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검향지경(劍香之境)의 비밀 - 3 >
왕기가 빠르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발 놀림을 정신없이 쫓아가며 척무관이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하. 소관이 항상 발이 먼저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저하가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림인이기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저잣거리에 있는 파락호들이나 군문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내공이 없는 파락호들끼리의 싸움이라면 누가 먼저 찌르느냐가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일단 먼저 칼침을 놓게 되면 상대방이 저항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체나 허리의 활용 등이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찌르는 놈이 필승이라는 소리지요. 하지만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무림인은 칼침을 한방 먹는다고 해서 곧바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공이 진통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각종 호르몬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버틸 수가 있는 것이지.'
왕기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일 때 척무관이 말을 이었다.
"어설프게 팔만을 이용해 찔렀다가는 상대방의 제대로 된 검격(劍擊)을 막을 방법이 없어집니다. 허겁지겁 막아봐야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자신의 검이 상대방의 검에 의해서 튕겨져 나가고 온몸이 훤히 드러나서 몸통이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지요. 그래서 무림인이 무서운 것입니다. 물론 목이나 심장을 찌를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그런 치명적인 부위는 상대방도 필사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찌르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왕기가 쾌검청랑의 경쾌한 발 놀림을 예의 주시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점창파(點蒼派)의 무공은 극단적인 쾌를 추구하며 구대문파의 그 어떤 검법보다 빠르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점창파가 구대문파의 수위권으로 올라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수위권은커녕 항상 구대문파의 말석에 위치해 있던 문파였다. 단순히 빠르기만 해서는 무림인들의 결투에서 이길 수가 없다는 뜻이지. 내공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마구 찔러대니 저승사자와 같겠지만...'
쾌검청랑이 공격을 시작하려는지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다는 사일검법(射日劍法)이라는 명칭처럼 마치 활을 쏘듯 검을 든 오른손을 치켜들어 뒤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겼고 그런 검에는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는 검기가 잔뜩 씌워져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쾌검청랑의 왼발이 멈춰지는 순간 왕기의 눈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마침내 날아온다. 구대문파를 통틀어 가장 빠르다는 사일검법의 찌르기가... 응?'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던 왕기의 눈에 특이한 모습이 잡혔다.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위치해서 손을 보호해 주는 코등이를 쾌검청랑의 오른손 검지가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빠르게 모스부호를 두들겨 대는 전보수(傳報手)처럼 코등이를 넘어간 검지가 칼날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두들겨 주고 있었고, 그로 인해 빠르게 찔러가는 검의 끝이 미세하게나마 계속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찌르기에서도 저런 심오한 변화를 주는구나. 저런 흔들림으로 인해 상대방이 완벽하게 막지 못하면 검이 옆으로 손쉽게 미끄러지며 목적한 찌르기를 성공시킬 수가 있게 될 것이야. 역시 역사가 깊은 구대문파의 검법다워. 하지만 척무관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을 척무관이 보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 쐐애액...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쾌검청랑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척무관의 목을 향해 찔러가자 왕기가 속으로 외쳤다.
'상대방의 목표는 목이다. 찔리면 즉사야. 하지만 난 고려 무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척무관을 믿는다.'
왕기의 기대에 부흥하듯 어느새 몸의 정면으로 바짝 세운 척무관의 검이 파란 물감으로 칠한 듯 푸르게 변해있었다. 밖으로 검기를 내뿜지는 않았지만 내충법에 의해 가득 찬 기가 검을 새파랗게 물들인 것이었다. 그런 검이 좌우로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손바닥만 한 넓이의 검 서너 개가 합쳐진듯한 단단한 벽을 척무관의 목 바로 앞에 우뚝 세웠다.
'저건 호신강기(護身罡氣)와 더불어 최고의 수비 기법이라는 검벽(劍壁)? 아니야. 그러기에는 수비 범위가 너무 좁아. 검벽은 몸 전체를 커버한다고 했고 화경에 들어서야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어. 아무튼 저 정도면 목은 잘 보호할 수가 있겠군. 근데 저렇게 세워놓고 보니 한그루 푸른 소나무가 우뚝 서있는 것처럼 보여. 송학검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수법이로군. 나라면 저 수비망을 뚫을 수가 있을까?'
- 꽈앙.
왕기가 고민하고 있을 때 거대한 폭음과 함께 쾌검청랑의 검이 마치 소나무 밑동에 맞고 튕겨 나온 돌멩이처럼 맥없이 튕겨져버렸다. 막대한 반발력에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가볍게 손목을 돌리며 쾌검청랑이 입을 열었다.
"어지간한 굵기의 나무를 통째로 꿰뚫는 나의 사일낙일(射一落日)을 검기 없이도 막을 수가 있는 걸 보니 고려 특유의 검술을 익힌 것이 확실하군. 천하의 십대고수라는 해동제일검 다워.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나의 세 곳 동시 찌르기 초식인 삼사합일(三射合一)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야. 몸 전체를 다 방어할 수는 없을 테니까. 꼬치에 꿰듯 단숨에 죽여주마."
공격 수법을 사전에 훤히 다 알려주는 쾌검청랑을 보며 기가 막힌 왕기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는 고용보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자는 한족인가?"
"네. 한족입니다. 물론 원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은 이미 검증이 된 자이지요. 방주와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몇몇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정림방의 대부분은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에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게 무공을 내놓는 조건으로 이전과 같은 강호 활동을 보장해 준 결과이지요. 물론 구대문파에는 한족뿐만이 아니라 고려인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도 제법 있습니다. 세력 확장을 위해 각 문파에서 꼼수를 쓰는 것이지요. 일정 숫자 이상의 한족이 모여 있으면 더 이상 제자를 받을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어쩐지. 타고난 천성이 뽐내기를 좋아한다는 한족 같더라니...'
그 순간 흥성궁 앞뜰에서 잠자리가 날개를 세차게 떠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부우웅. 부우웅...
다시 시선을 돌린 왕기의 눈에 오른손으로는 들고 있는 검을 뒤로 한껏 잡아당기고 왼손으로는 검의 중단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쾌검청랑의 모습이 잡혔다. 검지로 두드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폭으로 검날이 마치 바이킹을 타듯 위아래로 낭창거리고 있을 때였다.
- 쾅.
마치 창공을 나는 한 마리 학처럼 양팔을 좌우로 넓게 벌린 척무관이 왼발을 앞으로 내밀어 힘차게 진각을 밟는 모습이 왕기의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척무관이 쏜살처럼 쾌검청랑을 뎦쳐가며 오른팔을 세차게 휘둘러 상대방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쳐 갔다. 그러자 삼사합일을 준비하고 있던 쾌검청랑이 다급히 검을 위로 치켜들며 수비에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찌르기가 베기보다 빠르다고 해도 상대방의 검은 이미 휘둘러진 상태다. 타이밍이 늦었어. 설사 찌르기에 성공해서 척무관의 심장을 찌르는데 성공하더라도 저 기세를 멈출 수는 없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머리통이 두 쪽이 나는 모험을 할 수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완벽한 참격(斬擊)이로군. 발경의 타이밍, 하체와 허리에 이은 어깨의 활용 그리고 마지막 손목의 회전까지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깔끔해. 일전에 내가 당했던 태산압정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하군. 척무관이 나와의 대련 때 손속에 사정을 뒀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 쾅. 쾅. 콰앙. 쾅...
학이 날개를 흔들듯 풍차처럼 무섭게 돌아가던 척무관의 연이은 참격을 쾌검청랑이 용케 막아내자, 척무관의 발이 땅에 닿았다.
"후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척무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자 여러 곳을 찌르기보다는 속도로 승부하려는 듯 쾌검청랑의 오른팔이 뒤로 신속히 당겨졌다. 그 순간 왕기는 발견할 수가 있었다. 척무관의 왼발이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유령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며 그와 동시에 어깨와 팔꿈치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말이다.
'내가 수도 없이 당했던 귀신같은 그 찌르기다.'
- 피이익...
화살이 대기를 꿰뚫고 나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척무관의 목검이 찌르기를 준비하고 있는 쾌검청랑의 명치에 빠르게 틀어박혔다.
- 뻐억.
거대한 해머로 벽을 두들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입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며 쾌검청랑의 몸뚱어리가 공중을 훨훨 날아갔다. 그 모습을 얼음처럼 냉정한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던 척무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서 빠른 찌르기를 너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사부님!"
제자라는 자가 바닥에 떨어져 피를 철철 게워내며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쾌검청랑을 향해 뛰어갈 때 왕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뇌까렸다.
'보면 볼수록 무섭군. 내가 대련 때 당하던 찌르기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빠른 속도였어. 어제의 나라면 절대 막을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잠시 고민을 하던 왕기가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앞뜰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며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오늘의 나라면 충분히 막을 자신이 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원나라 병사들을 시켜 쾌검청랑을 어딘가로 들려보낸 제자라는 자가 왕기의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원한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부를 저렇게 만든 해동제일검과 붙고 싶지만... 황후마마의 말씀도 있고 하니 오늘은 고려의 대군이라는 그대를 두들겨 패주는 것으로 만족을 하지."
- 피식.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왕기가 대꾸했다.
"사부도 못 당해서 반병신이 된 것 같은데 제자인 그대가 강호의 십대고수를 상대하겠다고? 아서시게. 보아하니 그대는 나도 못 이길 것 같으니까 말이야."
"사부께서는 평생을 쾌(快) 하나에 바치셨다. 하지만 쾌검은 일종의 편법이야. 그러는 바람에 쾌검의 속도를 감당하는 자를 만나면 속절없이 지게 되는 약점이 있으셨지. 그렇지만 난 다르다. 편법을 버리고 난 정통 검법을 택하였으니까."
상대방이 목검을 들어 올리자 같이 목검을 들어 올리며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던 왕기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익힌 것이 화산파의 매화검법인 것인가?"
순간적으로 움찔한 상대방이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인가?"
"나 역시 매화검법을 익혔으니까. 빤히 보고서도 모르면 내가 바보지."
그때였다. 최고조로 끌어올린 왕기의 감각에 가까운 전각에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서는 것이 잡혔고, 원나라 병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일제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색으로 도배한 황자의 손을 잡고 나온 기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 전 보고를 받았어요. 정림방의 당주가 대련을 하다가 중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아무쪼록 피를 보지 말고 대련을 하라고 명했거늘..."
당겨진 실처럼 팽팽했던 분위기가 기황후의 등장으로 깨지자 검을 내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선 왕기가 기황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김태희?"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을 빠르게 삼키며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혜종이 황태자 시절에 고용보가 집어넣은 기황후를 보고서는 한눈에 반했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겠군.'
마음을 진정시킨 왕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무림인들은 호승심이 강한 족속입니다. 피를 보지 않고서 이기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으음... 다들 소중한 인재들인데 안타깝군요."
"황후마마. 그러시다면 본 대군이 피를 보지 않고 상대방을 이겨보도록 해보겠습니다. 그 대신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지요."
"소원을요? 부원대군이 원하시는 소원이 무엇이옵니까? 들어주기 힘든 소원이라면 곤란해요."
"그런 소원이 아니라는 것을 본 대군이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 대신 절대 상대방의 피를 보아서는 안될 것이며 상대방도 자신의 순수한 의지로 패배를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다시 상대방 쪽으로 몸을 틀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쪽은 매화를 몇 개나 피우실 수 있으시오?"
"본인은 매화를 한꺼번에 여섯 개를 피울 수가 있고. 검에서 매화향이 난다는 검향지경(劍香之境)에 들어섰소."
많이 봐줘야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상대방의 말에 왕기가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허어... 그 나이에 화산파에서 백 년에 한 명이 나기도 힘든 검향지경에 들어섰다라. 검향지경의 원리가 뭔지 알고나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어디 한번 증명해 보시지요. 그럼 내가 졌다고 인정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