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화 (3/171)
  • #3. < 내가 고려의 왕이 될 것 같은가? - 2 >

    강릉대군의 말에 척무관이 말을 몰아서 가마 가까이로 좀 더 붙었다. 그리고는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듯 주변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저하. 고려의 조정이 부원배(附元輩 :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어 출세를 한 권문세족을 뜻함)라고 불리는 친원파(親元派)들에게 장악된 지 오래입니다."

    왕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나?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척무관이 못 들은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고려의 왕위는 원황실의 의중에 따라 죄자우지 되고 있는 게 현실이옵니다. 선왕이신 충혜왕이 서거하셨을 때 제가 속한 척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적극적으로 강릉대군 저하를 왕으로 밀었습니다. 하지만 친원파는 충혜왕의 장남인 왕흔(王昕) 저하를 왕으로 밀었지요. 결국 왕흔 저하께서 새로운 고려의 왕인 충목왕(忠穆王)으로 오르셨습니다. 그게 작년의 일이지요."

    "그러니까... 그대들도 나름 열심히 힘을 썼으나 원나라 황제인 혜종의 맘이 왕흔, 즉 내 조카에게 있었기에 내가 고려의 왕이 되지 못했다는 뜻인가?"

    "그렇사옵니다. 저하. 이는 혜종이 충목왕의 생모이신 덕녕공주(德寧公主)를 가엽게 여긴 탓이라고 저희 쪽에서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원나라 황제가 덕녕공주를 가엽게 여긴다고?"

    "네. 저하. 덕녕공주는 뛰어난 무공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진서무정왕의 딸입니다. 진서무정왕은 몽골 서부를 영지로 가지고 있기에 원나라 황실에서는 서부의 반란세력과 진서무정왕이 결탁할 것을 항상 걱정했었지요. 그런 이유로 원나라 황실에서는 덕녕공주를 동쪽으로 가장 먼 고려로 시집을 보낸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녀 가문이 고려 왕실과 통혼(通婚)할 정도로 고귀한 가문은 아니었기에 충혜왕의 엽색 행각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였지요. 선왕과의 사이에서 왕흔(王昕) 저하를 출산하였습니다만 불행한 결혼생활이 된 것이지요. 게다가 덕녕공주가 고려로 시집을 온 지 몇 년 안 되어서 공주의 아비인 진서무정왕과 친정 오라비들이 순차적으로 다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했지요. 친정 식구들이 몰살되어 친정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비록 촌수는 멀지만 혜종이 그런 공주를 불쌍히 여기게 된 것 같습니다. 이미 진서무정왕과 그의 아들들이 다 사망했기에 더 이상 걱정거리도 없으니 덕녕공주를 밀어줘도 후환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요."

    "그래서 나 대신 덕녕공주의 아들이자 내 조카인 왕흔을 왕으로 밀어준 것이다?"

    "바로 그겁니다. 저하. 고려의 새로운 왕이 되신 충목왕께서는 올해 보령(寶齡) 9세이십니다. 작년에 왕위에 오르실 때에는 8세이셨지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덕녕공주에게 섭정(攝政)을 하라는 뜻이겠지."

    "역시 영민하십니다. 저하. 원나라 황제가 남편과 친정식구들을 모두 잃은 불쌍한 덕녕공주에게 고려를 한번 다스려 보라고 밀어준 것이지요."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날 어떻게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인가? 황제의 마음이 덕녕공주에게 있으면 내가 왕이 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입에 담기가 참으로 불경스럽지만... 새로운 고려의 왕이 되신 충목왕은 태어나실 때부터 허약하셨습니다. 사시사철 병을 달고 사셨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왕위에까지 오르셨으니 격무에 시달리실 테니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시겠지요. 제아무리 원나라 황실에서 덕녕공주를 밀어주고 싶어도 아들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인즉슨... 충목왕은 오래 살지 못하고 병사할 것이다. 그렇게 충목왕이 죽고 나면 날 왕으로 밀어주겠다?"

    척무관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저하. 누가 들을까 무섭사옵니다. 저희 쪽에서는 충목왕의 재위 기간이 앞으로 짧으면 2~3년, 길어야 4~5년을 못 넘길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의가 직접 한 말이니 믿으셔도 될 것입니다."

    "흐음... 길면 5년이라. 그럼 충목왕이 병사하면 다음 순위는 내가 되는 것인가? 선왕이신 형님과 덕녕공주 사이에 또 다른 아들이 있느냐 말이다."

    "그것까지 모르시다니 사고로 저하의 기억이 많이 사라지신 모양입니다. 덕녕공주에게는 더 이상의 아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선왕이신 충혜왕의 서자(庶子)인 왕저(王㫝) 저하가 남아 있지요. 윤계종(尹繼宗)의 딸인 희비 윤씨(禧妃 尹氏)가 낳은 아들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왕저 저하께서도 아직 9세로 연치가 많이 어리시고 병약하다고 소문이 나있으니까요."

    "결국 내가 왕이 되려면 충목왕이 병으로 죽어야 하고, 조카인 왕저를 제쳐야만 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저하. 염려 마시옵소서. 충목왕만 병사하시면 저희 가문과 최씨 가문이 대군 저하를 강력하게 밀어 드릴 것입니다. 왕저 저하는 서자이옵니다. 적통이신 대군 저하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신분이지요. 덕녕공주의 소생이 아닌 이상 우리 쪽의 힘이 더 강하니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흠... 일단 그대의 말을 믿어는 보겠네. 하지만 그 말이 지켜지지 않으면 내가 왕이 되었을 때 그대들에게 돌아갈 과실이 적어질 것이라는 걸 명심하게나."

    "네. 저하.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이왕 무공 비급을 사러 가는 김에 현 강호의 고수들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 척무관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강호의 정보통이라는 개방만큼이야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소관도 잘 알고 있지요. 현 강호의 최고 고수들을 일컬어 십대고수(十大高手)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십대고수?"

    "네. 각각 일비(一秘), 사왕(四王), 오검(五劒)이라고 칭해지는 고수들이지요. 일비와 사왕은 화경에 든 고수들이고, 오검은 그들보다 한 수 아래인 검의 고수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네. 저하. 일비는 최근 20년간 강호에 모습을 일절 드러내지 않고 있는 마교의 신임 교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3년 전 마교의 장로원에서 만장일치로 뽑힌 새로운 교주라고 하더군요. 소문으로는 화경에 든 절대고수라고 합니다. 사왕은 소림사의 전대 방장인 공심대사(空心大師),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인 태청진인(太淸眞人), 하북 팽가의 전대 가주인 도왕(刀王) 마지막으로 원황실에서 세운 정림방의 방주인 팔비신장(八譬神掌)을 일컫는 것이지요."

    "그럼 나머지 오검은?"

    "화산파의 매화신검(梅花神劍), 남궁세가의 창궁일검(蒼穹一劒), 곤륜파의 운룡일검(雲龍一劒) 그리고 몰락한 점창파의 무공을 익혔다고 알려져 있는 사일쾌검(射日快劒)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해동제일검(海東第一劒)이 있지요."

    척무관의 설명을 들은 왕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해동제일검은 소속된 문파가 없는 것인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거기 계신 분은 고려에서 오신 해동제일검(海東第一劒) 척노리가 아니시오? 나 하북 팽가의 외당주인 맹호폭도(猛虎爆刀)이외다."

    - 촤르륵...

    모르는 자의 등장에 가마의 발을 내린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왕이 되는 길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험난한 가시밭길이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사약을 받고, 한발 삐끗하면 목이 잘려 떨어져 나가는 세상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야만 해. 머나먼 원나라에서 젊은 나이에 죽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야. 일단 가장 먼저 무공을 익힌다. 그런 다음 원나라 황제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잡아야 하겠지. 그리고 내가 고려의 왕이 되려면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해야만 하니... 이왕 할 결혼이라면 예쁜 공주랑 하는 것이 좋겠지? 이 미개한 시대에 내 눈에 들만한 미인이 황실에 있으려나? 근데... 내가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을 계속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 드는 건 왜지?'

    잠시 후 척무관과 사담을 나누던 맹호폭도라는 자가 떠났는지 가마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시 주렴을 걷은 왕기가 쑥스러워 하고 있는 척무관을 보며 말했다.

    "이것 참 영광이로군. 강호의 십대고수인 해동제일검의 호위를 다 받다니 말이야. 게다가 내일부터는 무공의 기초를 전수받기까지 하다니..."

    "내일이 되면 저하께서는 그 말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왜 그런가?"

    "뛰어난 고수일수록 무공 수련에 엄격한 법이니까요. 엄사출고도(嚴師出高徒)라. 엄한 사부 밑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지요."

    "나도 바라는 바이네. 쉽고 편하게 배울 생각은 전혀 없으니 부디 엄격히 봐주시게나. 근데... 고려의 무관이 어쩌다가 강호의 십대고수가 된 것인가?"

    "이곳 대도는 하북 팽가의 본거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팽가와 고려 병사 사이에서 사소한 일로 다툼이 좀 있었지요. 그래서 방금 전 찾아왔던 맹호폭도와 제가 일대일로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척무관이 이긴 모양이로군?"

    "네. 제가 십초(十招)가 채 되기도 전에 이겨버렸지요. 맹호폭도가 강호에서 제법 알아주는 뛰어난 고수이기에 그를 이긴 제가 해동제일검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무공 전수를 하면서 그 이야기도 좀 해주게나. 재밌을 것 같으니까..."

    말을 하던 왕기의 뇌리 속으로 잊어버리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자 왕기가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원! 내가 하지원을 까먹고 있었어."

    "하지원이 누구입니까?"

    의아해 하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몰라도 되는 자일세. 내가 정신이 없기는 없는 모양이로군. 기황후(奇皇后)를 잊어먹다니. 지금 원황실에 기황후가 있지 않은가? 고려에서 공녀로 바쳐졌다가 혜종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된 여인 말일세."

    "있습니다. 7년 전 기씨가 혜종의 아들인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을 출산하자 그 이듬해에 혜종이 그녀를 제2황후로 책봉했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저하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지요."

    "기황후의 존재가 나에게 방해가 된다고?"

    "그렇습니다. 고려의 조정에는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을 필두로 하는 기씨 일가가 기황후를 믿고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잔형적인 부원배들이지요. 그런 자들이 대군 저하를 밀어줄 리가 없습니다. 대군 저하의 영민함이 자신들의 권력에 방해가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기황후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경계를 해야 한다는 뜻이로군."

    "소관의 생각은 그렇사옵니다. 저하."

    그 순간 갑자기 가마가 멈춰 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척무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주변을 경계하거라. 저하. 흑점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마에서 내리시지요."

    가마에서 내린 강릉대군이 눈앞에 보이는 흑점의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