 테니까요. 단지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생각하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척무관과 고용보를 몰고 기황후의 침실로 출발했다. 어수선했던 경내를 벗어나자 왕기가 고용보에게 물었다.

    "기황후가 아까 말한 언질이란 것이 무엇이오?"

    "저하. 황후마마께서 혹시 저하를 모질게 대하시고 고려에 대해 안 좋게 말씀하시더라도 이해를 해달라는 당부를 소인에게 하셨습니다. 황후마마의 본심이 아니신 것이지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저하. 황후마마는 고향인 고려에 대한 사랑이 깊으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소인이 뽑았을 리가 만무하지요. 하지만 현재 황후마마는 원나라 황실의 철저한 감시를 당하고 있사옵니다. 본인의 속내를 털어낼 수가 없는 입장에 처하신 것이지요. 저하. 황후마마께서 황실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서 계실 수 있는 것은 황자 전하를 출산하신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이 혹시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마치 자신을 테스트해보는 듯한 고용보의 질문에 잠시 머리를 굴린 왕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과 강릉대군의 기억을 조합한 후 입을 열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오. 첫 번째는 고려 여인으로 황후의 지위에 올라간 여인이 기황후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오. 이전에도 그러한 적이 몇 번 있었으니 황실에서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겠지. 만약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기황후가 지금과 같은 권력을 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오. 주변에서 견제가 극심하게 들어왔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기황후 이전에 다른 분들이 계셨지요. 원나라 4대 황제였던 인종(仁宗)의 후비였던 '비얀-코토크(伯顔忽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고려의 왕이셨던 충선왕의 비(妃)인 순비(順妃) 허씨(許氏)의 따님으로 충선왕의 비인 순비(順妃)께서 충선왕과 결혼하기 이전에 낳은 딸이지요. 즉 계부(繼父)가 충선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태정제(泰定帝)라고 불리는 원나라 6대 황제인 진종(眞宗)의 황후였던 '다마시리(達麻實里)' 역시 고려의 여인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김심(金深)이 정승에 3번이나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고려의 문벌 귀족 출신이었지요. 이러한 여인들이 이미 있었기에 기황후께서 별다른 반대 없이 황후의 자리로 올라서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용보의 설명에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뇌까렸다.

    '기황후의 아들은 장차 명이 건국되고 북쪽으로 쫓겨난 몽골족이 새롭게 세운 국가인 북원(北元)의 1대 황제 소종(昭宗)이 된다. 중요한 건 소종의 황후인 권황후(权皇后) 역시도 고려 여인이었다는 것이야.'

    생각을 정리하던 왕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원나라 황실은 고려 여인들을 지나치게 좋아한단 말이지. 원나라가 정복한 국가들에서 끌어모은 전 세계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황실에 넘쳐날 텐데 말이야. 몽골족이 비록 족외혼을 철칙으로 여긴다고 해도 그 정도가 너무 과해."

    왕기의 중얼거림을 들은 고용보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저하. 몽골인들은 고려를 기본적으로 동원이족(同原異族)이 세운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과 고려로 갈라지긴 했지만 그 뿌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황실에서뿐만이 아니라 몽골족 전반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생각이옵니다. 원나라의 벼슬아치들 사이에서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거실에는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를 장식하고, 고려의 화문석을 깔고 자는 것이 유행이 된지 오래이옵니다. 이를 고려풍(高麗風)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한 지가 제법 오래되다 보니 현 황실의 공경대신(公卿大臣)들 중에 상당수가 고려 여인이 낳은 자들입니다. 고려 여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학문이 뛰어나고 현명하여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평이 자자하옵니다. 오죽하면 '고려 여인을 아내로 맞지 아니하면 명가(名家)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이 황실 주변에서 떠돌고 있겠습니까? 일반 백성들의 시각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를 '신랑-신부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지요. 많은 고려 여인들이 원나라로 넘어왔지만 몽골족의 여인들도 고려로 많이 건너갔으니까요. 그 수가 물경 이십만 정도라고 하옵니다."

    '동원이족이라. 유전학적으로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태어날 때 몽고반점(蒙古斑點)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그래서 고려가 멸망하지 않은 것인가?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나라는 하나같이 모두 멸망했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지고서도 유일하게 왕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고려뿐이야.'

    알겠다는 듯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용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아주 간단하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지. 2황후였던 기황후가 지금과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이유는 원나라 황제인 혜종의 1황후가 10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야. 1황후가 아직도 살아서 버티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막강한 권력을 누리기는 힘들었을 테지. 소문으로는 기황후가 1황후였던 '다나슈리 카툰'을 독살하였다고 하던데..."

    왕기의 말에 고용보가 펄쩍 뛰었다.

    "저하.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타고난 미색과 총명함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시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모질고 독한 성품이 못되옵니다. 이는 소인이 보장할 수 있사옵니다."

    "그럼 1황후가 어떻게 죽은 것인가?  내가 워낙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이라 자세한 정황을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야."

    "1황후였던 다나슈리 카툰은 한때 태사(太師)를 지낸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의 딸이옵니다. 태평왕은 권력의 실세 중에 실세였지요. 하지만 태평왕이 죽고 난 후 황후의 오빠인 텡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거기에 연루된 1황후는 폐위가 되었으며 황궁 밖에서 지내다가 바얀(伯顏) 승상이 보낸 독주를 마시고 사망했습니다. 바얀 승상이 1황후를 끝끝내 죽인 이유는 본인이 탱기스의 반란을 진압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친위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바얀 승상이 탱기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1황후 집안의 씨를 말렸지요. 1황후의 오빠인 탱기스와 동생인 타라카이를 다 죽여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에 1황후를 계속 살려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바얀 승상이 지금은 기황후를 철두철미하게 감시하면서 강력하게 견제를 하고 있사옵니다."

    고용보의 설명을 듣고 있는 왕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원이 출연했던 드라마 기황후는 역사를 왜곡한 드라마로 유명하다. 드라마에 나온 내용들은 거의 다가 거짓이야. 역사적으로 볼 때 기황후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테지. 하나는 몽골인의 입장에서 볼 때 기황후의 집권이 원나라의 멸망에 분명히 일조를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기황후의 혈족들이 부원배로 지내며 정권을 잡아 고려에 큰 피해를 주었고 이들이 공민왕에 의해 몰살되자 군대를 몰아 고려를 침공했다는 점에서 매국노(賣國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실제로 겪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은 또 달라 보여.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건지 나 자신조차도 정확히 모르겠군.'

    골치가 아픈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왕기가 물었다.

    "그래서? 기황후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설마 나와 척무관에게 바얀 승상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척무관이 아무리 강호의 십대고수라고 할지라도 그건 무리야."

    왕기의 물음에 고용보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얀 승상은 무공이 화경에 가까운 뛰어난 고수이면서 호위도 워낙 삼엄하여 그런 식으로 제거하기가 불가능한 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만약 그랬다가는 원나라의 군사들이 당장 고려로 쳐들어 갈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황후마마께서는 고향인 고려를 많이 걱정하고 그리워하고 계시는 분인데 그런 얼토당토않는 부탁을 할 리가 없지요."

    "그럼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고 싶으신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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