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1화 (11/171)
  • #11. < [무공 수련] ch.5 용기(用氣)를 깨닫다 - 1 >

    - 스르륵.

    강력한 상승기류에 휘말려 공중에 둥실 떠있던 왕기의 몸이 조금씩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 번쩍.

    운기행공을 끝마치고 눈을 뜬 왕기가 아직도 회전력이 남아있는지 자신의 둘러싼 채로 여전히 세차게 돌고 있는 회오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내가 바라던 추상반야(推上般若) 현상이 일어났구나. 운기행공을 하면서 몸으로 직접 느꼈었지만 실제 눈으로 보니 감흥이 또 다르군. 드디어 불가해무공 중에 하나를 정복했어.'

    "으응?"

    솜털이 내려앉듯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왕기가 갑자기 의문스럽다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운기행공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속의 기가 반야심공의 경로를 따라 계속 흘러가며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속도는 운기행공을 할 때보다는 훨씬 느렸지만 말이다.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의 왕기가 속으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돌리고 돌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계속 돌게 된다, 회회연회(回回然回)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이해하겠구나. 이 구절은 단순히 전향력을 이용한 관통력의 상승만을 꾀하는 것이 아니었어. 이건 움직이고 있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는 관성(慣性)과 관련된 것이다. 기경팔맥을 뚫고 추상반야까지 완성할 정도로 몸속의 통로가 완벽하게 닦이게 되면 그 길을 따라 기가 끝없이 돌게 된다는 뜻이었어. 내가 따로 의식을 하지 않아도 말이지. 물론 그렇게 만들 수있는 근원적인 힘은 전향력과 신체와 외부의 기의 밀도에 따른 확산력을 절묘하게 조합한 것일 테지. 이것 참 놀라운 이론이로군. 혜능이 살아있다면 만나서 한번 토론을 해보고 싶을 정도야.'

    자리에서 일어난 왕기는 자신이 숨을 쉴 때마다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든 의복이 마치 숨을 쉬듯 신체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몸속을 돌고 있는 기가 왕기의 호흡에 맞춰 외부의 대기를 전신의 모공 쪽으로 빨아댕겼다 놓았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야심공이 축기에 탁월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와류 현상을 이용해 대량으로 대기를 빨아들여 기를 보다 많이 축적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운기행공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야. 물론 각을 잡고 운기행공을 할 때만큼의 효율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공이 쌓이는 정도가 엄청난 차이를 보일 테지. 만약 내가 임독양맥을 타통하게 되면 그 효과는 몇 배로 불어날 것이야. 사뭇 기대가 되는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공실을 나서려던 왕기가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추상반야를 겪으면서 온몸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피부 아래의 세맥들과 말초신경들이 일제히 활성화되었는지 호흡을 할 때마다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공기로부터 막대한 정보들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매일 보던 세상이 새롭게 보일 정도의 정보량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왕기가 빠르게 머리를 정리했다.

    '이건 정기신 합일과는 또 다른 감각이다. 마치... 내가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뱀이라도 된듯한 기분이야. 뱀이 쉼 없이 혀를 날름거리는 이유는 대기 중에 떠도는 각종 분자들을 혀에 묻혀서 아콥슨 기관에 보내어 주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주변의 습도, 풍향, 냄새, 온도, 공기의 진동 등의 정보를 종합해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이지. 지금 내가 딱 그래. 온몸으로 들어오는 대기를 통해 주변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해져 있어. 석실 밖에 있는 척무관의 호흡이 어떤지, 체온은 어느 정도인지, 땀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손에 잡힐 듯 다 느껴진다. 이런 놀라운 감각이라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걸.'

    이윽고 왕기가 석실 밖으로 나가자 척무관이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저하. 대공을 이루신 것을 경하 드리옵니다. 사람이 운기행공을 하는데 사방의 공기들이 마치 용권풍(龍券風)에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다니요. 소관은 지난밤 같은 현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고맙네. 척무관. 대성한 반야심공의 효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더군. 이제는 서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갑자의 내공을 쌓을 자신이 생겼어. 그렇다고 6년 내에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며칠간은 대련을 중지하고 싶네. 새로운 경지에 적응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알겠사옵니다. 저하. 아침을 드시고 연무장으로 나오시면 소관이 대련은 생략하고 용기(用氣)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저하께서도 이제는 축기 한 기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아셔야 할 테니까요."

    "그러도록 하지."

    서기 1345년 10월 2일

    연무장에 나온 왕기가 척무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저하. 한족의 무공과 고려의 무공은 감기나 축기 단계에서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용기에서는 그 내용이 조금은 갈리게 되지요."

    "어떻게 말인가?"

    "예로부터 한족은 허풍과 과장이 심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에 내공을 집어넣은 후 그것을 최대한 밖으로 뿜어내기를 즐겨 하지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검기(劍氣)라는 것입니다. 번쩍번쩍 빛을 내는 검기는 한족의 과시욕을 만족시키기에 딱 알맞으니까요. 이러한 형태의 용기법을 고려에서는 외집범(外集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그러한 자랑질은 무인으로서 수치스러운 행위이고 예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검의 내부에 최대한 많은 내공을 채우는 쪽으로 발전을 했지요. 이를 내충법(內充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검기는 상당히 뛰어난 공격 수법일 텐데? 바위를 두부처럼 자를 정도로 절삭력도 훌륭하고, 공격거리도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길어지니까 말이야."

    "저하. 검기를 좀 뿜어낸다고 해서 바위를 두부처럼 자를 수는 없습니다. 검강(劍罡) 정도라면 몰라도요. 물론 절삭력이 어느 정도 올라가긴 합니다. 사람의 팔다리나 질긴 가죽 갑옷 정도는 손쉽게 베어버리니까요. 하지만 옛말에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고 했습니다. 검기에도 당연히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같이 존재하지요. 두 가지 단점 때문에 고려무사가 한족의 무사와 붙을 때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내충법으로 기를 가득 채운 고려의 검은 검기와 부딪쳐도 잘리지 않기 때문에 검기가 지니는 뛰어난 절삭력이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둘째, 한번 밖으로 뿜어내어 발사한 검기는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자유자재로 휘거나 방향을 꺾을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쉽게 말씀드려... 상대방이 검기를 사용한다면 공격거리가 긴 창을 들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뿐이라는 것입니다. 공격거리가 긴 것을 원한다면 차라리 활을 쏘는 게 더 낫다는 게 고려 무사들의 시각이지요. 저하. 고려의 활은 무섭습니다. 특히 내충법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익힌 무사는 화살촉에 기를 채워 넣어서 발사할 수 있기 때문에 관통력이 무시무시하지요. 각궁에 통아(筒兒)를 이용해서 편전(片箭 : 일반적인 화살인 장전(長箭)에 비해 길이가 매우 짧은 화살, 애기살 또는 동전(童箭), 변전(邊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을 쏠 경우 어디서 뭐가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갑옷째로 꿰뚫려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고려가 대국인 원나라와 무려 30년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물었다.

    "만약 상대방이 검기가 아니라 검강을 사용한다면 어떤가?"

    "저하. 화경의 고수가 무서운 것은 그자가 검강을 사용할 줄 알아서가 아니 옵니다. 그런 경지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지요. 지난 100여 년간 수십만 명의 무림인들이 도전했지만 거기까지 올라간 자는 딱 5명뿐입니다. 일비와 사왕이지요. 무림 격언에 수련을 하루 쉬면 본인이 알고, 이틀을 쉬면 동문들이 눈치채고, 사흘을 쉬면 온 세상이 다 안다고 했습니다. 화경에 도달한 고수들은 100년 가까이 단 하루도 수련을 쉬지 않은 자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도달하는 경지이지요. 그런 자가 안 무서울 리가 있겠습니까? 설사 손에 아무런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고 해도 무서울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화경에 도달하면 상대방이 검강을 구사한다고 해서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무얼 들고 있고 무얼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어디까지 가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외집법이 적합할 것 같아. 난 장차 왕이 될 사람이니까 말이야. 때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허장성세(虛張聲勢)도 필요한 법이지. 내가 강인한 왕이라는 걸 보여줘야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날 믿고 따를 것 아닌가?"

    척무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으신 생각입니다. 그러시다면 저하. 지금부터는 무기에 기를 불어넣는 방법부터 연습하셔야 합니다. 감기(感氣)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지만 자신의 신체가 아닌 신외지물(身外之物)에 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요. 단단한 나무나 쇠에 무작정 기를 밀어 넣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지금 저하께서 들고 계신 목검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들고 있는 검이 무생물이 아니라 팔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시고 자연스럽게 기를 집어넣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장심(掌心)에서 뽑아낸 기를 최대한 부드럽게 집어넣는 연습을 해보시지요. 소관이 열흘 정도 걸렸으니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이신 저하께서는 그보다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실 것입니다. 목검에 기를 불어넣는 것에 성공하시면 쇠로 된 진검은 식은 죽 먹기 일 겁니다. 철검이 목검보다 기를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이니까요."

    [고려각]

    그날 밤 검기를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준다는 화산파의 매화검법(梅花劍法) 비급을 탐독하고 있던 왕기가 비급을 내려놓고 바닥에 놓여 있는 두 개의 길쭉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단단한 나무 막대와 쇠막대를 집어든 왕기가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기는 펼치면 하해와 같고 뭉치면 좁쌀과 같다는 말이 있지. 자유롭게 형상을 변형하는 기의 특징을 잘 설명한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 테지. 기는 대기 중에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제논이라는 원소의 집합체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원자나 전자 원자핵 같은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왕기가 손가락으로 쇠막대를 튕겼다.

    - 따아앙...

    '그래서 이 쇠가 더없이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서 이 안으로 기를 집어넣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커다란 모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목검에 기를 집어넣는 게 더 쉽고. 쇠로 된 철검이 기를 집어넣기가 더 어려워야 할 테니까. 쇠가 나무보다 더 단단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라고. 그래서 그냥 단순히 쇠가 기를 더 잘 받아들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에 불과해. 이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론이다. 하지만 난 다르지. 현대 과학을 배웠고 약간의 의학과 금속공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니까.'

    "후우우..."

    긴장이 되는지 한숨을 길게 내쉰 왕기가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반야심공에서 보았듯이 개념을 올바로 정립하는 게 가장 중요해. 그럼 내가 아는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해서 쇠나 나무에 기를 집어넣는다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해보자. 이과를 나온 공돌이답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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