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76화 (77/151)
  • 【76】 전조(1)

    단 한 번의 전투였지만, 그 전투에서 보여준 신무기인 황금의 창과 그걸 쏠 수 있는 거대 포탑을 얻었다. 게다가 적군 총사령관 바젤란을 비롯해서 그들이 보유한 오러 유저들 대부분이 죽어 나간 상황.

    알제리 왕국은 그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동부 전선에서 크게 밀려났고,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자 했으나 트랑 왕국군의 공세는 거침없었다.

    그래도 전처럼 약탈은 없었다. 귀족의 성만 탈탈 털어냈을 뿐 일반 영지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그것은 카이트 국왕의 명령이었다.

    전쟁을 수행함에 이번에는 양국이 끝을 보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백성들은 거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의 창고만 깨끗하게 비우라고 지시했다.

    그 덕분에 귀족들은 어떻게든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아공간 주머니에 담을 수 없는 부분은 놓고 가야 했고, 그런 부분은 깔끔하게 수거하면서 진격의 속도를 높였다.

    대부분 기사단을 내주었기 때문인지 알제리 왕국은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도 못 하고 왕성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병력과 골드를 가지고 모두 왕성에 모였다.

    그렇게 최후의 저항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귀족들 덕분에 백성들은 오히려 트랑 왕국의 편을 들었다. 귀족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한 재산 챙기고 도망친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약탈과 살인을 해왔던 전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갔으니 그들에 대한 원망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트랑 왕국군은 그들을 약탈하지 않으면서 굳이 그들을 점령하지 않고 깃발만 꽂고 갔음에도 반란군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격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적어도 왕궁 앞에서 적들을 만나는 데까지 반년은 걸릴 거라는 예상을 깨고 고작 한 달 만에 진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병력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기간트 라이더만 데리고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왕궁까지 진격한 기간트들은 전보다 더 수가 늘어나 있었다.

    트랑 왕국의 귀족 중에서도 이번 전쟁의 승리가 굳어지는 것을 보이자 아낌없이 지원해준 것도 있지만, 하이젤 왕국에서도 병력을 더 지원했다.

    그뿐이 아니라 제국에서도 알제리 왕국 국경에 주둔 중이던 병력을 지원해줬다. 어차피 이쪽에 상시 주둔 중이던 병력을 내준 것이었지만, 그 인원도 상당했다.

    수도를 둘러싸고 전투 준비를 마친 곳의 막사에서 벡스는 자신을 찾아온 인물을 바라보았다. 장대한 체구에 하얀 수염의 사내.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벡스가 정중히 대꾸하는 모습에 롤로 공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덕분에 풀려난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군.”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었죠. 그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롤로 공작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내가 내줄 수 있는 것은 수도의 방어 마법을 무효화 하는 것이네. 그럼 자네는 무엇을 내줄 건가?”

    “수도는 내줘야 합니다. 하지만 왕국의 이름은 지킬 수 있게 해 드리죠.”

    “성 몇 개 던져주고 왕국이라고 부를 거라면 차라리 포기하겠네.”

    롤로 공작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벡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넸다.

    “전하께서 결정하신 내용입니다.”

    서류를 펼쳐 본 롤로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선공을 취하고도 패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양국 간의 적의를 생각하면 이 정도나 양보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이건 제국 쪽에 몰려 있는 걸 보아 제국을 막으라고 내준 건가?”

    “전하의 뜻까지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최종 결정된 사안입니다. 받으시지 않겠다면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롤로 공작은 말없이 벡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끌고 온 병력을 생각하고, 하이젤 왕국에서 나온 신무기를 떠올린다면 저들은 굳이 이렇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었다.

    저들이 이만큼이나 배려해 주는 것은 제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일 터. 가만두면 왕국은 찢길 터였다.

    “받아들이겠네.”

    벡스가 옆에 놓인 단검을 내밀었다. 단순한 서류가 아니라 마법적인 서약서. 롤로 공작이 엄지에 상처를 내고는 서약서에 핏방울을 떨어트리자 그곳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벡스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내일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 부탁드리죠.”

    “그렇게 하지.”

    롤로 공작과의 계약은 그가 수도의 보호 마법진을 해제했을 때 성립되는 것이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수도에 이미 들어가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스스로 수도의 보호 마법진을 해제한다는 것은 항복의 다른 말이나 다름없었다.

    롤로 공작이 왕권을 쥔다고 해도 그때는 지금과 같은 인기는 얻지 못할 터였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대로겠지만, 적국인 트랑 왕국에게 스스로 문을 열어줬다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테니까.

    솔직히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음에도 카이트가 롤로 공작에게 기회를 준 것은 그런 저의도 깔려있었다. 반란군의 수장이 되게 하느니 그에게 왕권을 주는 것. 어차피 그의 지지기반이 약해진 후일 테니 차라리 그것이 나은 방법이라 여긴 것이었다.

    벡스는 막사에서 롤로 공작이 텔레포트 아티펙트로 떠나는 것을 보고는 막사 밖으로 나와 저 멀리 수도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오리라 여겼지만, 실제로 이날을 맞이하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벡스의 뒤로 펠릭스가 다가와 섰다. 벡스는 그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수리는 끝났나?”

    “최우선 수리 사항이었으니까 끝났습니다.”

    알제리 왕국의 국토를 지나오는 길이 거의 무혈입성이라고 할 만했다. 영지에 들러 귀족들의 성을 턴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을 정도였다.

    하이젤 왕국처럼 수도를 개방하는 일은 없었다. 롤로 공작도 문을 열기만 할 뿐 결국 왕의 목을 따는 것은 이들이 직접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누군가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는 이들이었다.

    “제이슨이 빠져준 것이 다행인 건가?”

    “녀석이야 원한이 없었으니 그것이 맞는 거겠죠.”

    벡스는 펠릭스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뭘 할 생각이냐?”

    “군부에 남아서는 할 일도 없으니 은퇴도 생각 중입니다.”

    돈이라면 넘치게 벌었고, 그가 부족한 것은 없었다. 벡스가 빤히 바라보자 펠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이슨이 자신의 영지에 기사단장 자리를 내준다고 하더군요. 골드도 많이 준다고 하니 거기 가서 자리나 차지하고 있을까 생각 중입니다.”

    벡스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 자리 탐나는군.”

    만약 제이슨이 마스터가 된다면 그때는 그에게 배울 것도 있을 수 있었다. 벡스가 오러 유저들 중에서는 손에 꼽는 강자이기는 했지만, 요즘 제이슨을 보면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러 유저 학살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설마 기사단 하나만 만들겠습니까? 자리야 만들어 주겠죠.”

    “사령관 자리는 내려놓을 수 없으니 아쉽군.”

    왕국 총사령관이 자리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제이슨이야 그 자리를 탐내지도 않으니 불러 앉힐 수도 없었고, 펠릭스마저 이번 전투를 마지막으로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 같으니 자신마저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내일 해가 지면 공격이니 그렇게 알게. 롤로 공작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잊지 말고.”

    펠릭스는 말없이 알제리 왕국의 수도를 두 눈에 담았다. 복수의 끝이 다가왔다.

    마주한 상대를 보고 검은 피부에 거검을 든 사내가 입을 열었다.

    “누구기에 내 앞을 막는 거냐?”

    여인이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검은 늑대 판톤. S급 용병으로 홀로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지.”

    “알면서도 내 앞을 막은 거냐?”

    판톤이 자세를 잡자 여인의 앞으로 금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의뢰라면 골드를 지불 해.”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의뢰다. 대가는 네 목숨.”

    “웃기는 놈들이군.”

    판톤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달려들며 검을 내리쳤다. 오러 유저인 판톤의 거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는 단숨에 상대를 조각내겠다는 듯 거침없었다.

    쩌엉!

    그런데 사내가 꺼낸 검이 판톤의 거검을 받아냈다. 판톤의 인상이 굳어지자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엘페린.”

    판톤은 자신의 앞을 막은 자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검을 이렇게 쉽게 받아내는 자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리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판톤은 뒤로 물러난 후에 숨을 골랐다.

    “대화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군.”

    판톤의 전신에서 거센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페린이 씨익 웃었다.

    “잔챙이는 아닌가 봐?”

    그 얼굴 어디에도 긴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판톤이 먼저 달려들어 내리치는 거검을 엘페린은 그대로 받아냈다.

    쩌엉!

    호리호리한 체격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엘페린은 판톤과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죽이면 안 되겠지?”

    “우리 계획에 필요해. 죽이지는 마.”

    엘페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들었지? 운이 좋네.”

    판톤은 자신의 검을 가르고 들어오는 엘페린의 검을 보면서 눈이 커졌다. 오러로 감싼 검이 잘려나가는 기현상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반으로 잘린 거검. 그리고 엘페린의 검은 판톤의 목에 겨눠졌다.

    “이제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됐나?”

    “웃기는 소리 하지마!”

    검이 잘렸다고 포기할 거라면 S등급 용병이 되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무기를 잃어도 그는 오러 유저이자 히어로급 기간트 라이더였으니까.

    판톤이 엘페린의 가슴을 박차고 뒤로 훌쩍 뛰어오르며 자신의 기간트를 소환했다. 판톤의 기간트 벨루다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 탑승한 판톤이 적들을 짓밟기 위해서 무기를 꺼내 들 때 그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앞으로 9미터에 달하는 기간트가 서 있었다. 판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붉은색의 기간트가 내려다보았다.

    판톤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스터였나?”

    에고 기간트를 지닌 마스터라면 아무리 기를 써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스터가 이렇게 홀로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이미 대륙의 모든 마스터는 각 왕국에서 공작위 이상을 받은 채 살고 있으니까. 이렇게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계속할까?”

    엘페린의 목소리에 판톤은 이를 악물고는 벨루다를 역소환했다. 판톤이 내려서자 그의 앞으로 여인이 다가왔다.

    “이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건가?”

    판톤은 자신이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에고 기간트가 사라지고 엘페린도 여인의 뒤에 선 것을 보고 판톤이 물었다.

    “의뢰라고?”

    “그래. 의뢰.”

    “들어보지.”

    여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지금 대륙에 있던 3대 드래곤 용병단이 모두 사라졌다는 건 알아?”

    “하이젤 왕국과 알제리 왕국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끝장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레드 드래곤은 잘 모르겠군.”

    “그들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야. 그래서 말인데 네 이름을 빌려서 용병단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내 이름을 빌려 용병단을 만들겠다고?”

    “그래. 블랙 드래곤 용병단. 어때?”

    “미쳤군. 그게 얼마나 많은 골드가 들어가는 일인지 알고 하는 얘긴가?”

    여인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넌 이름만 빌려주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지.”

    “싫다면?”

    “그럼 널 죽이고 네 행세를 해야겠지.”

    말을 마친 여인이 판톤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판톤의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래?”

    판톤은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알았다. 이들은 자신을 죽일 수도, 자신을 대체할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따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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