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6화 (16/171)
  • #16. < 검향지경(劍香之境)의 비밀 - 4 >

    쾌검청랑의 제자란 자가 왕기의 말을 받았다.

    "정말이십니까? 전 어렸을 때부터 이날까지 쭉 화산파의 무공만을 익혔고 강호동도들이 제게 매화일영(梅花一英)이라는 과분한 호를 붙여주셨습니다. 만약 제가 검향지경인 것을 증명하면 대군께서는 숙위로서 황자 저하의 호위를 맡는 것을 포기하시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십니까?"

    왕기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자 옆에 서있던 고영보가 빠르게 설명을 해주었다.

    "대군 저하. 매화일영은 강호의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 으뜸이라는 사영사미(四英四美) 중의 한 명이옵고 강호에 흘러나온 화산파의 무공을 절정의 경지로 익혔다고 소문이 나있는 자입니다. 함부로 약속을 하시면 곤란하옵니다."

    '검향지경의 원리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 과학에 정통한 나조차도 한참을 고민해서 겨우 깨친 원리를 이 시대의 무인이 그것도 이제 겨우 30대인 자가 알고 있을 리가 없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왕기가 고영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해주었다.

    "내가 약속하리다. 그 대신... 그대가 검향지경이 아닌 것으로 판정이 나고 만약 내가 검향지경의 경지라면 어떡하겠소?"

    "그럼 제가 저하와 겨루지 않고도 진 것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황후마마의 말씀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근데..."

    매화일영이 왕기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40년의 내공도 채 갖추지 못한 저하가 검향지경의 경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요? 검향지경은 최하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갖추어야 하고 매화검법의 무리(武理)에 정통하여야만 겨우 도전을 해볼 수 있는 경지이옵니다. 물론 도전한다고 다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공의 축적량이 무공의 경지를 결정짓는 것는 아니잖소? 검향지경의 무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내공이 좀 부족해도 상관없을 것이오."

    매화일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오호... 그럼 저하는 검향지경의 무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이로군요?"

    "나 스스로는 그렇다고 자부하고 있소."

    "뭐 좋습니다. 그럼 판정은 누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대군께서 대충 시전하시고 막무가내로 본인이 검향지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우기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계속되는 도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의 왕기가 주변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검향지경에 오른 자는 검기에서 매화향이 풍긴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이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행히 다들 콧구멍을 두 개씩 가지고 계시니 따로 심판이 필요 없을 것이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화일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좋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엄중하게 판정을 봐주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그럼 본인이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에 매화 개수에 따른 대표적인 초식들을 시전해 보이겠습니다."

    매화일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왕기가 속으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현대 과학에서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상호작용의 힘은 4가지라고 밝혀냈다. 중력(重力), 전기와 자기를 합쳐서 부르는 전자기력(電磁氣力) 그리고 강력(强力)과 약력(弱力)이지. 이 중에서 강력과 약력은  원자핵 내부에서 존재하는 힘이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중력과 전자기력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가 있는 것들이지. 이십사수 매화검법에서 검기로 매화를 피우는 원리는 전자기력에서 나왔다는 것이 내가 세운 이론이다.'

    "하압! 매류통천(梅流通天)"

    매화일영의 검에서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일전에 왕기가 척무관의 태산압정을 상대할 때처럼 다섯 가닥의 검기가 줄줄이 튀어나와 하늘로 올라가며 한 송이 아름다운 매화를 피워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튀어나올 때 지켜보던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잘 배웠군. 검기로 매화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아주 깔끔해.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향지경에 달하기는 턱없이 모자라. 매화검법의 비급에 따르면 매화검법을 창시한 도사는 지독한 매화 성애자였다. 추운 겨울 밖에 서있는 매화가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자신의 방으로 가장 맘에 드는 한 그루 매화나무를 옮겨심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방에 심은 매화는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밖에 있는 매화들은 다 꽃을 피웠는데도 말이다. 당연하지. 매화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품종이니까. 따뜻한 방안에 있는 매화나무는 계절이 겨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개화(開花) 호르몬이라는 플로리겐(Florigen)과 개화시기 조절 유전자인 자이겐티아, 콘스탄스 등이 각성하지를 못해 꽃을 피울 수가 없게 된다. 매화나무를 걱정하여 행동한 도사의 호의가 매화나무 입장에서는 오히려 악의가 된 셈이지.'

    "하압! 이매쟁선(二梅爭先)"

    매화일영의 목검에서 두 개의 매화가 튀어나와 서로 앞을 다투며 날아갔다.

    '그걸 안타깝게 여긴 도사는 양털로 된 수건으로 매일같이 매화나무를 깨끗이 닦아주었다고 적혀 있다. 혹시 벌레 때문에 꽃을 못 피우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 마른 수건으로 보석인 호박(琥珀)을 문지르던 사람처럼... 호박을 문지르면 마찰전기의 일종인 정전기가 발생한다. 인류 최초로 전기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이지. 전기를 뜻하는 electricity가 고대 그리스어로 호박을 뜻하는 elektron에서 나왔다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어. 그와 같은 현상을 매화검법을 창시한 도사도 똑같이 발견했을 것이야. 정확한 작동 원리와 전기의 개념까지는 몰랐겠지만 마찰전기가 발생하면 주변의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은 알아차렸을 테지. 열심히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달라붙듯이 말이다.'

    "하압! 삼매산화(三梅散花)"

    매화일영의 목검에서 튀어나온 세 개의 매화가 상, 중, 하로 빠르게 흩어지며 날아갔다.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조금씩 힘에 부치는 모양이로군. 매화의 형상이 조금씩 이그러지기 시작했어. 아무튼 정전기로 인해 주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한 도사는 내공의 운용법에 그걸 적용했다. 음전하가 부과된 진기와 일반적인 진기를 섞어서 검기를 방출하면 대기 중에서 보다 오래 지속한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그걸 이용해 매화검법을 창시한 것이지. 지속력이 뛰어난 검기로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매화 형상을 만들었고 말이야.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매화검법의 핵심 이론이다.'

    매화일영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아압! 사매난추(四梅難追)"

    목검에서 둘둘씩 방출된 매화 네 송이가 마치 말이 달리듯 앞발과 뒷발처럼 짝을 이루어 허공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한계가 드러나고 있어. 6개의 매화를 시전할 수 있다고 말하더니 허풍이었나 보군. 잘해봐야 다음 초식이 끝일 것이야. 저 정도로는 매화향을 뿜어낼 수가 없다. 검향지경은 매화검법의 개념과 전혀 다른 별개의 개념이니까. 어느 시대이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야. 제논은 무색무취의 원소이기 때문에 검기로 만든 매화에서 향기가 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거라고. 하지만 매화검법으로 향기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매화의 꽃향기라기보다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함을 느끼게 하는 향기이지.'

    "이이익... 오매낙락(五梅落落)."

    안간힘을 쓴 매화일영의 목검에서 다섯 개의 이그러진 매화가 피어나 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매화일영이 더 이상은 힘들다는 듯 양손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여러분들이 지켜보고 계셔서 소인이 많이 긴장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뜨겁게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다.

    - 짝짝짝...

    - 대단한 솜씨외다. 검기로 매화를 만들다니 말이오.

    - 맞소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매화였소.

    - 무림사영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솜씨였소. 명불허전이오.

    그때였다. 왕기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꽃향기를 맡은 자가 있소이까? 있다면 손을 한번 들어보시오. 킁킁... 난 아무리 맡아도 못 느끼겠는데 말이외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지자 목검을 든 왕기가 가운데로 나아가며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으니 그럼 매화일영께서는 검향지경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판정하겠소이다. 이의가 없으시다면 이번에는 본 대군이 솜씨를 보여드리겠소. 잘 지켜봐 주시오."

    당당하게 목검을 앞에 세운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매화일영의 말이 맞아. 지금의 나로서는 내공이 부족하여 검향지경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이점이 있어. 첫째는 현대 과학을 배운 공학도라 향기를 뿜어내는 원리와 마찰전기의 특성을 빠삭하게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 둘째는 반야심공의 특성이다. 반야심공의 흡입력이 부족한 나의 내공을 잘 보충해 줄 것이야. 권력의 실세인 기황후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고려의 왕이 되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정신을 집중한 왕기가 정기신을 일제히 일깨웠다. 그러자 서있는 왕기의 몸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야심공을 극성으로 운기하자 앞뜰에 있는 흙먼지들이 회오리에 휘말리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때 왕기가 마음속으로 힘차게 외쳤다.

    '향기를 내뿜으려면 최대한 많은 매화를 꽃피워서 동시에 터뜨려야만 한다. 어디 한번 시작해보자고.'

    - 위이잉...

    흙먼지에 휩싸여 왕기의 몸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회오리를 뚫고 하나둘씩 매화가 튀어나와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열을 향해 달려갈 때 사람들의 환호성이 절정으로 올라갔지만, 어느덧 숫자가 스물에 가까워지자 사방이 정적으로 감싸였고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마침내 서른에 가까워지자 하늘이 온통 검기로 이루어진 매화로 가득 찼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매화일영의 입에서 신음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화만천(梅花滿天)의 수법. 정말로 검향지경에 들은 것인가?"

    회오리 속에서 매화를 줄줄이 뽑아내던 왕기가 반야심공의 효력에도 불과하고 바닥을 드러낸 내공을 이를 악물고 끌어내며 하늘에 떠있는 매화들을 일제히 폭발시켰다.

    - 콰과과광...

    거대한 폭발음 속에서 회오리가 정지하고 완전히 탈진한 왕기가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을 때 흥성궁 앞뜰에 한줄기 상쾌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분한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이건 매화향이다! 다들 맡아지지?

    - 맞아. 콧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면 못 맡을 수가 없다고.

    - 전설의 검향지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군.

    그리고 매화일영의 우렁찬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두말할 것도 없는 검향지경이오. 약속대로 본인이 졌다는 걸 시인하겠소. 같은 매화검법을 익힌 한 사람의 무인으로 검향지경에 오른 대군을 존경하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척무관이 왕기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정말 대단하시옵니다. 저하. 아랫것들이 보고 있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일으키는 척무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왕기가 환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로군, 사람들이 착각... 아니 착향(錯香)을 하고 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지금 나는 냄새는 엄밀히 말하면 매화향이 아니다. 특유한 냄새 때문에 ‘냄새를 맡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ozein에서 나온 오존(Ozone)의 냄새이지. 워낙 독특한 향이라 공기 중에 아주 미량만 존재해도 사람은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산 정상이나 바닷가에서 주로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향을 상쾌하다고 느끼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성물질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유에서 또 다른 유로 변형시키는 건 가능해. 오존은 산소(Oxygen) 원자 2개가 결합되어 있는 대기 중의 산소에 하나의 산소 원자를 더 결합시킨 삼중 산소를 일컫는 것이다. 삼중 산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기 중에 무선 방전(放電)을 시키면 된다. 검향지경이라는 것은 결국 수십 개의 매화에 포함되어 있는 마찰전기의 양이 그러한 무선 방전을 통해 오존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자를 일컫는 말인 것이야. 물론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니 화산파에서는 전설로 남아있는 것이지. 나도 편법을 사용했기에 겨우 가능한 일이었어.'

    척무관의 팔에 기대어 몸을 일으켜 세운 왕기가 기황후를 바라보자,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기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속대로 대군의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지요."

    기황후가 고용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군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해동제일검과 함께 내 침실로 모시도록. 내가 언질 한 말도 미리 전달해 주고."

    고용보가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황후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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