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96화 (97/151)
  • 【96】 도발

    제국의 황제 펠레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들 봐라?”

    칠왕국 연합의 뇌속의 창이 움직여서 견제했던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뇌속의 창이 국경 근처로 움직였다. 게다가 광휘의 검도 국경 부근으로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 란진 왕국이 트랑 왕국 국경 인근으로 병력을 끌어모았다. 병력을 끌어모은다는 것은 전쟁을 준비한다는 얘기였다.

    대놓고 움직이는 그들의 꼴을 보니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제국을 견제하면서 움직이는 큰 그림을 그렸다.

    처음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연달아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데 계속 옴짝달싹 못 한다면 저들이 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펠레드의 시선이 칸트를 향했다.

    “재상. 어떻게 생각하나?”

    “저희가 우습게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 이거 그냥 허허 웃어 넘어가니까 아주 호구로 보는 거지?”

    “그렇지만 이건 쉽게 볼 일이 아닙니다.”

    펠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랑 왕국이 란진 왕국을 막을 수 있을까?”

    “솔직히 무리입니다. 테오 대공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무관의 마스터라고 불리는데 어떻게 안 될까?”

    수호검 샤이드 대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장에서 에고 기간트의 위력을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말로만 들었지. 직접 싸우는 건 못 봤지.”

    펠레드의 대꾸에 샤이드 대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 황제인 펠레드가 황위에 오른 이후에는 제대로 된 전쟁이 없었다. 샤이드 대공도 에고 기간트를 타고 전투를 치르지 않은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러니 에고 기간트의 전투는 구경도 못 해봤다는 말이 옳았다.

    전쟁이 난다고 해도 실제로 전장에 서지 않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

    샤이드 대공이 아무런 말도 못하자 펠레드가 미소를 지었다.

    “트랑 왕국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가 우습게 보이는 건 못 참겠다.”

    펠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칸트를 돌아보았다.

    “딱 봐도 이번 큰 그림은 신성 교국의 늙은 여우의 짓이 틀림없어.”

    “예. 란진 왕국이 신성 교국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 칠왕국 연합의 뇌속의 창과 환영검의 사이를 생각하면 접점도 없고, 전쟁에 동원할 수 없지. 신성 교국이 움직였다는 얘기야.”

    펠레드의 시선이 샤이드 대공을 향했다.

    “그래서 말인데 광휘의 검 이길 수 있겠어?”

    샤이드 대공은 그 말에 고래를 내저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희대의 천재 검사입니다.”

    “그래서?”

    “지지는 않겠지만, 필승을 장담하지는 못하겠군요.”

    “그럼 견제는 가능하지?”

    “그가 저와 싸우면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좋아. 우리가 정복 전쟁을 할 생각은 없지만, 저것들에게 우리를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칸트와 샤이드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변에서 그냥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확실히 보여줘야지. 빠르게 치고 들어가서 신성 교국의 성 네 개 정도만 가져오자고.”

    신성 교국의 영지가 줄었던 경우는 몇몇 신탁 때문에 무리하다가 주변국들의 역침공에 당해서 그렇지 그들을 먼저 건드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관은 오직 신성 교국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점하고 있는 포션과 신관들 때문에 어지간하면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것만 믿고 그들이 패악질했다면 예전에 사라졌겠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선을 지켜왔다. 신탁을 따르다가 무리했던 몇 번은 다른 왕국에서 참지 못하고 역침공을 해서 국경을 무너트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지를 돌려주고 신전을 개방했다.

    모든 신관이 죽는 한이 있어도 신성 교국은 타협을 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신전들이 모두 철수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가져가는 골드가 신경 쓰였는데 잘 됐군. 만약 신관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성을 더 빼앗도록 하지. 그렇게 하찮은 수는 못 부릴 거다.”

    펠레드의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수작을 부리면 정복 전쟁을 벌이실 겁니까?”

    “그래. 마침 마스터 하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번 붙어보자고. 지금까지 우리가 움츠려 있으니까 전쟁은 무슨 마스터로만 하는 줄 아는가 본데 확실히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펠레드는 이번 기회에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신성 교국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터였다.

    신성 교국을 정복하게 되면 대륙을 정복할 발판이 마련된다. 지금도 신성 교국을 제외하면 제국의 일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왕국이 없다.

    펠레드의 시선이 칸트와 샤이드 대공을 향했다.

    “준비해.”

    단순히 신성 교국의 성을 몇 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움츠려 있던 황제가 일어나고 있다. 멈췄던 바퀴가 다시 구르고 정복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

    칸트와 샤이드 대공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펠레드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등을 떠밀면 앞으로 나아가야지.”

    란진 왕국의 국왕 팔콘은 마주 앉은 숙부 테오 공작을 바라보았다. 테오 공작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왕국의 이름을 건 외교 대신을 협박했다는 건가?”

    “그렇다고 하더군요.”

    테오 공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군.”

    명분을 챙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먼저 건드렸다. 물론 군사를 물리면 그만일 문제이나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니다.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군.”

    하이젤 왕국과 알제리 왕국을 병합하면서 군사력만으로 따지면 인근 왕국 중에서 비교될만한 곳이 없는 곳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가 란진 왕국이었다.

    란진 왕국은 무를 숭상해서 기간트 라이더들도 수준도 일반적인 이들과 다르다. 새 기간트가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무수한 흉터가 있는 기간트가 더 인정받는 곳.

    군사력에서는 차이가 날지 몰라도 이쪽은 마스터도 있고, 경험이 풍부한 기간트 라이더들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도발을 해왔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팔콘이 씨익 웃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요 근래에 마스터들이 제대로 전장에 선 적이 없었던 탓인가 봅니다.”

    “그런가?”

    마스터가 되기 전에는 전장에 서지만 에고 기간트의 주인이 되고 마스터가 되면 전장에 나설 일이 오히려 적어진다. 왕국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라면 주변 왕국들이 알아서 기게 된다.

    마스터가 있는 왕국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과거에 마스터들이 워낙에 저질러 놓은 전설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제는 마스터가 나오면 알아서 조공도 바치고 굽실거린다. 그래서 그런지 마스터는 오히려 전장에 서지 않는다.

    “우습게 보였다는 건가?”

    마스터는 자신의 길을 걸어서 도착하는 지고한 자리다. 적어도 무의 정점에 선 자. 그런 그들의 자존감은 높을 수밖에 없다, 그 자존감이 짓밟혔다는 것을 깨달은 테오 대공은 서늘한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지.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보름. 좋아. 다른 건 몰라도 그 건방진 녀석의 목은 내가 가져오도록 하지.”

    “기왕 가져오는 거 알제리 왕국 영토도 다 가져오죠.”

    “우리 조카. 통이 크군.”

    테오 대공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보름 후에 보지.”

    제이슨은 국왕의 부름을 받고 왕궁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는 카이트 국왕과 벡스 공작, 그리고 아울이 있었다. 제이슨은 펠릭스와 함께 왔다.

    스노우 기사단장이기도 했지만, 두 번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해왔던 펠릭스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이자 아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수정구를 만나서 화면을 띄우더니 말했다.

    “란진 왕국에서 병력의 이동 속도가 크게 올랐습니다. 이 속도라면 국경에 병사들이 배치되는데 앞으로 십 일에서 보름 정도 예상됩니다.”

    “오히려 작정한 것 같군. 우리는 그 시간 내에 이동할 수 있는가?”

    카이트 국왕의 물음에 벡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단호하군. 그럼 어찌 대응할 생각인가?”

    벡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우리가 란진 왕국까지 먹을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못할 것도 없지.”

    카이트 국왕의 대답에 좌중이 살짝 굳어졌을 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힘든데 영토를 더 늘리는 건 생각해 보자고. 그럼 기간트 라이더들만 국경으로 이동할 생각인가?”

    “그럴 생각입니다. 전장을 막는 것만 염두에 두면 그만한 것도 없죠. 게다가 병사들은 오히려 짐이 된다는 걸 그들에게도 알려줄 생각입니다.”

    “흑마법을 쓸 생각인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게다가 딱 보니까 신성 교국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보라고 쓸 겁니다.”

    카이트 국왕은 웃음을 흘리고는 아울을 돌아보았다.

    “정말 신성 교국이 움직인 건가?”

    “광휘의 검과 뇌속의 창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있고 제국이 신성 교국 쪽으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칠왕국 연합은 저번에 한 일이 있으니 그쪽으로는 병력을 보내지 않은 건가?”

    “그런데 신성 교국 쪽으로 움직인 병력이 상당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카이트 국왕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차피 둘 중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수호검의 도움은 받을 수 없겠군.”

    “예.”

    카이트 국왕의 시선이 제이슨을 향했다.

    “벡스 장군에게 자네가 환영검을 맡겠다고 들었네. 맞는가?”

    “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카이트 국왕의 눈에 기이한 열망이 깃들었다.

    “기대되는군.”

    제이슨은 카이트 국왕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 왕국을 거의 통합하다시피 하면서 영토가 배 이상 넓어진 상황. 아무리 제국과 사이가 좋다고 해도 이 정도 했으면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고 기간트를 가져오고 마스터가 생긴다?

    그러면 제국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그때는 제국과 더욱 돈독해지거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그런데 너무 쉽게 믿으시는 것 아니십니까?”

    “자네 말이라면 혼자서 마스터를 다 죽였다고 해도 믿겠네.”

    증거는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벡스나 카이트 국왕이나 자신을 너무 믿는 것 같았다.

    “차라리 테오 공작을 더 자극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테오 공작을 더 자극하자고?”

    “예. 전장에 나선다면 그는 자신의 무위를 뽐내고 싶어 할 겁니다. 기간트를 타고 나올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를 잡아내기만 하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카이트 국왕은 일행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도발은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전쟁은 저들이 먼저 걸어왔으니 박살 내주자고.”

    벡스가 그런 카이트 국왕에게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마스터만 생기면 제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러니 제대로 해보자.”

    벡스가 씨익 웃었다.

    “그럼 병력도 준비시키겠습니다. 우선은 기간트 라이더로 전장을 막아내고 역공을 취하면서 병력이 뒤따라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벡스의 시선이 제이슨을 향했다.

    “이 전쟁의 승패는 네게 달렸다.”

    제이슨은 새삼스럽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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