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광휘의 검(1)
제이슨은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갑옷은 그가 신성 교국의 수련행 중인 성기사 후보임을 알려주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가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제이슨의 시선이 카젠을 향했다.
“보자마자 달려들었다고?”
바게트를 뜯어 먹으며 카젠이 발로 툭하고 쓰러진 성기사 후보를 걷어찼다. 움찔 몸을 떠는 것을 보면 확실히 기절한 것 같았다.
“그래. 뭐야 이거?”
“신성 교국의 성기사 후보생.”
“신성 교국?”
라마란스는 에르도의 기억을 훑어서 자신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알아냈지만, 카젠은 아니다. 그는 그동안 굶었던 것을 보충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정말 미친 듯이 먹어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잠만 잘 때는 마나 호흡만으로 버텨왔던 그의 육신이 제대로 섭식을 하면서 점차 과거의 힘을 되찾아간다는 점이었다.
먹어야 강해지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가 힘을 되찾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제이슨은 쓰러진 성기사 후보생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련행 중에 그렇게 무례한 자는 없다고 들었는데?”
신성 교국의 수련행이 대륙에서 통하는 이유는 서로 간의 이해가 맞물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련행을 상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이기든 지든 신성 교국에서는 그 상대에게 호의를 베푼다.
대부분 신성 교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없었다. 제이슨은 그래서 카젠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는 성기사 후보생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왔어?”
“방으로 가는 길에 연무장에 처음 보는 놈이 있기에 궁금해서 나왔던 거지. 이렇게 싸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알았어. 그럼 그만 방으로 가.”
카젠은 흘끔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중요한 녀석인가?”
“너만큼은 아니야. 그러니 그만 들어가 봐.”
“그러지.”
카젠은 정말로 관심을 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젠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분은 누구죠?”
제이슨은 그 물음에 뺨을 긁적였다.
“제 식객입니다.”
밥만 축내고 있으니 식객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이슨의 말을 들은 아이젠은 살짝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굉장한 미남이네요.”
“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엘하르트와 얼굴을 맞대고 살았기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성 안에서 시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카젠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식사 시간에는 순번을 정해서 식당 일을 돕겠다고 시녀들이 나서고 있을 정도일까?
제이슨은 쓰러진 사내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제가 다시 연락 드릴 테니 돌아가 계세요.”
아이젠도 성기사 후보생을 만나보고 싶어서 왔지만, 그가 식객과 싸워서 얻어터져 뻗은 상황에서 괜히 엮이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남아야 할 것 같은데요?”
영지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녀가 말했지만, 제이슨은 고개를 내저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제가 근일 내로 영지로 찾아뵙겠습니다.”
제이슨의 말에 아이젠은 멈칫했다. 거트 공작가로 제이슨이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와 결혼을 하면서 왕족이 되어 후작의 작위를 받기로 내정되어 있던 제이슨은 스스로 힘으로 후작이 되었다.
그러니 거트 공작가에서도 그를 대하는 것에 격식을 차려야 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네요. 잘 해결되기를 바랄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성 교국은 사실 트랑 왕국에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 그들이 파견한 신전들이 트랑 왕국에도 있고,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철수할 수도 있지만,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신성 교국과 트랑 왕국 사이에는 떡하니 제국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신관들을 모두 철수 시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손해다.
제이슨은 성기사 후보생을 데리고 접객용 방에 데려다 놓고는 침대에 눕혔다. 그가 일어나서 또 사고를 치지 않게 하려고 제이슨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제이슨은 편안히 그의 옆에 앉아 오러 심법을 수련했다. 격이 오르면서 오러 홀이 급속도로 커졌기에 오러 심법의 수련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오러 심법을 수련하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성기사 후보생이 작은 신음을 흘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크윽!”
신음을 흘린 그는 자신의 복부에 손을 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손에 빛이 나면서 상처가 회복되는지 표정이 편안해 지고 있었다.
모든 오러 유저들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자들이 성기사라고 하는 이유는 저들의 저 바퀴벌레 같은 회복력에 있었다.
숨을 고른 사내는 눈을 뜨다가 제이슨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누구십니까?”
“제이슨 폰 하르트 후작입니다.”
제이슨이 담담히 자신을 소개하자 사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오른손바닥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련행 중인 마커스입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그보다 제가 만났던 분은 누구십니까?”
제이슨은 멀뚱히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저도 궁금하군요. 저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면서 왜 제 식객에게 먼저 달려드신 겁니까?”
마커스는 그 질문에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
마커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습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 신이 강림한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였으니까요.”
제이슨은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신성 교국의 신이 진짜 신이 아니라는 것은 라마란스에게 들었다. 게다가 인간들에게 있어 신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12사도들이 아닐까?
그들이 창조한 것이 인간이었으니까? 신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그래야 말이 됐다.
그러니 신이 영접했다고 한다면 12사도 중 하나가 마커스의 눈을 빌려서 카젠을 바라보았다는 얘기다. 카젠은 그들에 의해 수감되었던 자.
당연히 발끈해서 달려들었을 수 있었다.
제이슨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12사도 중 하나가 신이고 그가 신성 교국의 신 행세를 하고 있다면 그의 눈에 카젠이 띈 순간 신성 교국과는 좋은 사이가 되기에 글렀다.
“혹시 지금도 그런 느낌이 드십니까?”
“아뇨. 제가 왜 그런 무례를 범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이슨은 자신과 함께 있는 쉐일링은 마커스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하고는 정색했다.
“솔직히 제 손님을 공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무례함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제이슨의 대답을 들은 마커스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련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서로의 존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신성 교국에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말에 마커스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제이슨은 그런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그런 것이라고 하니 정중하게 사과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하죠.”
“제가 직접 그분을 찾아뵙고 사과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커스가 그를 따라 걸었다. 그는 걷는 와중에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제이슨은 슬쩍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하긴 오러 유저로 신성 교국에서 성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행을 하는 마커스라면 자신이 그렇게 무력하게 패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으리라.
“제 손님입니다.”
더 자세한 건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마커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수련행 중에 큰 실수를 했고, 그 실수를 입 다물어 주는 조건이다 보니 제이슨에게는 끽 소리도 못했다.
제이슨은 그를 데리고 카젠의 방을 찾아갔다. 노크하고 사과를 입에 털어 넣고 있던 카젠이 멀뚱히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마커스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커스는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던 제이슨은 뭔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마커스가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아까의 무례를 사과하러 왔어.”
카젠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마커스에게 다가왔다. 마커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마커스가 천천히 일어나자 카젠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누구냐?”
“마커스라고 합니다.”
“아니. 육체의 주인 이름 말고.”
마커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카젠은 남은 사과를 입에 쏙 집어넣어 씨까지 씹어먹으며 말했다.
“사도 중 누구냐고.”
마커스는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옥이 부서진 것은 느꼈지만, 정말로 나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아까 시험해 본 거야? 고작 그런 육체로?”
“오만한 건 여전하구나. 드래곤의 사생아.”
카젠이 이를 드러내기에 제이슨이 그를 말렸다.
“참아. 죽이면 일이 곤란해져.”
“알게 뭐야.”
“네 말대로라면 사도라고 할지라도 실체도 아니잖아.”
“그래. 하지만 이렇게 몸을 빌렸을 때 죽이면 피해를 입는 것도 사실이지.”
마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이를 죽이면 그때는 뒷감당할 자신은 있고?”
카젠이 손을 내밀자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가 더 날아와 그 손에 잡혔다. 카젠은 사과를 와삭 씹어먹으며 말했다.
“왜? 못할 것 같아? 신성 교국인가 하는 것 모조리 박살 내줄까?”
마커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카젠은 그런 마커스의 목을 틀어쥐고는 으르렁거렸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겠지만, 딱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한 카젠이 그대로 마커스의 목을 비틀려고 하는 것을 제이슨이 말렸다. 카젠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왜? 쫄리냐?”
제이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라마란스에게 한 말이 아닌가?
어차피 사도들을 상대하기로 했고, 자신의 곁에는 왕국 파괴범들이 셋이나 있다. 하나일 때보다 둘이 낫고, 셋은 더 무서운 것이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데리고 신성 교국을 무너트리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리고 자신은 모든 인간의 적이 되겠지.
“아니.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사도를 상대하지는 않을 거야.”
제이슨의 대답을 들은 카젠은 픽 웃더니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마커스에게 박치기를 날렸다. 마커스는 죽지 않았지만, 그대로 혼절했다.
카젠이 마커스를 바닥에 던지고는 말했다.
“신성 교국이라는 것을 세워 인간들에게 통제하고 있다면 아마도 엘드라고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주 악랄한 놈이지. 인간을 고기 방패로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그런 자.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지껄였던 것 같은데.”
“그런 자가 지금 너를 봤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 곧 놈이 움직일 거야.”
사도는 모이면 신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 신의 행세를 하는 자가 인간을 갈아 넣겠다고 각오를 한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재수 없게 걸렸군.”
제대로 힘을 키운 다음에 만나려고 했는데 일이 항상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