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4화 (14/171)
  • #14. < 검향지경(劍香之境)의 비밀 - 2 >

    '...난 분명히 기가 음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는 영양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근데 지금 내 눈앞에는 자신의 몸속에 기를 모으는 게 생존과 관련된 지상명령인 것처럼 기를 잔뜩 축적하고 있는 산삼이 나타났어. 더 중요한 것은 품고 있는 기의 양이 많은 놈의 크기가 커다는 거야. 이건 기가 산삼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면 내가 세운 가설에 두 가지 심각한 오류가 발생해. 하나는 기를 영양소로 삼아 자라는 식물이나 동물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거야. 무협지에서나 보던 인형산삼이나 만년설삼, 천년화리, 만년금구 같은 영물들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거지. 또 하나의 오류는 현대에서는 산삼이 이런 기를 품고 있지 않다는 거야. 그랬다면 진작 학회에 발표가 되었겠지. 희귀원소인 제논을 가득 품고 있는 식물이라니.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고려했을 때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가 있게 된다. 그건 기가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성질이나 특성이 크게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로 인해 영물들이 멸종되고 내공을 익힌 무림인들도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지. 그래야 말이 된다.'

    "저하. 대군 저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척무관의 말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왕기가 척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척무관도 좀 드시겠는가? 좋은 약재가 이렇게 많이 들어왔으니 같이 나눠먹어야지."

    척무관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하. 내공을 증가시켜주는 똑같은 약재를 여러 번 먹으면 약효가 점점 줄어듭니다. 소관은 고려에 있을 때 산삼과 인삼을 여러 뿌리 먹었기에 약발이 잘 듣지가 않으니 내공이 미미하신 저하께서 다 드시지요. 그리고 소관의 경지에서는 내공이 몇 년 더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요."

    "똑같은 약재를 여러 번 먹으면 약발이 줄어든다고?"

    "그렇습니다. 어의가 말하기를 사람의 몸에 내성(耐性)이라는 것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천하의 영약이라는 소림의 대환단도 한번 복용에 30년이 최대치이고 그다음부터는 그 효과가 반의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두 알을 복용한다고 해서 60년의 내공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 잘 봐줘야 40년도 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귀한 영약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영약을 잔뜩 복용해서 몇 십갑자의 내공을 지닌 무림인들이 강호를 지배하고 있겠지요."

    "내성이라. 이왕이면 다양한 종류의 영약을 먹는 게 좋겠군."

    왕기가 산삼 중에 가장 작은 뿌리를 집어 들며 물었다.

    "내가 내공의 양을 측정하는 정확한 기준을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정도의 기가 함유되어 있는 놈이면 몇 년 정도의 내공으로 보이는가? 척무관도 정기신 합일을 했으니 나랑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있을 테지."

    "그 정도면 5년 정도로 보이는군요."

    "이 정도가 5년이라. 그렇다면..."

    왕기가 산삼들을 쭉 훑어본 후에 말을 이었다.

    "다 합쳐서 40년 정도의 내공 증진을 꾀할 수가 있겠군."

    "단순 계산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다 복용을 한다고 쳐도 20년도 증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산삼에 있는 기를 내공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기가 몸밖으로 흘러나가 버리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약효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산삼이 잘 안 받는 체질이라면 10년도 힘들 수가 있고요. 그래서 무림에서 이름난 영단들이 인기가 있는 것이지요. 비전의 제조법에 의해 사람이 흡수하기 좋도록 가공이 되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손실만으로도 내공 증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척무관을 아래위로 빠르게 훑어보며 말했다.

    "척무관이 지닌 내공이 9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군."

    "소관이 가문의 태백심법을 익힌 지 30년 가까이 됩니다. 태백심법이 구대문파의 내공심법과 비교해서 하등의 꿇릴 것이 없지요. 못해도 1년에 최하 2년의 내공이 쌓이니 그것만 해도 60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고려에서 먹은 영약들도 좀 있고 소관의 임독양맥이 뚫린지도 어언 8년 가까이 돼가니까요. 어디 가서 내공으로 크게 밀리지는 않을 정도는 됩니다. 저하. 소관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내공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공에 대한 깨달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와락.

    산삼을 보따리에 다시 싼 왕기가 보따리를 챙겨들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당장 연공실로 가세나. 밤새 이것들을 흡수해야 하겠으니 호위를 부탁해. 기황후 주변은 온갖 위험들이 넘쳐날 것이야. 숙위로 지내면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에 휘말려서 헛되이 죽지 않으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수야."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척무관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저하의 무공이 올라가면 소인도 저하를 지키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식량창고를 개조한 연공실]

    - 위이잉...

    산삼을 복용하고 반야심공을 운기하고 있는 왕기 주변으로 또다시 강력한 흡입력에 의한 막대한 회전력이 발생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상승 기류에 의해 왕기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있었다. 또한 왕기의 몸밖으로 흘러나온 산삼의 기가 다시 왕기의 몸속으로 재차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서기 1345년 10월 4일

    - 번쩍.

    밤새도록 운기행공을 한 왕기가 그 어느 때보다 광채로 빛나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공이 늘어난다는 게 이런 기분이로군. 온몸에 활력이 넘쳐흐르고 아랫배가 묵직한 게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무림인들이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이나 영물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다시 눈을 감은 왕기가 정신을 집중하여 차분히 자신의 몸 상태를 관조(觀照)했다.

    '이 정도면 내공이 30년은 훌쩍 넘었군. 덩달아 주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범위도 증가되었어. 아직 척무관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쁘지 않아.'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왕기가 밖으로 걸어나가자 그런 왕기를 보며 척무관이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활짝 웃었다.

    "저하. 고려인답게 고려 산삼이 아주 잘 받는 체질이신가 봅니다. 대공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런 것보다 반야심공이 그만큼 훌륭한 내공심법인 게지. 약효를 최대한 쥐어짜서 흡수할 수 있도록 해줬으니까 말이야. 조만간 연무장에서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소관도 이제는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하. 고려각으로 돌아가시지요. 오늘은 일정이 아주 바쁠 것입니다."

    [고려각]

    막 동이 튼 고려각 앞에는 큼지막한 수레가 여러 대 서있었고 고려 병사들이 홍성궁으로 옮길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왕기에게 다가온 척무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 소관이 정보를 좀 모아봤는데... 홍성궁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기존에 황자를 호위하던 자들이 기황후의 조치에 반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하나 소관이나 고려인이고 말 그대로 갑자기 굴러온 돌 아니겠습니까?"

    "밥그릇을 건드리면 똥개도 화를 내는 법이지. 게다가 장차 원나라의 황제가 될 황자의 호위라고 하면 밥그릇도 아주 호화스러운 밥그릇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아마도 저하나 소관이 황자를 호위할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만약 대련을 통해 자신들이 이기면 자격 미달로 밀어붙여서 없었던 일로 할 심산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소관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하에게는 감히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십대고수가 뭘 그런 걸 걱정하나? 자고로 무인은 자신의 검으로 말하는 법 아니겠나? 어제라면 몰라도 오늘의 나는 누구와 붙어도 해볼 만하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척무관의 몸이나 신경 쓰시게. 척무관을 잃으면 내가 아주 곤란해져."

    "저하. 소관의 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말도 안 되는 적수와 붙게 소관이 놔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기는 고려가 아니옵고 상대방이 소관처럼 사정을 봐주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응? 척무관이 나와 대련을 하면서 사정을 봐주었다고? 아직도 시퍼렇게 멍이든 내 명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척무관과 대련을 하면서 나름 제대로 배웠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우릴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누군가? 그동안 황자 주위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누구냔 말일세. 평범한 병사들은 아닐 테지."

    "원나라 황실과 연관된 무림방파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지요. 정림방이라고 아시지요?"

    "알다마다. 원대무림기에서 보았다네. 설마 정림방주인 팔비신장(八譬神掌)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하. 화경의 고수가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정림방의 사대당주 중에 한 명인 쾌검청랑(快劒靑狼)과 그의 제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옵니다."

    "그럼 당주란 자와 척무관이 붙겠고 내가 그의 제자와 붙을 가능성이 아주 높겠군. 잘 되었어. 기황후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이쪽이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설마 십대고수가 정림방의 당주 나부랭이에게 지지는 않을 테니까 나만 잘 하면 되겠군."

    - 출발한다!

    어느새 짐이 다 꾸려졌는지 병사들을 지휘하는 자의 힘찬 외침과 함께 수레들이 바퀴 소리를 내며 홍성궁을 향해 출발했다.

    [홍성궁의 앞 뜰]

    마치 사전에 각본을 짜기라도 한 것처럼 원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정림방의 당주와 그의 제자가 왕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성궁의 앞뜰에서 내시 특유의 중성적인 목소리로 고용보가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이번 대결은 기황후께서도 승인을 하셨습니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끄실 황자의 호위를 뽑는 것이오니 그 자격을 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다들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승패는 대련을 하다가 바닥에 먼저 쓰러진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할 것이며 본인이 포기를 선언하셔도 지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단 대련시 암기나 독극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이며 바닥에 쓰러지거나 패배를 인정한 자에게 재차 공격을 하는 것도 금지입니다. 그런 자는 기황후꼐서 엄히 다스리겠다고 하셨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왕기가 대련에 나선 척무관과 쾌검청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오면서 척무관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쾌검청랑이라는 자는 점창파의 사일검법을 익히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칭기즈칸을 뜻하는 청랑이라는 호는 몽골족이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것이 절대 아니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자일 것입니다."

    "척무관은 그런 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건가?"

    "저하. 소인이 배운 송학검법은 공수의 조화가 완벽한 검법입니다. 수비를 할 때에는 소나무처럼 절대 흔들리지 않고, 공격을 할 때에는 물고기를 잡는 학처럼 날카로운 검법이지요. 고려 무인의 명예를 걸고 사일검법 따위에는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지켜보셔도 될 겁니다."

    살상의 위험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목검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어디 한번 현 강호의 십대고수라고 불리는 척무관의 솜씨를 지켜볼까나?'

    - 지이잉...

    고용보가 들고 있는 징이 울리자 척무관과 쾌검청랑 두 사람이 빠르게 발을 놀리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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