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화 (8/171)

#8. < [무공 수련] ch.3 정기신(精氣神)의 합일(合一) >

반야심공 특유의 반가좌를 틀고 앉은 왕기가 자세를 점검하며 확신에 찬 어투로 중얼거렸다.

"이 시대에서 말하고 있는 정기신 합일이란 건 호르몬을 몰라서 생겨난 엉터리 개념에 불과하다는 게 내 가설이다. 상, 중, 하로 구별해서 말하는 정기신이란 건 무인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호르몬이 분비되는 위치를 어림짐작해서 잡아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척무관이 말한 정기신 합일의 특성에서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지."

자신에 세울 가설을 검토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 눈을 꼭 감은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대 의학과 과학에서 정의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이 먹은 음식을 소화해서 만든 포도당을 에너지로 하여 미세한 전기적 신호에 의해 작동하는 정밀한 생체로봇이야. 내가 정의한 제논의 집합체 또는 화합물인 기(氣)라는 것은 아주 다용도로 활용이 된다. 빛도 내고, 우주선의 추진체로도 사용이 되며, 진통제 역할도 하고, 레이저 기능까지 가지고 있지. 하지만 기는 자체적으로 영양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음식이 될 수가 없어. 만약 그랬다면 자연계에서 기를 영양소로 삼아서 성장하는 생물이 벌써 출현했을 테지. 척무관이 정기신 합일을 이루면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고서도 싸울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기가 음식이라서가 아니야. 공복감을 느끼는 호르몬을 억제하고 평상시에 축적해놓은 지방분해를 촉진하는 호르몬을 발생시켜서 가능한 것일거야. 게다가 정기신 합일을 하면 정력이 올라간다는데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되지. 기가 정자(精子)로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아마도 성선자극호르몬과 정자생성호르몬 그리고 남성호르몬이 상승해서 그런 것일 거야.'

"후우우..."

자신이 세운 독자적인 이론으로 정기신 합일에 도전하려는 것에 긴장이 되는지 왕기가 긴 한숨을 쉬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은 본디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어. 생태계에서 인간은 오랜 시간 약자였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것이지. 그래서 인간은 본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브레이커들을 곳곳에 걸어놓았다.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뇌뿐만이 아니라 각종 장기들과 근육들, 신경계 등에 말이야. 그 브레이커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호르몬이다. 단적인 예로 인간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완벽하게 다 인식하지 못한다. 눈의 성능이 못 따라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야. 그 모든 정보들을 처리하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뇌에서 브레이커를 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기신 합일을 하면 그런 브레이커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정기신 합일을 하게 되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내가 세운 가설이다..'

"흐흡.. 하아.. 흐흡.. 하아.."

반가좌를 틀고 있는 왕기의 호흡이 조금씩 깊어져 가고 있었다.

'상단전이라 부르는 신(神)은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는 간뇌 쪽의 뇌하수체와 세포 호흡을 촉진하는 티록신이 분비되는 목 쪽에 위치한 갑상샘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중단전과 하단전을 지휘하는 중추이기도 하지. 중단전인 기(氣)는 뱃속에 있는 콩팥의 윗부분인 부신과 췌장을 말하는 것일 테지. 칼밥을 먹는 무인들이 중단전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부신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마지막인 정(精)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는 정소(精巢)를 말하는 것이고.'

왕기가 조금씩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고 있었다.

'놀라운 건 호르몬이 뭔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정기신 합일이라는 개념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이야. 정기신 합일을 통해 내공을 익힌 자들은 호르몬 분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손쉽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고수가 될수록 지치지 않고 오래 싸울 수 있고, 생사가 오가는 전투 중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척무관이 말한 것처럼 온몸으로 칼날이 날아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지. 호르몬은 육체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하니까. 난 지금의 무인들처럼 정기신을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림잡아서 구별하지 않아도 된다. 의대를 다닐 때 배워서 호르몬이 분비되는 위치를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하는 정기신 합일의 효과가 더 좋을지도 몰라.'

무아지경에 빠진 왕기가 정기신 합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새워서 말이다. 그런 왕기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아침 동이 서서히 트올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왕기의 신체 부위 중 특정한 부위들만이 반응을 했었다.

목뒤에 위치한 대뇌와 척수를 연결해 주는 연수(延髓) 부위가 굵은 쇠막대라도 박아 넣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솟아올랐고, 성대 아래에 위치한 연골 양쪽이 메추리알만한 굵기로 튀어나왔으며, 콩팥과 췌장이 위치해 있는 등 쪽 부위들이 계란만 한 굵기로 나란히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하초를 가리고 있는 바지 앞섬이 눈에 띄게 불룩해졌다.

그러길 잠시, 왕기의 온몸 곳곳이 정신없이 위로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 뽈록. 뽈록. 뽈록..

전신(全身)에 부황을 뜬 것처럼 무수히 튀어나온 부위들이 왕기의 몸에 마치 전기 회로망을 깔듯 서서히 연결이 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하초까지의 연결 회로가 완성되자마자, 왕기의 몸이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순간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고, 왕기가 눈을 떴다.

- 번쩍.

밤을 꼬박 새운 왕기의 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밝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기분이 상쾌하군. 예상보다 정기신 합일이 쉽게 끝났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난 호르몬이 어디서 분비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 벌떡.

반가좌를 풀고 자리에 일어난 왕기가 가볍게 팔다리를 놀리다가 눈을 부릅떴다.

'놀랍군. 심장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박동하는 지를 알 수가 있어. 온몸을 흐르고 있는 혈류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호흡을 통해 들어온 공기와 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가 있어, 게다가 정신을 집중하면 주변 공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방안에 있는 벌레들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눈으로 지켜보듯 선명하게 알 수가 있다. 이건 신체의 감각을 통제하고 뇌의 인식 정도를 조절하는 브레이커가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야. 이제야 이해하겠군. 정기신 합일에 성공하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을 말이야. 확실히 이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단계이다. 이름 하나는 확실히 잘 지어놨어. 초인지경이라...'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익숙해지기 위해 새벽 동이 트고 방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햇빛 속에서 유유히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미세한 먼지들이 운동하는 걸 관찰하며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던 왕기가 그렇게 한참을 서서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극렬한 허기가 느껴지는군. 이건 비상식적으로 많은 정보와 감각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몸속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많이 소비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야. 내 몸이 브레이커 없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경주용 자동차로 변신한 기분이 든다고. 연비가 낮아서 기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지금이 전투 중이라면 허기를 강제로 죽였겠지만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지, 강호에서 무인들 특히 고수들은 절대 비만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에너지 효율 등급이 너무 낮아서 살이 찔 여유가 없는 것이야. 지금 당장은 밥부터 먹어야 하겠어."

서기 1345년 8월 31일

그 어느 때보다 푸짐한 아침 식사를 한 왕기가 여느 날처럼 연무장에 나가서 척무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무관을 기다리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왕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초인지경에 든 감각으로 인해 어디선가 거대한 기의 덩어리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왕기가 느꼈던 거대한 기의 정체는 아침 일찍 나와서 몸을 풀고 있는 왕기가 대견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자신 쪽으로 접근하고 있던 척무관이었다. 그때야 왕기는 알 수가 있었다. 척무관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동안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더없이 예민해진 감각으로 척무관이 마치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소리 없이 접근하는 한 마리 대호처럼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평상시에도 저런 걸음걸이를 보인다는 것은 척무관의 경지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게다가 저 엄청난 기의 덩어리라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내가 딱 그꼴이로군. 저런 고수에게 계속 수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야.'

척무관을 본 왕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왕기 쪽으로 다가오던 척무관 역시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왕기의 변화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척무관이 여느 날처럼 왕기의 앞에 우뚝 서자 표정아 딱딱하게 굳어있던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놀랍군, 척무관."

"놀랍습니다. 저하."

먼저 왕기가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동안 미안했네. 내가 사과하지. 그동안 난 척무관이 대련이라는 핑계로 내 명치를 계속 멍들게 한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좀 얄밉기도 했었네.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척무관이 얼마나 자제를 하며 날 수련시켰는지를 말이야. 만약 내가 척무관 같은 경지였다면 나 같은 하수하고는 절대 대련 따위를 해주지 않았을 것이야."

왕기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사과를 하자 척무관이 입을 열었다.

"저하.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사옵니다. 대군 저하를 골탕 먹이려는 마음도 실제로 있었으니까요. 저하께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공을 익힌다는 건 본디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하는 것인데... 소관은 그런 저하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금방 없어지고 말았지요. 그렇게 만든 것 역시 저하이십니다. 이틀 만에 감기를 하고 일주일 만에 기경팔맥을 뚫으시더니 오늘은 이렇게 정기신 합일에 성공하고서 제 앞에 나타나셨군요. 저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이십니다. 그런 기재를 소관이 직접 지도하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지요."

말을 하던 척무관이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가슴께로 올리며 양손으로 검을 잡고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대군 저하. 정식으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인은 척씨 가문의 가전 무공을 6세 때부터 익혔고, 아버지에서 태백심법과 송학검법을 사사한 척노리라고 하며, 강호 동도들이 붙여준 별호는 해동제일검이라고 하옵니다."

척무관이 자신을 제대로 된 무인으로 대접을 해주자 왕기가 목검을 정중히 들어 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소림의 반야심공을 익혔고 특별한 검법을 익히지는 않은 왕기라고 하네. 별호 또한 아직 없는 햇병아리에 불과하지. 그러니 아무쪼록 잘 부탁하이."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뜨거운 여름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은 척무관이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덤벼보시지요. 저하께서 얼마나 달라지셨는지 궁금하니까요."

"좋네. 한데... 약속은 지키는 것이겠지?"

"약속이오?"

"명치로 날아오는 검을 내가 막아내면 그대가 근사한 검 한 자루를 사주기로 하지 않았나?"

"한 자루가 아니라 열 자루라도 사드리지요. 저하께서 막으실 수만 있다면요.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요."

- 하압.

힘찬 기합과 함께 왕기가 질풍처럼 움직이며 척무관을 향해 목검을 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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