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압박(3)
안델로프가 탄 엘자르타와의 대결은 제이슨에게 큰 충격을 줬다. 참격을 쓰면 에고 기간트가 부서질 것 같아 그 공격은 쓰지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제법 위험했다.
안델로프의 검술을 그대로 펼치는 에고 기간트는 그 자체로 상당한 위협이 됐다. 왜 에고 기간트를 지닌 마스터를 그리 위협적이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만나면 자신보다 더 위협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존재였다. 자신이 엘하르트를 탔을 때 느꼈던 그 위력을 펼칠 수 있다.
제이슨은 라마란스가 만약 전쟁에서 자신의 기량을 모두 발휘한다면 전보다 훨씬 쉽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도 부릴 수 있다. 이거지?”
“최상위권 명령자는 나지만 너도 언제든 쓸 수 있지. 마음에 드나?”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안델로프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그러니 안델로프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저 잘 써줄 생각일 뿐이다.
제이슨은 라마란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흑색 마탑을 나와 성으로 갔을 때 응접실에 나와 있는 이가 있었다. 요즘 바빠서 얼굴도 못 볼 거로 생각했던 벡스 공작이 그곳에서 펠릭스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이슨은 그 둘을 보고는 자리에 와서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벡스는 차를 마시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펠릭스랑 차 한잔하러 왔다.”
제이슨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헤이튼이 다가와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제이슨은 차향을 즐기며 기다렸다.
벡스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이젤 왕국이 제대로 관리되기도 전에 알제리 왕국을 무너트리면서 영토가 넓어졌다. 군권을 쥐고 있는 벡스가 어찌 시간이 나겠는가?
그가 왔다면 분명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이리라.
제이슨이 조급해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게 있자 벡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란진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트랑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두 왕국은 이제 무너졌고, 란진 왕국과 새롭게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블랙 아울이 이제는 란진 왕국으로 파견 나가 있었고, 제이슨이 데리고 있던 정보 요원들도 그쪽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란진 왕국이 움직인다면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란진 왕국에는 환영검 테오 공작이 있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맞대면서 그쪽과 외교 관계를 개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었지.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일반 병사들이 국경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병사들이요?”
기사단은 언제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일반 병사들이 동원된다. 그들은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기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기에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움직임은 파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움직였다면 그들이 뭔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왜 그러는지는 확인했습니까?”
“외교 대신이 나가 보았지만, 그들은 훈련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댈 뿐이었네. 우리가 따져 물을 수는 없지.”
“테오 대공 때문입니까?”
“그래. 그놈의 빌어먹을 마스터.”
차갑게 투덜거리는 벡스를 보며 제이슨이 물었다.
“그럼 저들이 군사를 모으고 기사단을 워프 게이트로 이동시킨 다음에 국경을 넘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대응해야지.”
“그럼 세게 나가세요.”
담담히 답하는 제이슨을 벡스가 빤히 바라보았다.
“미쳤어?”
“아뇨. 지극히 정상입니다.”
제이슨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상대가 마스터라고 해도 에고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죽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만약 에고 기간트를 불러냈다면 조금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요.”
벡스가 그 말에 제이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무관의 마스터라고 불린다고 해서 마스터가 되는 건 아니야. 에고 기간트가 없어도 마스터는 충분히 강하다.”
“알아요. 그리고 제가 더 강합니다.”
제이슨의 담담한 대답에 벡스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오러 유저를 죽이면서 제이슨의 가치가 크게 올랐다. 그의 실력이 자신보다 윗줄일 수 있겠다 여겼지만, 설마 그가 마스터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건 네가 아직 마스터를 만나보지 않아서 그래.”
제이슨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는 벡스를 바라보았다. 트랑 왕국은 앞으로 신성 교국과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리라. 사도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실은 알려줘야 했다.
“만나봤습니다.”
“네가? 언제?”
“얼마 전에 마스터 하나가 몰래 침투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싸웠고, 그는 죽었습니다.”
펠릭스는 픽 웃음을 흘렸지만, 벡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펠릭스도 웃는 걸 멈추고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마스터 중 누구도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숨기고 있으니까요.”
“누구를 만났는데?”
“광휘의 검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을 들은 벡스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깐. 광휘의 검을 죽였다고?”
“예.”
벡스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네가 이런 일로 농담할 놈은 아니지.”
벡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러니까 그쪽에서 널 먼저 공격했고, 너는 정당방위로 광휘의 검을 죽였다 이거지?”
“예.”
벡스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란진 왕국의 움직임도 이해가 되는군. 신성 교국에서 그들을 움직였고, 자신들이 제국의 움직임을 막아주겠다는 뜻이겠지.”
“란진 왕국 입장에서는 명분은 부족하지만 얻을 것이 많겠군요.”
펠릭스의 대꾸에 벡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들면 그만일 문제지.”
벡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가벼이 볼 문제는 아니다. 제국에서도 너의 실력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렇겠죠.”
자신들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동맹국으로서 대우를 해주는 거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제국에서 먼저 칠 수도 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너는 환영검을 죽이고 그의 에고 기간트를 얻어야만 한다. 무관의 마스터가 아니라 진정한 마스터가 되어야만 하지.”
마스터가 되고 에고 기간트를 갖게 되면 제국도 함부로 그들을 노릴 수 없다. 제국이라고 해도 대륙 전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제이슨은 픽 웃고는 말했다.
“우리가 굽히고 들어가니까 란진 왕국에서도 막 나오는 모양인데 들이받아요. 붙어봐야 아는 거니까요.”
벡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마스터인 테오 대공을 제외하고도 그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무를 숭상하는 란진 왕국은 강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작정하고 싸운다면 그들을 무너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작정한다면 제국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영지 내의 전력이니까.
“좋아. 널 믿고 한 번 붙어보지. 이것들이 굽실거리니까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던데 한 번 들이받아 보마.”
벡스는 오히려 신난 표정이었다. 카이트 국왕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벡스 공작이 나선다면 양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신성 교국의 손에 놀아나면 어떻게 되는지 경종을 두드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신성 교국에서도 더는 함부로 못 할 테니까.
신성 교국이 직접 힘을 행사한다면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그들이 직접 힘을 행사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과의 사이에 있는 왕국들이 길을 열어줄 리 없으니까.
“결과는 또 알려주마.”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벡스도 찻잔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떠났다. 펠릭스는 벡스가 떠난 것을 바라보다가 제이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정말 마스터를 죽인 거냐?”
“예.”
펠릭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이슨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랑 대련하자.”
“괜찮겠어요?”
제이슨이 씨익 웃자 펠릭스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도 해 볼 겸.”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롤로 국왕은 자신의 앞에 온 이를 바라보았다. 신성 교국의 밀사로 온 인물. 신성 교국 내에서 이름 높은 대주교이자 이번에 알제리 왕국의 신전에 파견 나온 대주교였는데 그가 들고 온 이야기는 예상 밖이었다.
“그러니까 란진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건가? 트랑 왕국에게서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되찾는 영토 중 절반을 가지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성 교국에서는 아낌없는 지원을 해줄 생각입니다.”
“아낌없는 지원이란 어떤 것인가?”
“원하는 곳마다 신전을 세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폭적인 골드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롤로 국왕은 밀사로 온 대주교 알페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제리 왕국은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골드를 지원해준다면 마다할 수 없는 상황.
저쪽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제시했다. 란진 왕국이 도움을 주고 테오 대공이 함께 움직인다면 충분히 트랑 왕국을 압박할 수 있다.
“이유를 알고 싶군. 퍼주기만 하는 건 내가 믿지를 못해서.”
롤로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알페이드가 답했다.
“이런 말 들이기 조심스럽지만, 신탁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희가 닿지 않는 상황이라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못해서 이렇게 지원을 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롤로 국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성 교국에게 있어서 신탁이라는 것은 그들이 국운을 걸고 행하는 일. 그 정도라면 이 정도 지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좋소. 받아들이지.”
“고맙습니다.”
외교 대신들이 만나는 자리. 란진 왕국과의 외교 대신과 만나는 자리에 벡스가 참석했다. 트랑 왕국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떠나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무를 숭상하는 란진 왕국의 외교 대신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벡스는 미소를 지은 채 란진 왕국의 외교 대신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크기로만 따지면 트랑 왕국이 란진 왕국보다도 더 큰데 저들의 시선에는 은근한 무시가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벡스는 씨익 웃고는 말했다.
“오늘 이런저런 얘기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할 말은 하고 가야겠소. 바쁜 몸이라서.”
“그러시죠. 직접 이렇게 나오셨다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였을 테니 경청하겠습니다.”
벡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국경 부근에서 병력을 모조리 물리시오.”
“아, 그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왕국이 바뀌었기에 훈련상···.”
“그 훈련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도 국경으로 모든 병력을 동원하겠소.”
“예?”
벡스의 단호한 말에 당황한 외교 대신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국경에 병력을 배치했는데도 불구하고 병력을 물리지 않는다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알겠소.”
벡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이들이 아니오.”
란진 왕국의 외교 대신도 처음에는 듣기만 하다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 벡스가 하는 말은 외교적 수사를 넣지 않은 협박.
그런 말을 듣고 넘길 수는 없었다. 외교 대신은 왕국을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니까.
“무례하군요.”
벡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무례는 너희가 먼저 했지.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병력을 물리지 않으면 좋은 꼴 보기 힘들 거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소?”
벡스의 전신에서 사납게 기세가 일어났다. 수많은 전장에서 지휘관으로 살아온 그가 뿌리는 기세에 외교 대신이 사색이 되었다.
“누가 후회할 것 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