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조우(2) >
제이슨은 검을 뽑아 라마란스를 겨눴다. 라마란스는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그냥 구경하러 온 거야. 찬탈자의 맹약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제이슨은 라마란스가 양팔을 벌리면서 하는 말에 움찔해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거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자라고 여겼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이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거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괴물이다. 엘드라고 조차 이 정도의 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를 떠올린 제이슨은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짐작했다.
“너냐?”
“내가 누군지 짐작한 건가?”
라마란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존재. 라마란스 정도 되는 존재가 몸을 빼앗겼다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이로군.”
제이슨의 말에 라마란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치가 빠르군.”
하늘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신력이 세상에 퍼졌다지만, 12사도 모두의 힘을 몸에 품었던 엘드라고보다 더 강대한 신력을 품고 있는 상대였다.
제이슨도 신력을 품고 있었기에 그 부분을 미약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크기를 전부 감지하지는 못했다.
엘하르트가 그렇게 강한데도 불구하고 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상대하라고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단순히 구경을 위해서 온 건가?”
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들었던 하늘을 이렇게 오염시켰으니 그것도 좀 손봐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겸사겸사.”
“손을 봐?”
제이슨의 물음에 신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이 가리킨 방향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다. 빛의 소용돌이를 보고 제이슨은 그것이 뭔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곧 주위에 퍼져 있던 신력이 무서운 기세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제이슨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력마저 빨려들려는 것을 느끼고는 그 기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을 줬다.
그 덕분인지 빨려 들어가던 신력 중 일부가 제이슨에게도 들어왔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렇게 가공한 기세로 휘말려 들어간 신력이 곧 단단하게 뭉친 하나의 구슬로 변했다.
신은 그 구슬을 손에 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신력 회수 중에 그걸 빼갈 정도라니.”
제이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라마란스를 따라온 것부터가 실수였다. 라마란스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이게 내가 만든 하늘이야.”
마치 어린아이가 자랑하려는 듯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제이슨은 푸른색의 하늘을 바라보고는 새삼 저 신이 한 짓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세상에 뿌려진 모든 신력을 구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존재.
“이쪽 세계를 유지하려면 이 정도 신력은 필요해서 떼어놓고 갔는데 이걸로는 부족했나?”
“어딜 갔는데?”
“궁금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제이슨이 말없이 쏘아보자 신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런데 날 죽일 수 있겠어? 아크 리치는 죽지 않아.”
아크 리치는 라이프 베슬을 부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몸을 차지한 걸까?
신은 키득거리다가 손 위에 떠 있는 신력의 구슬을 꿀꺽 삼켰다. 12사도의 신력을 한입에 삼켰지만, 그가 가진 신력의 크기는 거의 늘지 않았다.
새삼 그 거대한 신력의 크기를 감지한 제이슨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흘러들어온 신력을 흡수하면서 더 강대해진 탓에 명확히 상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탄생?
이 자는 마음만 먹으면 인간 모두를 말 한마디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슨의 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다.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군대에 있을 때도 매일 죽음에 직면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아이젠과 그녀가 품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니 죽을 수 없다.
그걸 깨달은 제이슨의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그 눈빛의 변화를 지켜보던 신이 키득거렸다.
“재미있네. 그런 결심이 들어? 날 느낄 수 있으면서?”
제이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신살검이 없으니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신살검이 독처럼 신력을 중독시킨다고 해도 신이 품고 있는 신력을 중독시키려면 수백 년은 걸릴 것 같았다. 바다에 독 한 방울 풀었다고 바다가 오염되지는 않으니까.
그만큼 강대한 존재에 제이슨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는 강하다.
제이슨의 마음가짐이 검에 서렸다. 선명하게 맺힌 검기를 보던 신은 턱을 쓰다듬었다.
“사도들이 인간들을 만든다고 했을 때 막지 않았던 결과로군.”
“뭐?”
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의 뒤에 고풍스러운 의자가 자연스레 나타나서 그 위에 태연하게 앉은 신은 느긋한 시선으로 제이슨을 향해 손짓했다.
제이슨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 앉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말 한마디로 인간 모두를 죽일 정도의 존재에게 제이슨이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마음대로 부릴 힘이 있는 것 아닐까?
다리를 꼬고 앉은 신은 제이슨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만들었던 것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즐겁게 해준 것은 찬탈자. 엘하르트 그 녀석뿐이었지.”
12사도와 엘하르트. 그들은 누가 만들어 준 이들이 아니었다. 태초에 존재하던 이들.
당연히 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염두에 뒀어야 했다.
신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덤볐지. 내가 마련해준 기회는 써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기회?”
“맹약 말이야.”
제이슨은 그제야 사도들과 엘하르트만이 가지고 있던 맹약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창조한 인간들과 맺어지는 것이잖아. 선후가 안 맞는데?”
“푸하하하.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신이 손짓하자 그의 손 위로 빛의 고리가 나타났다. 기이하게 연결되어 앞과 뒤가 서로 맞물리는 무한의 고리.
“너희들의 인과는 모두 내 뜻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도 이 고리에 의한 것이지.”
“그럼 내가 사도들을 죽일 것을 알았나?”
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찬탈자가 모두를 죽인 거지.”
엘하르트가 모두를 죽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제이슨은 거기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다만 새삼 신이라는 존재의 능력에 놀랐다.
미래 예지 정도가 아니다. 사도를 만들고, 그들이 인간을 만들고, 맹약이라는 굴레로 다시 그들이 만날 것까지 예지했다.
이건 예지가 아니라 마치 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느낌이었다. 실제로 상대가 신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가 뭐지?”
“그 이유를 듣기에 너는 자격이 안 된다.”
제이슨이 이를 뿌득 갈았다. 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 정도 했으면 올 때가 됐는데?”
“누가?”
신이 대답하기 전에 제이슨의 뒤편 공간이 찢겨 나갔다. 제이슨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딱딱하게 굳은 엘하르트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제이슨과 신을 흘끔 보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간담회인가?”
“오랜만이군. 앉아.”
신이 손짓하자 엘하르트의 뒤로도 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하르트는 따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
“저 녀석의 기운은 내가 가장 잘 알지.”
신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엘하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봉인은 다 풀었고,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구나.”
“그래. 더 강해졌지.”
제이슨은 그런 엘하르트와 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하르트는 봉인을 풀면서 가히 신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의 검은 세상이라도 쪼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엘드라고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신위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마주하고 있는 존재는 신이다.
엘하르트가 보여준 어떤 신위도 그를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 존재.
그런 신이 느긋한 시선으로 엘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이곳으로 온 건가?”
“다짜고짜는 아니지.”
담담히 말한 엘하르트가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녀석은 왜 부른 거냐? 어차피 찾아가려고 했는데.”
제이슨은 엘하르트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을 찾아가려고 했다고?”
“그래. 힘을 되찾고 나서 찾아갈 생각이었다.”
“왜?”
엘하르트는 그 물음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끝장을 봐야 하니까.”
제이슨은 엘하르트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사도들은 인간의 창조주였다. 그런 자들을 죽이기 위해 피조물인 제이슨이 직접 나섰다.
그렇다면 신의 피조물인 엘하르트가 창조주인 신에 도전하는 것은 필연인 걸까?
제이슨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신이 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지.”
“무슨 소리냐?”
신은 미소를 지은 채 엘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너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엘하르트는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슨은 태연하게 일어나는 엘하르트를 보고 새삼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은 조금 전부터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나지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엘하르트는 태연하게 일어나 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히 불쌍한 해골 안에 들어가 있지 말고 본 모습을 드러내라.”
“왜? 친구라서 못 벨 것 같아?”
“나중에 변명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말에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신의 몸이 빛으로 휘감겼다. 그리고 라마란스의 몸이 허물어졌고, 그 안에서 빛으로 이뤄진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제이슨은 라마란스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신을 돌아보았다.
“죽은 건가?”
“뭐하러 이 아이를 죽이겠어?”
신이 손짓하자 라마란스의 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신은 엘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신을 바라보며 빛에 휘감긴 그의 얼굴과 모습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니 엘하르트와 그의 모습이 비슷했다.
제이슨은 그 둘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잠깐. 나도 일어나면 안 될까?”
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슨은 그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슨은 엘하르트의 옆에 섰다.
엘하르트가 돌아보자 제이슨이 말했다.
“네가 무슨 심정으로 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도 이 녀석은 죽어야 할 놈이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중에 엘하르트의 맹약자가 나와야 했기에 사도들이 신의 행세를 해도 그냥 넘겼다고 한 미친놈이다.
그런 놈에게 인간 전체의 명운을 걸 수는 없다.
언제든 변심하면 인간들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제이슨은 그걸 막기 위해서 엘하르트와 함께 싸우기로 했다. 그 결심을 읽은 엘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 말이 맞다. 죽어야 할 놈이지.”
둘의 뜻을 같이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너희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만 내 대적자가 될 자격이 있으니까.”
신의 말에 엘하르트가 본체를 드러냈다.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제이슨이 그에 올라탔다.
엘하르트가 신살검을 뽑아 들자 제이슨은 그 안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기간트를 탔을 때 자신의 기량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제이슨은 엘하르트와 하나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완전해졌음을 알았다.
그제야 눈앞에 선 신에 대한 두려움이 가셨다.
<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조우(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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