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3화 (13/171)
  • #13. < 검향지경(劍香之境)의 비밀 - 1 >

    "매화검법의 비급은 정말 특이하오. 비급의 절반가량이 매화나무와 관련된 이야기이니까 말이외다. 이게 정말로 검법을 기술한 비급인지 아니면 나무를 키우는 원예사(園藝師)가 자신의 경험담을 쓴 일기인지 헛갈릴 정도이지. 척무관은 그 비급을 본 적이 있는가?"

    왕기의 물음에 척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보았습니다. 저하. 구대문파 중에서 소림과 무당 다음으로 꼽으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아마도 화산파를 꼽을 것이옵니다. 그런 대단한 문파의 성명절기인 검법인데 검을 익힌 소관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매화검법 비급의 처음이 어찌 시작되는지 기억하고 있나?"

    "화개각이(花開各異) 고온장일(高溫長日) 저온단일(低溫短日) 매화후자(梅花後者)라고 되어 있지요."

    "그게 무슨 뜻이지?"

    "어렴풋이 짐작은 되나 정확히는 소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구결의 뜻은 아주 간단해. 꽃이 피는 시기는 각각 다르니 어떤 꽃은 기온이 높고 해가 길 때 피고, 어떤 꽃은 기온이 낮고 해가 짧을 때 피니 매화는 그중에 후자에 속한다는 것이지. 고온장일 즉 봄여름에 피는 꽃이 있고 저온단일 즉 추운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데 매화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뜻이야. 누가 보더라도 원예사가 쓴 것처럼 보이지 않나? 실제로 이건 이십사수 매화검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이기도 해."

    "그런 쓸데없는 내용을 왜 비급에 적어놓은 것일까요?"

    "매화검법을 창안한 도사가 본인이 매화나무를 키우다가 꽃을 피우는데 실패하는 과정에서 매화검법의 오의(奧義)를 발견했기 때문에 적어놓은 것이라네. 척무관은 매화검법의 오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검기의 세밀하면서도 섬세한 활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쪽으로는 화산을 따라갈 곳이 없지요. 검기로 매화를 피울 정도이니까요."

    "정확해. 다섯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매화를 검기로 표현할 정도로 검기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꽃잎이 다섯 장이란 것은 검기가 다섯 가닥이라는 뜻이고 그런 다섯 가닥의 검기가 하나로 뭉쳐서 공격을 가하니 그 위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지사이지."

    "검기로 다섯 장의 꽃잎을 만드는 게 매화검법의 오의라는 뜻입니까?"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뜻은 아니야. 일전에 척무관이 말한 것처럼 한번 발사한 검기는 통제가 불가능해. 검을 떠난 검기를 휘게 하거나 방향을 꺾을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지. 거기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어. 한번 외부로 방출한 검기는 시간이 지나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것이야. 검기를 구성하는 기가 대기로 산산이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지. 다섯 장의 꽃잎을 만들려면 다섯 번의 검기를 발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 검기가 하나로 뭉쳐서 매화의 형상을 이룰 동안 사라지지 않아야만 해. 그래야만 매화를 피워 상대방을 공격할 테니까. 그 말인즉슨 검기가 방출되자마자 바로 사라지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계속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매화검법의 진정한 오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매화검법은 순차적으로 발사한 다섯 개의 검기가 꽃잎이 되고, 이들 꽃잎이 뭉쳐져서 매화를 꽃피울 동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시켜주는 것이 진정한 오의라는 뜻이로군요."

    "바로 그것이야. 검기를 형성하는 기의 결집력과 대기 중에서의 유지시간이 다른 검법에 비해 탁월한 것이 바로 매화검법의 특성이자 오의인 것이지."

    "소관이 화산파의 무인을 여럿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식의 해석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당연하지. 화산파에서도 그렇게 되는 원리를 아직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아니 매화검법을 창시한 도사조차도 정확한 원리는 몰랐을 것이야. 단지 매화나무를 키우다가 특정한 현상을 발견하고서는 그 현상을 검법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할 테니까. 매화겁법이 불가해무공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창시자가 적어놓은 구결에 따라서 오랫동안 수련을 하다가 보면 매화를 피우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런 것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는 원리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을 걸세."

    "그럼 저하께서는 그 원리를 이미 파악하셨기에 단시간에 매화검법을 익힐 수 있으셨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나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원리이니까."

    "저하. 그 원리가 무엇인지 소관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배움을 청하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순간적으로 고민에 잠겼다.

    '척무관은 이 시대의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전하(電荷)가 뭔지 정전기(靜電氣)가 뭔지 말해줘 봐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해. 정전기라는 말조차 근대에 들어와서 처음 생긴 말이니까. 고려에는 그런 현상을 일컫는 옛말조차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좋을까?'

    그때였다. 부르기 전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연무장 쪽으로 고려 병사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척무관에게 빠르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더니 물러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저하. 방금 전 고려각 쪽으로 자정원사(資政院使)가 찾아왔다고 하옵니다."

    "자정원사가 날 찾아왔다고?"

    강릉부원대군의 기억을 더듬은 왕기가 말을 이었다.

    "자정원이라고 하면 황후의 부속기관인 휘정원을 기황후가 새롭게 이름을 바꾸어 설립한 곳이 아닌가?"

    "맞사옵니다. 본디 휘정원은 원나라 황후의 재부(財賦)를 맡아서 관리하는 기관이온데 얼마 전 기황후가 그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는 기황후의 심복인 고려 출신 내시인 고용보(高龍普)란 자가 초대 자정원사를 맡고 있지요. 저하. 어서 빨리 고려각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잠시 후 고려각 앞에 도착하니 창검을 든 원나라 병사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보따리 하나를 소중하게 품에 앉고 있는 내시가 있었고, 왕기의 눈이 그 보따리에서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보따리 안에서 상당한 양의 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려각]

    방으로 이동하여 왕기와 척무관 그리고 고용보만이 남자 고용보가 정중히 절을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강릉부원대군 저하를 뵙사옵니다. 소인의 이름은 고용보라고 하오며 본관은 전주이옵니다."

    "이거 삼중대광(三重大匡) 고용보께서 예가 너무 과하시오, 선왕이신 충혜왕께서 직접 그대를 완산군(完山君)에 봉하였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소이다. 나 역시 부원대군에 불과하오니 편하게 대하셔도 될 것이오."

    "저하. 소인의 몸은 원나라 황실에 있지만 마음만은 고향인 고려에 있사옵니다. 어찌 감히 저하와 같은 급이 되겠사옵니까?"

    왕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자가 사신의 자격으로 고려로 가서 선왕이신 충혜왕을 늦게 마중 나왔다고 부하를 시켜 구타를 하였소이까? 게다가 왕의 신하들을 잡아가두기까지 하지 않았소?"

    "저하. 그 당시 충혜왕께서는 이미 총명함을 상실하시고 주색에 빠져 방탕한 행동을 하시고 계셨기에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충혜왕이 겁탈한 경화공주 그러니까 충숙왕의 비인 백안홀도(伯顔忽都)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라는 지극히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황실의 분노를 제대로 샀기 때문이지요. 만약 소인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충혜왕께서는 원으로 가시는 도중에 사망하셨을 겁니다. 그나마 무사히 원에 당도하시어 잘 지내고 계시다가 다시 고려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실 수 있었던 것은 소인의 역할이 컸사옵니다."

    "그러니까.. 고려의 왕인 충혜왕을 두들겨 팬 것은 충혜왕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저하. 소인이 아니 그랬더라면 원나라 황실이 직접 군사를 보내어 손을 썼을 것이옵니다. 자나 깨나 고려의 앞날을 생각하는 소인의 충심을 믿어주시옵소서."

    "이것 참... 내가 직접 보지를 않았으니 뭐라 말을 못 하겠군. 알겠소. 그대의 마음이 정 그렇다면 내가 편하게 대하리다. 근데... 여기까지 어인 일이오? 들고 온 그 보따리는 또 무엇이고?"

    "자하께서는 조만간 황실로 들어가서 숙위(宿衛)의 업무를 보셔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하겠지. 어느덧 10월이 되었으니 말이야."

    "기황후께서는 7년 전 원나라 황제이신 혜종의 아들인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을 출산하시고 2황후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황제의 총애를 받으시며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왕기가 고용보의 말을 잘랐다.

    "미래의 황제인 기황후가 출산한 혜종의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대군께서는 그 누구보다 황실의 법도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황자께서 돌아가신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기황후께서는 애유식리달렵 황자 전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황후께서는 부원대군께서 그 황자의 안전을 지켜주실 것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황실의 숙위로 지내시면서 말입니다."

    고용보의 말에 왕기가 척무관을 힐끔 바라본 후 대꾸했다.

    "기황후가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닐 것이야. 당대의 십대고수인 척무관이 황자를 지켜주길 원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척무관은 나의 호위이자 고려 무관이다 보니 그럴 명분이 없어서 날 끌고 들어가는 것이겠지."

    "소문대로 역시 영민하시옵니다. 저하. 하지만 이는 고려를 위해서도 절대 나쁜 일이 아니 옵니다. 고려 여인이 낳은 황자가 원나라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고려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뭐 그러도록 하지. 어차피 내게는 그 명령을 거부할 힘도 없으니까 말이야. 언제부터 숙위로 들어가면 되는 것인가?"

    "내일부터이옵니다. 내일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으로 침소를 옮기시고 숙위의 임무를 보시면 돼옵니다. 내일 흥성궁으로 가시면 기황후께서 직접 황자를 소개해드릴 것이옵니다. 그리고..."

    고용보가 보따리를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기황후께서 대군 저하께 드리는 선물이옵니다. 대군 저하께서 얼마 전부터 무공을 익히고 계신다는 소문을 접하시고 몸에 좋은 보약들을 준비해서 드리라고 말씀하셔서 소인이 직접 챙겨온 것들입니다."

    안 그래도 내공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던 왕기가 보따리를 받으며 물었다.

    "몸에 좋은 보약들이라. 정확히 뭔가?"

    "질 좋은 고려 산삼이옵니다. 소인이 백 년 이상짜리로 골라왔사옵니다."

    "감사히 받겠다고 기황후에게 전해드리게나. 그리고 내일 흥성궁으로 거처를 옮기겠다는 말도 전해드리고. 물론 척무관도 같이 옮겨 갈 것이니 염려 말게나."

    "일겠사옵니다. 저하. 소인이 돌아가서 그렇게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고용보가 물러가자 왕기가 빠른 손길로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아기 팔뚝만 한 산삼 네 뿌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척무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 6년 내로 일갑자의 내공을 쌓기 위해 적합한 약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왕기는 그런 척무관의 말을 못 들었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가 세운 무공 이론에 오류가 발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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