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파(3)
제이슨은 마갑을 소환하지 않았다. 이제는 오러 홀도 넓어졌고, 확실히 전보다 더 실력이 는 것이 느껴졌다. 마스터들과의 생사결을 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제이슨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갔다. 둘의 간격이 크게 줄어드는 순간까지 샤이드 대공은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수호검이라고 불리는 그 이름값을 전에는 확인도 못 했다. 그저 그의 능력을 다 보지도 못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 길을 만들어서라도 베어내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제이슨의 검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수호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이슨은 혼혈이 아니라 순혈의 인간. 그런 제이슨이 뻗은 검은 가속을 펼친 이들의 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빨랐다.
쩌엉!
하지만 낙뢰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쏟아지는 낙뢰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검을 튕겨내고 오히려 반격에 들어갔다. 수호검의 검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몸을 틀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공격을 펼치는 순간 아주 가는 틈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검을 휘두르려는데 그 틈이 사라졌다. 수호검이 성큼 다가오며 그 틈을 지워낸 것.
운명을 엿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틈을 지운 것일까? 그들이 만들어낸 틈은 빈틈과는 달랐다. 그 말은 상대가 적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리라.
수호검이 다가오며 휘두른 검이 제이슨을 사선으로 베었다. 제이슨은 무리하지 않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물러나는 제이슨과의 간격을 샤이드 대공은 바짝 쫓아오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수비에 특화된 그였지만, 공격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제이슨은 자신과의 간격을 좁히고 들어오는 그에게서 빈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자신 또한 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마갑을 입지 않은 채 그와 이만큼이나 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뿌듯해하며 전력으로 그와 부딪쳤다.
꼬박 두 시간의 대련 끝에 제이슨은 총 세 번의 틈을 보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샤이드 대공도 제이슨을 뚫지 못했다.
제이슨을 바라보는 샤이드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대단하군. 이제는 마스터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여겼는데 그런 나와 대등하게 싸우다니 말이야.”
제이슨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고대의 마스터들은 지금 만나는 마스터들과는 달랐다. 운명을 엿보던 고대의 마스터에 다가가고 있는 지금의 제이슨은 샤이드 대공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샤이드 대공도 마스터의 벽에서 한 걸음 넘어서면서 조금은 더 마스터에 가까워졌다. 운명을 엿보지 못한다고 해도 제이슨과 이 정도 대련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회복은 다 되셨나 봅니다.”
“자네 덕에 회복이 더 빨라졌네. 고맙군.”
단순히 회복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던 명확하지 않았던 느낌을 손에 잡을 듯 얻어냈다. 체계적으로 뭔가를 얻은 샤이드 대공은 환영검이나 뇌속의 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확실했다.
“나중에 대공 작위 수여식 때 와주시겠습니까?”
“자네 대공 작위 수여식 때 말인가?”
“예.”
“초대장을 보내게. 폐하께서도 그건 허락해 주시겠지. 안 해 주신다면 휴가를 얻어서라도 가겠네.”
수호검은 한 번도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저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초대장을 보내드리죠.”
아이젠이 놀랄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대륙에 최강자는 명실공히 마스터였다. 전쟁 억제력을 가졌던 존재들.
그런 이들 중 광휘의 검이 사라졌고, 환영검이 죽었다. 게다가 뇌속의 창마저 패배한 시점에서 그들의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
수호검 샤이드 대공, 절망의 검 벤이드 대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뇌속의 창은 가장 약한 마스터로 분류되었고, 그 위로 새로이 마스터가 된 제이슨의 이름이 올라갔다.
마검 제이슨.
마갑의 기사라는 명호의 영행 때문인지 몰라도 마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이슨이 트랑 왕국으로 돌아와 카이트 국왕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수정구를 조작해 지도를 띄워놓고는 말했다.
“자네를 위해 준비했네.”
제이슨은 자신의 영지 주위가 싹 비워진 것을 보았다. 대공은 공국을 따로 내주며 국경에 배치했지만, 공국으로 분리하지 않고 트랑 왕국 내에 공국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 트랑 왕국의 2할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 트랑 왕국의 최대 곡창지역을 포함한 영토를 준비한 카이트 국왕이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어떤가?”
“좋군요.”
남쪽으로는 아버지의 영토가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거트 공작의 영토가 맞닿아 있었다. 두 개의 영토가 맞닿아 있으니 그들을 신경 써주기도 좋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제국과의 거래도 잘 되었네.”
왕국이 커진다고 국력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왕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데는 기간트의 수가 영향을 미치는 법. 단순히 골드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라 수많은 재료가 필요했는데 그 재료 대부분을 제국이 쥐고 있었다.
그것들의 거래량을 세 배로 늘렸으니 기간트 생산량도 올라갈 터. 기간트가 없어서 문제지 기간트 라이더들이야 넘쳐나는 실정.
왕국의 국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리라.
“자네의 이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더군.”
트랑 왕국의 국왕 이름을 모르는 이는 있어도 마검 제이슨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없는 지경. 대륙에 그 이름을 남겼다.
마스터를 죽인 자로.
“과찬이십니다.”
“제국은 어찌한다든가?”
은근슬쩍 제국의 상황을 물어오기에 제이슨은 담담히 답했다.
“제국은 신성 교국을 다시 공격한다고 하더군요.”
“정말인가?”
“신벌이 성지를 짓밟는 것을 막은 것이라면 성지를 제외하고 점령하겠다고 했습니다. 광휘의 검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전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리 결정한 것 같습니다.”
“겁도 없군.”
이번 신벌은 신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신관들이 쓰던 신성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래서 특히 고위직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신벌 받을 짓을 한 이들은 알아서 숨을 죽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신성 교국에서는 신전들을 철수할 계획이니 제대로 협상하려면 그런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굽히고 들어갈 분도 아니고요.”
“그렇기는 하지.”
제국의 황제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상대를 짓밟고 협상을 하는 것이 그의 방식.
“제국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여도 이제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겠군.”
카이트 국왕의 시선이 제이슨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 제국의 편에 서서 검을 들었던 제이슨을 생각한다면 마스터를 보유한 곳이라고 해도 제국을 향해 이를 드러낼 수 없다.
공격을 수호검이 맡아서 하는 동안 제이슨이 방어를 맡는다면 누구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뇌속의 창이 이미 패한 상황에서 남은 이라고는 절망의 검뿐이었다.
그러니 펠레드 황제가 마음 놓고 신성 교국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이지만 제이슨이 제국의 편이 되어 검을 들었던 것을 보였으니 다들 제국이 제이슨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여길 테니까.
삼 년간 거래량을 늘려주는 것만으로 그를 써먹은 것에 대한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래. 대공 작위 수여식은 언제 할 생각인가?”
“길일을 받아서 하도록 하죠.”
제국의 편에 섰다고 하나 신성 교국은 트랑 왕국을 향해서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광휘의 검이 사라진 것부터 시작해서 트랑 왕국을 압박해야 할 기회만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국이 먼저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전에 다른 곳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알아보겠네.”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받아보지.”
아직 대공의 작위를 안 받았기에 그의 이름 뒤에 대공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작위 수여식을 빨리 진행할 계획이었다.
“물러가도 좋네. 시간을 많이 뺐었군.”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대공은 공국의 왕이다 보니 국왕이라고 해도 쉽게 오가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제이슨이 이렇게 배려를 해주니 카이트 국왕의 입지는 전보다 더 튼튼해졌다.
마스터인 제이슨이 카이트 국왕을 인정하니 감히 누가 그의 왕위를 노리겠는가?
영지로 돌아온 제이슨은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 크기를 더 키워야 할 판이었다. 공국의 수도로 하기에는 작았으니까.
교역의 중심이 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하려면 손을 봐야 할 곳이 많았다.
제이슨은 골드를 펑펑 풀어야겠다고 여기며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가는 길에 성에서부터 달려온 존재가 있었다.
얼마나 먹어댔는지 차가운 미남의 얼굴은 어디 가고 슬슬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카젠이었다. 제이슨의 시선이 카젠의 옆구리를 향했다.
옆구리에도 살이 찌기 시작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만한 경지에 든 자가 살이 찌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얼마나 먹어야 저렇게 될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제 온 건가?”
“그래.”
제이슨이 자리를 비웠지만, 성은 안전했다. 라마란스와 카젠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사도가 쳐들어왔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지키고 있던 곳이 위험할 리는 없었기에 걱정은 없었다.
“너도 신력을 느꼈겠지?”
“그거 물어보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냐? 돌아온 것을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볼 것도 없는 너를 왜 반가워해?”
제이슨은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그를 지나쳤다. 카젠이 그 옆을 따르며 물었다.
“찬탈자는 뭐라고 해? 사도들이 진짜 모여서 신력을 쓴 건가?”
제이슨은 카젠을 돌아보았다. 카젠은 엘하르트만큼 명확히 느끼지는 못했나 보다.
“변질했지만, 신력은 신력이라고 했어.”
“변질해? 사도들이 모여서 낸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신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건가?”
“너는 어때? 그걸 막을 수 있겠어?”
카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군. 가까이서 본 것이 아니라서. 어찌 되었든 사도들이 신력을 쓴다는 것은 조심해야 할 문제야.”
카젠은 사도라면 혼자서 셋까지는 감당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신력을 다루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했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운동 좀 하지? 그런 몸으로 사도를 상대할 거야?”
“못할 것도 없지.”
카젠이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제이슨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래도 먹을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짐이 된다면 너는 사도와의 싸움에 참여 못 한다.”
“뭐? 내가 없이 사도와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왜? 못할 것 같아?”
오히려 반문하는 제이슨에게 카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제이슨은 쉐일링과 라마란스와 함께 할뿐더러 찬탈자도 함께한다.
자신이 빠진다고 해도 큰 차이는 나지 않을 전력이었다.
상대가 사도라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제 운동할 거야.”
“좋아.”
제이슨이 내성 문으로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절도 있게 경례를 하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요란한 축포가 터져 나왔다.
온갖 축포와 함께 꽃가루가 쏟아졌고 그 앞에는 화환을 들고 있는 아이젠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제이슨이 카젠을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내가 시선을 끄는 역할이었다.”
제이슨은 픽 웃고는 내성의 대로에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무시하고 걸어간 제이슨은 아이젠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정적에 휩싸였던 대로가 떠나가라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제이슨은 그제야 아이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