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화 (5/171)
  • #5. < [무공 수련] ch.1 기(氣)를 느끼다 - 2 >

    - 촤아악.

    한 바가지의 물이 얼굴에 쏟아지자 연무장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던 왕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옆에 대기해 있던 고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왕기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주물럭. 주물럭.

    아직도 비몽사몽 중인 왕기를 보며 척무관이 물었다.

    "저하. 감기에 성공하셨습니까? 기를 느끼셨냔 말입니다."

    왕기가 힘없이 고개를 젓자 척무관이 칭찬을 해주었다.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긴 하지요. 하지만 아주 잘하셨습니다. 저하. 무공을 익힌 첫날부터 기절할 정도로 마보를 했다는 것은 아주 강인한 의지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무인이 되실 가능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누워계시면 내일 끔찍한 근육통을 겪게 되실 겁니다. 힘들더라도 계속 움직이셔서 몸을 풀어줘야 하니까 일어나 보시지요."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난 왕기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무공 비급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다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하겠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짓을 한 달을 넘게 해야 한다니...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래도 저하는 무공을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직접 돈을 벌 필요가 없으시니까요. 객잔에 있는 점소이나 농사를 짓고 사는 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과 같은 몸을 이끌고 음식을 나르고 밭을 갈아야 먹고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무공을 익히기가 힘든 것이지요."

    이해했다는 듯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척무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상태에서 계속 팔과 다리를 움직여 몸을 풀어주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무공과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저하께서 비급을 보실 때 이해가 잘 되실 테니까요. 오늘은 단전(丹田)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단전은 크게 상, 중, 하 3가지로 나뉩니다. 흔히들 말하는 정기신(精氣神)이지요. 지금 저하께서 느끼시고자 하는 기가 모이는 곳이 바로 중단전입니다. 정은 하단전, 신은 상단전에 해당하지요..."

    척무관의 무공 강의를 들으며 왕기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짓을 한 달을 넘게 하라고? 난 때려죽여도 그렇게 못한다. 척무관의 동생이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겠지. 빠른 시간 내에 감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해.'

    생각을 끝마친 왕기가 대뜸 척무관에게 질문했다.

    "그 기라는 것들이 많이 모이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사소한 것도 빼놓지 말고 아주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게나."

    [고려각]

    그날 밤 자신의 방에서 반야심공의 비급을 앞에 두고서 눈을 꼭 감고 있는 왕기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난 2020년의 사람이며 공돌이이다. 내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안 돼. 이 시대의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과학이라는 학문을 배워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 연역법을 이용해 정리를 한번 해보자. 반야심공에 나온 운기조식법이란 건 결국 호흡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공기를 필터링을 통해 기라는 것만을 걸러서 중단전에 축적하는 방법이다. 그 말인즉슨 대기 중에 기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기체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럼 감기의 원리는 아주 간단해진다. Gas의 Diffusion(확산)이지. 굳이 영국의 화학자 그레이엄(Graham)의 '같은 온도와 압력에서 기체의 확산 속도(V)는 분자량(M)의 제곱근에 반비례한다'라는 이론까지 갈 필요도 없다. 모든 기체뿐만이 아니라 액체 또한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니까. 물속에 떨어뜨린 잉크가 퍼지듯이 말이여. 마보라는 것을 행하여 몸속의 기를 소진하면 몸과 대기 사이에 기의 평형상태가 깨지게 된다. 그럼 확산 현상에 의해 온몸의 모공을 통해 기라는 것이 밀려들어 올 테고 그걸 알아채는 것이 바로 감기이다.'

    - 번쩍.

    눈을 뜬 왕기가 중얼거렸다.

    "이론 자체는 더없이 간단명료해. 문제는 기라는 것에 대해 내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야. 현대 과학에서도 증명되지 않은 것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어떤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이름과 특징이 정해져야 한다. 이 시대 사람들처럼 단순히 기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인식을 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고 있어. 기라는 존재 자체를 믿지 않으면서 쭉 살아왔으니까. 내 두뇌가 인식을 용이하게 만들만한 이름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익숙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 말이야."

    왕기가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사고에 빠져들었다.

    '기는 대기 중에 존재한다는 게 절대 명제이니까... 먼저 대기의 조성을 살펴보자. 대기는 질소가 78%이며 그다음을 차지하는 것이 산소로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질소나 산소를 가지고 기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야. 남은 건 극미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희귀 원소들이다. 아르곤, 네온, 헬륨 등등이 포함되어 있지.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닐 것이야. 그랬다면 현대 과학에서 벌써 밝혀냈을 테니까.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같은 방사성 원소들도 아닐 것이야. 그걸 몸속에 고밀도로 축적하겠다는 것은 자살행위이지. 최근까지도 현대 과학에서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극미량의 원소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런 원소들은 사실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에 범위가 좁혀진다. 그럼 기의 특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첫번째는 발광현상(發光現象)이다. 척무관이 말하기를 기가 고밀도로 집적되면 빛을 발한다고 했어. 검기나 검강 등이 그러하고 고수들의 눈에서 광채가 난다는 것도 그 때문이지. 둘째, 고밀도로 직접 된 검강을 휘두르면 바위를 손쉽게 자를 수가 있다고 했다. 마치 광선검이나 레이저처럼 말이지. 셋째, 고수가 되면 격투 중에 부상을 입어도 고통을 덜 느낀다고 했어. 그래서 계속 싸울 수가 있다고 했지. 이건 기가 진통제 역할까지 겸한다는 뜻인데...'

    그 순간 왕기의 머리를 강하게 두드리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건 제논(Xenon)이다. 원자 번호 54번으로 발견된 지 100년 정도 밖에 안되는 초희귀 원소이면서 대기 중에 극미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무색, 무취의 비활성 기체이지. 비활성 원소여서 처음에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 원소인 줄 알았지만 연구가 거듭되면서 제논의 이용 가치가 증명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카메라 플래시나 아이맥스 영사기 등이다. 제논에 전류를 통과시키면 매우 밝은 빛을 내는 발광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야. 또 하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이다. 나사의 딥스페이스 1호는 이온 추진장치로 제논을 사용하여 단 81.5킬로그램의 제논으로 17,000시간동안의 비행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니까. 게다가 제논은 전신 마취제(general anesthetic)로 사용된다. 그뿐만이 아니야. 1962년 벨 연구소에서는 제논의 레이저 작용을 발견했어. 제논의 특징이 기가 집결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과 거의 유사해. 제논이라는 이름도 ‘낯선’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Xenos’에서 따왔으니 지금의 내게는 가장 알맞은 이름이야. 낯선 사람을 배척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가 거기서 나온 것이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밝은 표정의 왕기가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설사 기가 제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기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지금부터 난 대기 중에 극미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제논이라는 기체가 내 몸속으로 흡입되는 순간을 찾는 것이야.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리고 사흘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기 1345년 8월 5일

    지난 며칠처럼 왕기가 기를 느끼기 위해 연병장에서 마보를 취하고 있었다. 앞에 서있는 척무관이 여느 날처럼 놀리듯 말을 하며 계속 자극을 주고 있었다.

    "저하.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지 않습니까? 밤에 잠을 자기가 무서울 때가 되었을 텐데요.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을 테니까요. 포기하시면 편해지십니다. 아니면 정신을 집중해서 기를 느끼시면 됩니다. 그 순간 마보는 끝나니까요. 집중 또 집중하십시오."

    마보를 하고 있는 왕기가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었다.

    '난 제논을 느껴야 한다. 제논은 불활성기체라 산소처럼 드라마틱 한 현상을 신체 내에서 일으키지 않아. 단지 불활성기체는 다른 물질과 결합하지 않는다는 정설을 깬 것처럼 2020년의 현대 과학으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논 화합물들을 몸속에서 만들 뿐이야. 그리고 그러한 화합물들의 대부분은 산소나 탄소와 결합된 것들이다. 산소는 인간이 호흡을 통해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가 있고, 인간의 몸 자체가 탄소화합물이니 화합물을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그것이 기가 고밀도로 집결되었을 때 발휘하는 공능의 원천적인 이유일 것이라는 게 내가 세운 가설(假說)이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가스가 확산 현상에 의해 내 몸속으로 소리 소문 없이 파고드는 것뿐이야. 그걸 잡아내야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와 앞으로 치켜든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왕기를 보며 척무관이 말했다.

    "이제 겨우 4일째이니 기를 못 느낀다고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보의 좋은 점은 하체와 허리 그리고 어깨를 단련시켜 준다는 겁니다. 이는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도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루하루 저하의 몸이 건강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무공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무엇을 배우셨지요?"

    "어제는 기경팔맥에 대해서 배웠지."

    "이보십시오. 이제는 마보 중에 태연하게 말도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만큼 저하의 몸이 건강해 지신 것입니다. 오늘은 임독양맥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임독은..."

    이를 악문 채 척무관의 강의를 듣고 있던 왕기가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지으며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잡았다! 잡았어! 마침내 잡았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왕기가 물었다.

    "저하. 무엇을 잡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방금 내 몸속으로 파고드는 제논 아니 기의 존재를 잡아냈다고."

    "이제 겨우 4일째인데요? 저하. 힘들다고 거짓을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정말이라니까. 확실히 느꼈어. 기의 존재를 말이야."

    "그럼 증명해 보이시지요. 기의 존재를 느낀 자는 축기(蓄氣)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알고 있는 운기조식법이 있으십니까?"

    "반야심공의 기초 운기법은 잘 알고 있지."

    "그럼 그걸 운공해 보시지요."

    왕기가 지체 없이 마보를 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반야심공 특유의 반가좌(半跏坐) 자세를 취하고서는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흐흡... 하아... 흐흡... 하아..."

    그러자 다리의 떨림이 급속도로 멈추고 왕기의 얼굴이 평온해지더니 빠르게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척무관이 대낮에 귀신을 만난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틀림없는 축기 현상이다. 마보를 한지 4일 만에 감기를 해냈다고? 이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재능이 아닌데... 어쩌면 저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무공의 기재일 수도 있겠구나."

    척무관이 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그러자 여느 날처럼 탈진을 한 줄 알고 안마를 해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던 고려 병사들이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왕기의 운기조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병사들을 물리친 척무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내가 모시는 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무공 기재인데다가 장차 고려의 왕이 될 자라. 앞으로 상당히 재밌는 일들이 발생하겠군. 내 가슴이 다 두근거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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