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전조(2)
일찍 돌아왔지만, 제이슨의 귀환에 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동부 전선의 전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제이슨은 로크와 함께 돌아왔다.
살짝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지만, 아울의 평가로도 저항은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저항은 없었다. 게다가 롤로 공작과의 교섭도 잘 돼 간다고 했으니 그런 곳에 발목이 잡히는 것보다는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번에 얻은 황금의 창도 하나 얻어 올 수 있었다. 알제리 왕국이 그동안 만들었던 신무기. 엘하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고대의 무기를 조금 더 개발한 것. 하지만 개발할 여지는 더 있었다.
항마력을 지닌 진금 덕분에 성의 보호막을 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성을 뚫었을 때 폭발하는 마법을 넣었는데 만약 그곳에 흑마법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포이즌 마법도 괜찮고,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을 넣어도 좋다. 그렇게 되면 성 하나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창 몇 개만 있어도 된다.
기간트가 동원되기 전에는 막을 수 없는 최악의 공격이 될 수도 있는 무기.
그래서 제이슨은 로크에게 그것을 이용해서 흑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로크는 캐리와 조안나를 데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에르도가 온다면 그도 이 연구에 동참하게 되리라.
그 일을 처리하고 제이슨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다. 자신의 수련이 부족했기에 이번에도 그리 고생했다. 알제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엘렌을 혹시 만나기라도 했다면 위험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만큼 마지막에는 지치고 힘들었으니까.
제이슨은 이번에 얻은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이 참격을 몇 번이나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엘하르트가 보여주었던 검도 익혀야 했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러 홀도 키워야 했다. 그 와중에 신의 의지를 찾기 위해 수많은 고대 던전도 찾아봐야 했다.
영지로 돌아온 제이슨은 영지에 머무는 동안 짬을 내서 기사단의 인원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제이슨이 이번에 나가서 얼마나 대단한 공을 세웠는지 들었기에 가르침을 받는 것에 집중했다.
그들을 일일이 봐준 제이슨은 역시나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라오는 것은 루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오러 유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제이슨은 그 외의 모든 시간을 들여서 수련에 매진했다. 잠깐이지만 현신할 수 있게 된 엘하르트와 베제트를 입고 대련을 시작했다.
베제트를 입으면 그 순간 제이슨은 운명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지금까지는 그것이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엘하르트와 싸우니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지만, 아직 멀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전처럼 결과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제야 합을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다섯 합을 넘기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것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확히 열합을 겨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제이슨은 알 수 있었다.
오러 심법을 수련하는 것만으로 성장하지 않았던 오러 홀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고, 이런 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엘하르트와의 대련에서 지쳐 바닥에 쓰러진 제이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대련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오러가 늘어날 수 있는 거지?”
-단순히 오러 심법만으로 마스터들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들었어. 하지만 그것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넌 아직 마스터는 아니지만 조금씩 운명을 엿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런 만큼 이 시대의 마스터들과는 다른 방면으로 진실한 마스터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지. 네 몸은 네 수준에 맞춰서 강해지는 중이야.
“그 말은 이대로 대련만 해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건가?”
-아니. 정확하게는 베제트를 벗고서도 네가 이 수준을 엿볼 수 있어야 해.
제이슨은 그 말에 베제트를 역소환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런 식으로도 수련해야겠네.”
제이슨이 일어나자 엘하르트는 양팔을 벌렸다.
“얼마든지 와라.”
제이슨이 달려들었고, 엘하르트는 검을 휘둘렀다. 제이슨의 검이 그런 엘하르트의 검을 막았다.
쩌엉!
둘의 검이 교차한 순간 제이슨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제는 베제트를 벗고도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엘하르트처럼 운명을 엿볼 수 있는 수준의 검을 펼치게 되었다는 것을.
베제트를 소환한 채 수많은 오러 유저를 쓰러트리며 성장했던 제이슨은 확실히 전에 비해 성장해 있었다. 단 한 합일 지라도 엘하르트의 일격을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렀다. 다음 일격에 복부를 맞고 쓰러져야 했으니까.
제이슨은 바닥에 쓰러진 채 간신히 숨을 골랐다.
엘하르트는 그런 제이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계다. 다음에 또 보지.
엘하르트가 사라지자 제이슨은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신의 의지를 찾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어 보였다.
자신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엘하르트의 존재는 필수였으니까.
제이슨이 바닥에 누워서 숨을 고르는데 연무장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이젠이었다. 제이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미소 지은 채 다가왔다.
“수련 중이시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돌아와서도 연락 안 하신 거죠?”
제이슨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제이슨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찻주전자에 직접 차를 우려내는 것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젠은 제이슨이 동부 전선의 전투에서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자신을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이슨은 곧장 영지로 돌아와서는 영지를 돌보기 바빴다.
제대로 된 영주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 옳지만 이미 카이트 국왕이 약혼 발표까지 한 사인데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서운했다.
제이슨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고는 그 앞에 앉았다. 가만히 차를 즐기는 그녀를 바라보던 제이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이젠은 가만히 제이슨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다렸어요.”
그 말에 제이슨은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그녀가 승리를 기원했지만,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 전쟁에서 이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적들이 성을 내주면서 빠르게 진격이 되는 것을 보고는 전쟁이 끝났을 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다. 영주로서 해야 할 일도 제쳐놓고 수련에 매진했다. 마스터로 갈 수 있는 길을 이제는 어렴풋이 잡게 된 상황.
하지만 시간을 내려고 하면 낼 수도 있었다. 그저 그녀에 대한 생각을 못 하고 수련에 집중했을 뿐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사과를 듣고자 찾아온 것은 아니에요. 수련장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기사단을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예 이곳에서 지낸다고 들었으니까요.”
제이슨이 어색한 미소를 짓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기사단장은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을 체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걱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불쑥 찾아왔어요.”
아이젠은 찻잔을 만지며 물었다.
“실례가 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번에 나아갈 길이 보여서 그것에 집중하느라 그랬습니다.”
아이젠은 그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제이슨이 세운 공에 대해서는 들었다. 홀로 쓰러트린 오러 유저만 해도 넷이었고, 쓰러트린 적군의 기간트로 산을 쌓았다고 했다.
오러 유저들 중에서 손에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마갑의 기사라는 이름으로 대륙 서부에서 그 이름이 드높아지고 있었다.
에고 기간트의 주인들이 그대로 있으니 마스터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도 그런 이들이 역사 속에는 있었다. 마스터의 수준에 올랐지만, 에고 기간트가 없어서 무관의 마스터라고 불리던 이들이.
제이슨이 그 수준에 다가가고 있다면 자신이 찾아온 것 자체가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일.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이 놓이네요.”
제이슨이 미소를 짓는 사이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연무장 문이 벌컥 열렸다. 제이슨이 수련하는 동안은 연무장에는 아무나 찾아올 수 없었다.
특히 조심했었는데 지금 소란스럽게 달려오는 것이 누군가 싶었다.
“형!”
안으로 들어온 것은 로크였다. 로크는 아이젠을 발견하고는 흠칫 하더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도 계셨군요.”
“반가워요.”
로크가 어떤 이인지는 이미 익히 들어왔다. 제이슨이 군부에서 데리고 온 흑마도공학자. 제이슨의 영지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기에 그녀도 그에 대해서 들었다.
제이슨은 로크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올 일이 뭔가 싶어서 바라보았다.
“수도 함락했대요! 국왕의 수급을 가지고 복귀 중이래요!”
“대장은?”
“무사하대요!”
제이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사령관과 대장이 알제리 왕국과의 어떤 원한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번 전쟁에서 국왕의 수급을 노릴 거라는 것도 짐작했다.
수도 공격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돌아온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도 있었지만, 그것을 떠나서 벡스와 펠릭스를 생각해서 물러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은 무사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로크가 들고 온 승전보에 제이슨의 입가에도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행이다.”
제이슨은 사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자신의 수련도 수련이었지만, 약혼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는 약혼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제이슨이 아이젠을 돌아보며 말했다.
“곧 승전 축하파티가 열리겠네요.”
아이젠은 그 말에 제이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전 축하파티 때 함께할까요?”
아직 이야기가 없지만, 승전 축하파티는 안 열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앙숙이던 알제리 왕국의 수도를 함락한 대승을 거둔 지금이라면.
그리고 그곳에서 두 번째로 큰 공을 세운 것이 제이슨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동부 전선에서 대패하지 않았다면 알제리 왕국이 그리 쉬이 무너질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제이슨의 파트너로 승전 축하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이젠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카이트 국왕은 자신을 직접 찾아온 제이슨에게 차를 내줬다.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제이슨은 국왕과의 독대가 자연스러워졌다.
제이슨이 왔다고 하면 카이트 국왕이 열 일 제쳐놓고 그를 부르기도 했으니까.
카이트 국왕이 국왕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고 하이젤 왕국과의 전쟁, 알제리 왕국과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니 그와의 만남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나?”
제이슨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꺼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게. 뭐든 들어주지.”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카이트 국왕을 보고 제이슨은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