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0화 (10/171)
  • #10. < [무공 수련] ch.4 축기(蓄氣)에 돌입하다 - 2 >

    밤새도록 반야심공을 운공하며 축기에 몰입하던 왕기가 마침내 깨어나려는지 왕기의 몸 주변에서 회오리치던 와류들이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 슬쩍.

    실눈을 뜬 왕기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전날처럼 와류 현상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어서 실망한 표정으로 일어나려다가 상의에 소용돌이 문양이 남아있는 걸 발견하고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해석한 게 틀릴 리가 없어. 하나, 둘, 셋...'

    하나씩 숫자를 세며 옷의 구김이 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동경 쪽으로 다가간 왕기가 등 쪽에 나있는 문양까지 포함하여 개수를 세웠다.

    '다 합쳐서 18개라. 108개의 1/6만큼 밖에 되지 않았군. 아니지. 하체 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테니까 숫자가 더 될지도 몰라.'

    - 팅.

    짜증 난다는 표정의 왕기가 손으로 가죽 재질의 하체에 쫙 달라붙어 있는 호복을 튕기며 속으로 뇌까렸다.

    '이 바지 때문에 정확한 숫자가 파악이 안되는군. 뭐 18개면 어때? 첫 숟갈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가 한 해석이 정확하다는 게 증명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야. 방향이 올바르니 나머지는 척무관이 말한 것처럼 시간이 해결해 줄 테지. 꾸준히 연공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야심공의 최고 경지인 추상반야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왕기가 가재도구가 가득한 방을 휘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방에서는 도저히 운기행공을 할 수가 없게 되겠지."

    이윽고 아침을 먹기 위해 방을 나가던 왕기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 툭. 툭.

    '낙마한 충격으로 엉클어져 있던 이전의 기억들과 현대의 기억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떠오르는군. 마치 각각 다른 하드 드라이버에 저장된 것처럼 말이야. 정기신 합일로 뇌가 깨어난 영향인 것인가? 이제는 이 시대를 잘 몰라 실수할 일이 없겠어. 근데... 분명히 이 시대로 넘어왔을 때 머릿속으로 들려왔던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마치 누군가가 일부로 막아놓은 것처럼...'

    영문도 모른 채 과거의 시대로 끌려왔지만 마침내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상쾌한 표정을 지은 왕기가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서기 1345년 9월 1일

    연무장으로 나가 척무관이 추천해 준 무당의 태극검을 연습하고 있는 왕기의 표정이 아침과는 달리 침울해져 있었다.

    '두 사람의 기억을 정확히 맞춰본 결과 예상과는 달리 내게는 별로 시간이 없다. 지금 난 엄밀히 말하면 강릉대군이 아니야. 작년에 조카인 왕흔이 고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난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진 몸이다. 이를 내가 아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입해 보면... 내가 고려로 돌아가 왕이 되기까지 6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강릉부원대군으로 된 지 7년 후에 공민왕이 되니까. 고려로 돌아가면 이렇게 한가로이 무공 따위를 익힐 시간이 없을 것이야. 남은 6년 만에 반대세력 따위를 가볍게 제거할 수 있는 경지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소리이지. 그건 척무관을 뛰어넘어야 가능한 경지이다. 결국 최소한 화경에 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이 시대 최고의 고수들이라는 화경의 고수들은 다들 백 살이 가까운 노인네들이라고. 그들이 백여 년 동안 노력하여 이룩해 놓은 경지를 난 6년 만에 달성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단 하루도 헛되게 보낼 수가 없어.'

    왕기가 정신을 집중하였는지 태극검의 경로에 따라 휘두르는 검이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저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이렇게 나오셔서 검을 수련하고 계시는 저하의 모습을 보니 소관이 참으로 기쁘옵니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말했다.

    "척무관. 내가 척무관에게 부탁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네."

    "무엇인지요? 말씀만 하시지요. 저하."

    왕기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첫 번째는 이 바지라네. 이런 가죽 바지가 아니라 얇은 천으로 만든 바지가 필요해. 천이 하늘하늘 해서 바람이 잘 통하면 더욱 좋고."

    "저하. 그런 천으로 만든 것들은 궁의 나인들이 입는 치마 종류밖에 없습니다."

    "뭐 치마라도 별 상관없네. 내가 그걸 입고서 밖으로 나돌아 다닐 것은 아니니까."

    그 순간 척무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하. 설마... 취향이 그런 쪽이셨습니까? 남들이 안 볼 때 여장하기를 즐겨 하시거나, 잘생긴 남자를 보면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그러십니까?"

    척무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왕기가 양손을 빠르게 휘두르며 강하게 부정했다.

    "오해하지 말게. 난 여자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라고. 안 그래도 혹시 내가 쌍화점(雙花店)의 주진모 같은 취향일까 봐 걱정이 되어 죽겠구먼."

    왕기의 해명을 들은 척무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하. 갑자기 배가 고프신 것입니까? 아침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강릉부원대군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뇌 한편에서 쌍화점이 중국의 만두를 음차(音借) 한 고려어라는 걸 끄집어 낸 왕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세. 아무튼... 내가 그런 바지를 원하는 건 반야심공의 특성상 그런 것뿐이니까 오해하지 말게. 난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 절대 아니라네."

    "다행이옵니다. 저하. 무공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제가 나인들에게 말해 저하께서 입으실만한 바지를 몇 벌 제작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하늘하늘하면서 얇은 천으로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또 무엇입니까?"

    "나만의 연공실이 필요하다네. 공기가 잘 통하고 튼튼한 돌로 지으진 곳이 있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지붕까지 없으면 더 좋을 것 같고."

    왕기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척무관이 대답했다.

    "저하. 그런 건물이라면 식량창고가 적당합니다. 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돌로 지어놨으니까요. 당장 급하신 게 아니시라면 제가 창고의 지붕을 헐어서 저하가 원하시는 연공실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좋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해주시게. 그리고... 고려에 척무관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관이 있는가?"

    "제가 고려를 떠나올 때 조정에서는 소관의 무공이 최고이었지요. 하지만 심산에 은거해있는 저 못지않은 고수들은 제법 있을 것이옵니다."

    '역시... 고려에도 척무관처럼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많이 존재해. 그런 자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려면 못해도 임독양맥 정도는 뚫고 화경의 경지까지는 올라가야만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위험해져. 6년이라. 길다면 길지만 짧다고 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

    속으로 각오를 다진 왕기가 물었다.

    "임독양맥을 뚫는 데 최하 일갑자의 공력이 필요하다고 했지? 거기에 영약의 도움도 있어야 하고."

    "그렇습니다. 저하. 하지만 서두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소관이 보기에는 저하께서는 서른이 채 되기 전에 일갑자의 내공을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서른이라.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평범한 일반인이 평범한 운기조식법으로 아침과 저녁 두 번을 운기한다고 가정했을 때 쌓이는 내공을 1년으로 칩니다. 하지만 구대문파와 같이 뛰어난 문파의 운기행공법은 그 효율이 최하 두 배는 되지요. 지금 저하께서는 소림에서도 풀지 못한 반야심공을 익히셨고, 재능 또한 비범하니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으실 테니까요."

    "만약 일갑자의 내공을 6년 만에 쌓으려면?"

    "뛰어난 영약이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저하.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척무관. 내가 일전에 낙마를 하면서 그때 머리를 다치지 않았는가?"

    "그러셨지요.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소관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내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 미래를 좀 내다 본 것 같아."

    "신기(神氣)라도 드신 것처럼 말입니까?"

    "맞네. 원나라는 이제 국력이 쇠퇴해서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 조만간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설 것이야."

    "저하. 원나라의 국력이 과거보다 많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군사력은 아직도 막강하옵니다. 천하에서 원나라를 공격하여 무너뜨릴 수 있는 세력은 없사옵니다."

    "외부에서의 공격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은 원나라도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야. 창천이사(蒼天已死)?"

    "황천당립(黃天當立).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일어서리라. 그건 후한 때 봉기했던 황건적의 구호 아닙니까? 저하. 그러면 황건적이 다시 발호한다는 것입니까?"

    "아니지. 이번에 일어날 민란은 원나라 개국 이후 계속 핍박받던 한족들이 한족의 옛 왕조인 송을 부흥한다는 깃발 아래 모일 것이야. 송 왕조가 화덕(火德)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뜻을 계승하는 의미로 불을 상징하는 붉은색 머리띠를 두를 것이 틀림없어. 내가 꿈에서 본 바로는 그랬다네."

    "붉은색 머리띠라. 그럼 황건적이 아니라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리게 되겠군요. 저하. 소관은 저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저하처럼 영민하신 분이 허튼소리를 하실 리가 만무하니까요. 하지만 저하. 꿈속에서 보셨다는 미래는 저하나 소관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황건적이든 홍건적이든 고려와 상관없는 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네. 근데 꿈속에서 그들이 원나라 군사에 의해 계속 고려 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았지. 결국 몇십만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하게 되었다네. 장차 내가 다스려야 할 고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다는 말일세. 내가 본 미래에 따르면 그럴 날이 얼마 안 남았어."

    "그게 6년 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6년 이내로 임독양맥을 뚫기를 원하시는 것이고요?"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다시 검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척무관이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조만간 소림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일단은 나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 하겠지만 말이야."

    빠르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고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간 경이로운 속도로 무당의 검법들을 익혀나간 왕기는 태극검과 삼재, 사상, 오행, 육합, 팔괘, 구궁 검법을 익히는데 성공했고, 무당의 장로급들이 익힌다는 양의 검법과 장문인이 익힌다는 태극혜검 그리고 불가해무공인 칠성검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서기 1345년 10월 1일

    [식량창고를 개조한 연공실]

    밤이 이슥해지자 연공실을 찾은 왕기가 지붕 없이 뻥 뚫린 곳으로 보이는 새까만 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어제부로 소용돌이 문양이 마침내 105개를 돌파했어. 지난 한 달간 하루에 3개꼴로 늘어났으니 목표인 108개가 오늘쯤이면 이루어질 것이야. 그럼 반야심공의 마지막 구절인 추상반야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얇은 천으로 제작된 하늘하늘한 바지자락을 펼치며 바닥에 주저앉은 왕기가 바깥을 바라다보며 소리쳤다.

    "척무관, 안에서 어떠한 이상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들어오지 말도록 하게. 외인의 출입도 엄금하고."

    "네. 저하. 소관이 밤새 지키고 있을 테니 염려 마시고 운공에 들어가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반가좌를 하고 반야심공의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지난 한 달 사이 많이 익숙해졌는지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진 왕기의 주위로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이리저리 꼬아놓은 꼬마전구들이 하나씩 불이 켜지듯 빠르게 소용돌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팍. 팍. 팍...

    삽시간에 100개가 넘어가는 소용돌이들이 왕기를 호위하듯 빙 둘러싸고 있을 때 새로운 소용돌이가 하나씩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용돌이 개수가 108개에 도달하자 각각의 소용돌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며 합쳐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108개의 소용돌이가 합쳐진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사방의 공기를 사정없이 빨아들이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 위이잉...

    마치 거대한 토네이도 한가운데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왕기의 몸이 마침내 조금씩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반야심공의 최고 단계인 추상반야(推上般若)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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