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화 (2/171)
  • #2. < 내가 고려의 왕이 될 것 같은가? - 1 >

    척무관이 흑점으로의 행차 준비를 하러 나간 사이에 2020년에서 갑자기 아득한 과거의 인물인 강릉대군의 몸으로 빙의된 현대인 왕기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강릉대군의 사고 당시의 기억들을 조합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신분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였다.

    서기 1345년 7월 30일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 남북의 길이가 7.4km, 동서의 길이가 6.6km에 달하고 약 40만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이 거대한 도시의 남쪽에는 원나라 황성이 지어져 있었다. 북쪽에 2개의 성문이, 동서남쪽에 3개의 성문이 있는 이 황성의 성벽은 흙으로 지어진 토성이다.

    황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고 내성의 동쪽에는 황궁과 후원이 있으며, 서쪽에는 흥성궁, 태자궁, 흉복궁이 있다. 황궁의 정문은 숭천문(자금성의 오문)이며,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명전(자금성의 태화전)이 버티고 서있고, 그 뒤에 원나라 황제의 집무실 겸 침실인 연춘각(자금성의 건청궁)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황궁의 정문 격인 숭천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우측으로 오백 보 정도를 걸어가면 제법 큰 규모로 지어진 고려각(高麗閣)을 비롯한 몇 개의 고려식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에서 볼모로 온 왕자를 비롯한 호위무관과 병졸 그리고 하인과 하녀들이 머무는 건물이었다.

    이는 고려가 비교적 오랜 세월 부마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원세조인 쿠빌라이가 입조한 고려 사신에게 '고려는 1만여 리나 되는 대국으로 과거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정복하고자 했으나 정복하지 못한 나라인데 이렇게 스스로 입조하니 매우 기쁜 일이다'라고 말한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원나라가 고려를 강대국으로 인정했기에 받을 수 있는 특혜였다. 원이 정복하여 인두세를 직접 거두던 러시아 쪽 공후들이 볼모로 잡혀와서는 말먹이를 관리하는 먹이꾼으로 일하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세 시대의 탁월한 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가 상도를 여행한 후 서술했듯이 500여 명의 병사들이 24시간 상주해 있는 숭천문과 가깝기에 고려의 왕자를 보호 및 감시하기에 용이하다는 점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 고려각 앞의 돌로 잘 포장된 넓은 공터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 푸드득.

    투레질을 하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척무관이 안장 위에 올라타 있는 강릉대군을 보며 달래듯 말을 하고 있었다.

    "대군 저하. 위험하옵니다. 저하께서 위험하게 굳이 말 타는 법을 배우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척무관. 내가 원에 끌려온 지도 어언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소. 12살에 와서 벌써 16살이 되었다는 말이오. 그 4년 동안 내가 이룬 것이 무엇이 있소? 기껏 해봐야 몽골족과 한족의 말을 좀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 않소이까?"

    "저하. 그 말씀은 달리 말하면 4년간 무탈하게 잘 지내셨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만약 저하께서 고려에 계셨더라면..."

    "왕위쟁탈전에 휩쓸려 누군가에게 독살을 당해 죽을 수도 있었을 테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을 수도 있고.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오.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고려의 왕위에 오르려면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오."

    "저하.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척씨 문중과 함께 손을 잡은 최씨 문중은 대군 저하를 왕으로 밀기로 이미 약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 약조를 믿고 차분히 기회를 기다리시면 왕위에 오르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옵니다."

    "하지만... 난 이제 나이가 들어서 조만간 원나라 황실로 들어가서 숙위(宿衛, 볼모로 잡혀간 속국의 왕족들이 황제를 호위하는 일)의 일을 보아야만 하오. 역대의 볼모들이 그랬듯이 나도 황제의 근위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외다. 그렇게 눈도장을 찍어야 황제의 부마가 되어 고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말도 제대로 못 타는 근위병이라니... 원나라 병사들이 날 보며 얼마나 비웃겠소? 그런 나에게 황제가 자신의 소중한 딸을 주고 싶겠소이까? 이젠 나도 다 컸소이다. 4년 전 어린아이였던 내가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그만 그 고삐를 놓아주시오."

    이제 막 수염이 나려는지 코밑이 거뭇거뭇 해진 강릉대군을 바라보며 척무관이 말했다.

    "그럼 조심하셔서 타셔야 합니다."

    "그리하리다."

    척무관이 고삐를 놓아주자 제법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는지 조심해서 말을 잘 타던 강릉대군이 여느 젊은이들처럼 호기를 참지 못하고 말을 빠르게 몰기 위해 갑자기 말의 옆구리를 연속적으로 강하게 걷어찼다.

    - 히이잉. 히잉..

    놀란 말이 소리를 내며 고개와 앞발을 하늘로 쳐들자 강릉대군의 몸이 안장에서 붕 떠올라 바닥으로 수직낙하하기 시작했다.

    - 퍼억.

    돌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강릉대군이 쓰러지자 화들짝 놀란 무관과 병사들이 달려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강릉대군의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들을 살펴보던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난 2020년 한국에 살던 왕기라는 이름의 사람이다. 빙의된 이 몸에서 다른 영혼의 존재를 전혀 느낄 수가 없으니 강릉대군이라는 자는 낙마 사고로 죽었거나 뇌사 상태에 접어든 게 분명해. 그 틈을 타 내가 빙의한 것이겠지. 지금 강릉대군이라는 자에 있는 이 영혼은 왕족이 아니라 현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공돌이일 뿐이야. 의대를 다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것이 무섭고 해부학 실습시간에 처음으로 본 카데바(실습용 시체)의 충격과 암기 위주의 의대 공부에 적응하지 못해서 전과(轉科)를 한 평범한 공돌이일 뿐이라고. 수학과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공돌이이지. 하지만 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강릉대군의 몸으로 빙의한 왕기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방안에 놓여 있는 매끈한 동경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까칠까칠한 밤송이 같은 머리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 왕기의 눈에 보이는 강릉대군의 헤어스타일은 특이했으니, 이마와 얼굴의 경계선 주위를 모두 깎고 정수리 부분 한가운데만 남겨서 길게 땋아 뒤로 늘어뜨린 머리 모양이다.

    '이건 전형적인 변발(辮髮)이다. 지금 이 시기가 원나라 때라는 명확한 증거이지. 게다가...'

    왕기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한복도 아니고 중국 의상도 아닌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바지가 보였다. 2020년대의 현대 여성들이 각선미를 자랑할 때 입던 스키니진처럼 몸에 촥 달라붙는 바지였다. 사타구니 사이가 불룩 튀어나와 있는 바지를 보며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발레리노도 아니고... 이건 틀림없는 호복(胡服)이다. 말을 타던 유목민들이 활동하기 편하도록 지어 입던 의복이지. 변발과 호복으로 보아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명확하다. 내 정체성도 알겠고. 문제는...'

    왕기가 전날의 충격으로 깨질듯한 머리를 붙잡고서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강릉대군의 기억들을 맞추어 보았지만 쉬이 되지가 않았다.

    '사고 전날의 기억은 뚜렷하지만 그 이전의 기억들이 너무 흐릿해. 몇 개의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고. 마치 나 스스로가 알아보라는 듯 누군가가 방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왕씨다 보니 고려사에 관심이 있어서 남들보다는 비교적 많이 공부했다고 하지만 강릉대군이라는 자가 정확히 누군지를 알 수가 없어. 정황상 차후 공민왕이 될 자의 몸으로 빙의가 된 것 같긴 한데... 고려 역사상 강릉대군이란 불린 자는 공민왕 한 명이 아니라고. 공민왕의 아버지 역시 강릉대군이라고 불리었으니까. 나의 정확한 신분과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그때였다. 밖에서 척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위험한 말 대신 안전한 여(輿 : 사람이 드는 가마, 말이 모는 연(輦)과 구분된다.)를 준비했으니 나오시지요."

    "지금 곧 나가겠다."

    밖으로 나간 왕기는 지금이 원나라 때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고려각 앞에 당장 전장으로 출정이라도 할 듯 모든 병사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서 도열해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뾰쪽한 창날이 박혀있는 투구를 쓰고 있었고, 두루마기처럼 투구와 연결된 원나라 특유의 갑옷인 기다란 찰갑(札甲)을 빈틈없이 착용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허리에는 칼을 차고 손에는 창을 쥔 채 꼿꼿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십여 명의 고려 병사들 앞에 서있던 척무관이 재촉했다.

    "서두르시지요. 시간이 지체되어 숭천문이 닫히게 되면 아무리 저하라도 출입이 쉽지가 않사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병사들 몇 명이 울러 맨 가마에 타서 흑점으로 출발하였다. 가마가 황성을 벗어나 대도 시내로 진입하자 왕기가 척무관을 불렀다.

    "척무관, 은밀히 할 말이 있으니 이리로 와보시게."

    "네. 저하."

    말을 탄 척무관이 가마 옆으로 바짝 붙자 왕기가 가마의 주렴을 걷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저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내가 어제 머리를 다쳐 과거의 기억들이 온전하지 못하다네. 하지만 어제 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에 물어보는 것이야. 척씨 문중과 최씨 문중이 나를 왕으로 밀기로 했다는 말이 사실이겠지?"

    "그렇사옵니다. 이건 저하의 형님 되시는 충혜왕(忠惠王) 때 이미 결정된 일이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작년에 돌아가신 선왕의 엽색 행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신하의 아내든 뭐든 여자가 이쁘기만 하면 마구 겁탈을 해댔으니까요. 엽색 행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마저도 강간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고려의 왕으로 또다시 그런 분을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저희 가문과 최씨 가문이 영민하신 저하를 만나 뵙고 왕으로 밀어드리기로 협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내가 고려 왕들 중에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던 충혜왕의 동생이라 이거지? 그럼 내가 빙의한 이 몸이 훗날 공민왕이 될 자가 맞군.'

    본인의 신분을 확신하게 된 왕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난 그대들에게 뭘 주기로 한 것이지? 내 기억 속에 그대는 과거 무신(武神)으로까지 불렸던 척준경(拓俊京)의 후예이면서 고려 내에서 알아주는 무인이라고 되어 있는 데 말이야. 그런 뛰어난 자가 먼 원나라까지 와서 내 호위나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마땅한 대가가 있을 것이 아닌가?"

    "저하. 제 문중인 곡산 척씨(谷山 拓氏)와 같이 힘을 합치기로 한 우봉 최씨(牛峰 崔氏)는 지난 무신정권의 과오들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통성 있는 왕이 아닌 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 후환이 막대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무신정권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려 30년에 달하는 길고 끔찍한 여몽전쟁(麗蒙戰爭) 벌어졌고, 그 바람에 고려의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고려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가혹한 고통에 시달렸사옵니다. 위대한 고려국이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요. 이에 저희들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옵니다. 영민하신 저하가 왕이 되시어 저희들을 이끌어주시면 저희 가문들을 비롯한 무신들이 충심을 다해 보필하겠사옵니다. 그 대신 저하께서 왕이 되시면 문신들보다 무신을 우대해 주길 바라며, 충선왕( (忠宣王) 때 폐지된 정방(政房)이 다시 설치되기를 희망하고 있사옵니다."

    기나긴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폐지된 정방의 부활이라. 이전처럼 조정의 인사권을 자기들 맘대로 휘두르겠다는 속셈이로군. 결국 날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무신 정권의 재집권을 노리겠다는 뜻이야. 만약 내가 반대하면 그날로 날 쳐죽이겠지. 왕이 되고 싶은 자는 넘쳐날 테니까 말이야. 욕심 많은 무신들 무리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강해져야만 한다. 다행히 이 시기에는 무공이 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야.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왕기가 무공을 익혀 강해지겠다는 결심을 재차 굳히며 척무관을 추궁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가? 내가 보기엔 그대들이 약속을 먼저 어긴 것으로 보이는데..."

    "저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선왕께서 작년에 돌아가셨다면 당연히 나를 새로운 왕으로 밀어줬어야지. 내가 지금 고려의 왕이 된 것으로 보이나? 아니겠지. 난 아직도 원에 볼모로 잡혀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재간으로 날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인가? 이전에는 형님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고, 지금도 다른 자가 고려의 왕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 바람에 이전보다 왕위 승계 순위가 뒤로 더 밀린 것 같은데 말이야. 이런 식이면 내가 왕이 되기 힘들 걸로 보이는데... 이번에도 못한 걸 다음번에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겠냔 말일세. 그러고도 내게 대가를 바라는 건 말이 안 되지."

    왕기의 날카로운 추궁에 척무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하. 오해이십니다. 그건 저하께서 자세한 내막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시옵니다."

    '내가 궁금한 게 바로 그거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른 왕기가 겉으로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계속 숨기고만 있으니 내가 오해를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어디 한번 그 자세한 내막을 말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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