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78화 (79/151)
  • 【78】 전조(3)

    알제리 왕국의 수도 함락 이후에 전면적인 항복과 함께 롤로 공작이 새로운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의 보호 마법진을 부숴준 덕분에 손쉽게 함락했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롤로 공작은 국왕에 올라서는 놀라운 장악력으로 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숨에 무너질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그들은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제리 왕국의 영토 중 7할이 트랑 왕국에 예속되었다. 제국은 1할의 영토를 가져갔고 남은 것은 고작 2할의 영토. 왕국의 크기라고 보기보다는 어지간한 공국보다도 작은 크기가 되었지만, 왕국의 이름은 남길 수 있었다.

    트랑 왕국의 어떤 왕보다도 넓은 영토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카이트 국왕은 살아생전에 할 수 있는 업적을 모두 채웠다고 할 만했다.

    제국을 제외하고는 이번에 알제리 왕국을 얻으면서 국경이 맞닿은 곳은 란진 왕국이었다. 하지만 란진 왕국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란진 왕국의 현 국왕의 숙부인 테오가 마스터로 란진 왕국과 제국 사이에 공국을 가지고 있으니 란진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가는 마스터가 움직인다.

    그러니 그들과 싸울 이유는 없었다.

    지금 트랑 왕국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됐다.

    그런 만큼 이번 승전 축하파티는 무려 7일에 걸쳐 열렸으며 왕국의 모든 귀족이 왕궁으로 모였다. 그들은 드넓어진 영토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카이트 국왕에게 잘 보여야 했다.

    영토가 넓어졌다는 건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이권이 있다는 얘기였기에 그들은 갖가지 선물을 들고 왕궁으로 찾아왔고, 어떻게든 자신의 끈을 카이트 국왕에게 대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7일의 축하파티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의 아내들을 치장시키고 그녀들에게 왕궁에 와서 잘 처신하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하고 왔다.

    그렇게 축하파티 첫날에 왕궁의 귀족들이 모인 곳은 별빛 정원이었다.

    파티가 시작할 때쯤에는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감히 카이트 국왕이 주최한 축하파티에 늦을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모인 귀족들은 서로 아는 이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어떻게 하면 알제리 왕국에서 나오는 이권에 한 발 끼워 넣을 수 있을지를 얘기 나누기 바빴다.

    이권 하나를 따내는 것만으로 전보다 더 많은 이권을 얻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들 또한 자신들의 경쟁자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에 들어오는 인물들을 보고는 이야기를 멈췄다.

    장내에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은 멈추지 않았지만, 말소리가 모두 사라진 장내는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저 사람이 마갑의 기사인가?”

    “아이젠 공주와 약혼한다던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번 왕가에 가장 큰 공을 새운 이라지?”

    사람들의 시선에 뜨거운 열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카이트 국왕과도 독대하는 전쟁 영웅. 그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이번에 이권을 따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 동안 숱한 오러 유저들을 죽여 명실공히 왕국 제일검으로 떠오른 제이슨에게 감히 말을 붙일 엄두를 내는 귀족들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들어온 아이젠 공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거트 공작가의 딸로 그 위세가 제이슨 못지않았다.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던 그녀는 그간 친하게 지낸 이들이 있었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로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트레버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클라이가 들어섰다.

    조안나와 로크, 캐리도 이번에는 왕궁의 정중한 초대를 받았다. 그런 그들까지 함께 들어서자 귀족들의 눈이 빛났다.

    지금 들어오는 이들이 제이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았고, 제이슨에게는 비벼보기 힘들어도 저들이라면 달랐다. 그중 젊은 귀족들은 조안나를 보고 눈을 빛냈고, 귀족가의 영애들은 클라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중앙 정계의 사교계는 지방의 사교계와는 달랐다. 그들의 눈빛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의 것이 되었다.

    제이슨은 그들의 시선을 보고는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즐거운 시간들 보내세요.”

    “하하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도 볼일 보렴.”

    “축하파티인데 즐겨야죠. 볼일은 무슨 볼일입니까.”

    태연하게 대꾸하는 제이슨의 말에 트레버가 웃음을 터트렸고, 일행은 흩어졌다. 로크는 조안나를 데리고 왕궁의 요리가 만든 요리 중에서 맛보여주고 싶은 음식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로크는 조안나보다는 왕궁이 익숙해서 그녀의 안내를 자처했다.

    그리고 클라이는 캐리와 함께 움직였다. 제이슨은 그 둘이 움직이는 모습에 조금 의아함을 느꼈지만, 캐리가 클라이를 돌보는데 신경 쓰는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호시탐탐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눈을 반짝이는 귀족들을 보았지만, 제이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 호되게 당했다고 해도 아버지도 깨달은 것이 있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선을 넘는 자들이 나온다면 그때 자신이 나서도 충분했다.

    제이슨은 별빛 정원 안으로 들어와서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손을 내밀었다. 제이슨이 내민 손을 보고 아이젠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먼저 찾아가서 말한 이후로 제이슨이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하면 주변도 돌아보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그건 차차 고쳐질 문제였다.

    지금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었다.

    아이젠이 제이슨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 사람들이 분분히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제이슨은 마치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하지만 사실 제이슨의 춤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해야 했을 만큼 춤이랑은 관련 없이 살아왔으니까.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제이슨이 아이젠과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펠릭스가 엘레나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

    제이슨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가자 펠릭스가 씨익 웃으며 그를 반겼다.

    “춤 잘 추던데?”

    “멀쩡한가 봅니다.”

    “기간트는 반파 됐지만 나야 멀쩡하지.”

    제이슨은 펠릭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군을 위해서 선두에 나서서 싸워왔던 펠릭스는 그 고집이 대단했다. 눈빛만 봐도 그 고집과 독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니 뭔가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 편안해 보이는 눈빛에 오히려 제이슨이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펠릭스는 제이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그보다 뭔가 얻은 것이 있느냐?”

    제이슨은 그 물음에 씨익 웃었다. 펠릭스가 전쟁에서 복수를 이루고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듯 제이슨도 마스터로 가는 길을 알아냈다.

    오러 유저들과 싸울 때와는 또 다른 경지를 밟았고 오러 홀의 크기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제이슨의 미소를 보고 펠릭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련을 위해서 전쟁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했을 때 마스터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음을 알았기에 그 한 걸음이라도 걸으라고 보내준 것이었다.

    그런데 제이슨은 정말로 뭔가 얻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펠릭스는 마음을 굳혔다.

    제이슨이 정말로 마스터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면 자신의 몸을 그에게 의탁해 보겠다고. 하지만 그건 천천히 이야기해 볼 문제였다.

    그때 음악이 바뀌며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적법한 트랑 왕국의 주인이신 카이트 폰 트랑 국왕 전하가 입장하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별빛 정원에 들어올 수 있는 계단 위로 카이트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 벡스가 서 있었는데 그의 뒤를 따라오는 시종의 손에 들린 것은 알제리 왕국의 전 국왕의 수급이었다.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만큼 골이 깊었던 사이였으니까. 특히 동부 전선 인근의 귀족들은 동부 전선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복수에 미쳐 날뛰었었다.

    서로 물고 물리던 곳이 벡스가 동부 전선 사령관이 되면서 고착화되었다. 그곳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게 되었기에 동부의 귀족들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던 그들이었기에 알제리 왕국의 전 국왕의 수급을 보고는 모두 주먹을 움켜쥔 채 격동하고 있었다.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병력만 지원했던 귀족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존재였으니까.

    카이트 국왕도 그것을 알았기에 승전 축하파티에 그의 수급을 직접 가지고 온 것이었다. 원통하다는 듯 일그러진 그의 수급을 바라보던 카이트 국왕이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왕국의 동부를 어지럽히던 알제리 왕국과의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군비 경쟁이라고 할 만큼 많은 돈을 들어먹던 곳이 동부 전선이었다. 전대 국왕도 벡스를 동부 전선 사령관으로 앉힐 만큼 알제리 왕국과의 일에 신경을 썼었다.

    그런 알제리 왕국과의 전쟁이 사실상 끝을 봤다. 이름만 남겨 놓았을 뿐 알제리 왕국은 사실상 완전한 항복을 한 셈이다.

    카이트 국왕이 손짓하자 수급이 치워졌다. 카이트 국왕은 옆에 선 벡스의 손을 잡고는 소리쳤다.

    “그 전쟁의 주역들을 소개하겠다. 벡스 전군 총사령관은 이번 수도 함락의 공을 인정해 공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왕국에 딱 셋 있는 공작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왕족이 아니면서 순수하게 공만으로 공작의 작위까지 올라온 것은 역사를 통틀어도 벡스가 처음이었다.

    모든 이들이 손뼉을 치면서 벡스가 공작위를 받은 것에 축하했다. 전군 총사령관인 그는 이제 권력과 군사력 모두를 손에 넣었다.

    그만큼 카이트 국왕이 그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트 국왕은 손을 들어 좌중을 가리켰다. 모두가 그 손짓을 따라 움직이자 그곳에는 제이슨과 아이젠이 있었다.

    “제이슨 폰 하르트 백작. 이리 올라오게.”

    제이슨이 아이젠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걸음을 옮겨 카이트 국왕의 옆에 섰다. 카이트 국왕은 제이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그리고 동부 전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쟁의 승기를 가져 온 제이슨 폰 하르트 백작에게는 후작의 작위를 내린다.”

    왕궁 제일 검인 것은 상관없었다. 공작의 작위를 벡스가 받은 것도 파격이었는데 제이슨이 후작의 작위까지 받았다. 카이트 국왕이 신상필벌이 확실하다는 얘기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아이젠을 향했다. 거트 공작가의 그녀는 왕족 중 하나로 그녀와의 약혼을 통해서 후작의 작위를 받을 거로 여겼던 제이슨이 홀로 공을 인정받아 후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아이젠은 오히려 잘됐다고 여겼다. 스스로의 힘으로 작위를 얻은 이와 결혼을 통해서 왕족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모든 귀족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카이트 국왕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이젠. 이리 올라오시오.”

    아이젠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올라오자 카이트 국왕이 제이슨을 보고는 윙크를 했다. 그렇게 눈인사를 한 카이트 국왕은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승전 축하파티라 왕국의 모든 귀족이 참석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카이트 국왕이 입을 열었다.

    “제이슨 폰 하르트 후작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에게 이곳 별빛 정원에서 약혼식을 치르게 해주겠다고 했지. 제이슨 후작은 직접 나를 찾아와 약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했고, 왕국의 모든 귀족이 모인 이곳에서 약혼을 치르고 싶다고 하더군. 이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말이지.”

    아이젠의 눈이 커졌을 때 제이슨은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반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이젠 공주님. 저와 약혼해 주시겠습니까?”

    아이젠 공주는 제이슨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왕국의 모든 귀족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그들 눈에는 질투와 시기도 서려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은 부러워하고 있었다. 특히 왕국의 귀부인들은 모두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만큼 축복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이젠은 제이슨이 내민 반지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겠어요.”

    그곳에 모인 모든 귀족이 마음이야 어떻든 축하의 말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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