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75화 (76/151)

【75】 망치와 모루(4)

총사령관이 죽고, 적들을 몰아친다면 그것만으로 승부는 났다고 봐도 좋았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더는 싸울 수 없으니 항복할만한 상황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오러 유저들도 거의 제이슨의 손에 죽었으니 평상시라면 항복할 상황이었지만, 알제리 왕국은 오랜 시간 트랑 왕국과의 전쟁으로 서로 간에 쌓인 적의가 만만치 않았다.

항복이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그들의 거센 저항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는 총사령관 바젤란을 죽인 제이슨을 죽이기 위한 본진의 공격도 거셌다.

마치 죽더라도 너는 죽이고 말겠다는 듯 펼치는 거센 공세.

제이슨은 아공간 주머니에 바젤란의 머리를 넣고는 검을 들었다. 돌격대가 모였다고 하지만 오러 유저 셋에 나이트급 기간트 여섯, 워리어급 기간트 열넷이 전부였다.

성까지 물러난다면 모루의 역할을 해서 적들을 분쇄할 수 있을 테지만 너무 깊이 들어왔다.

제이슨은 최대한 오러를 아끼며 적들을 쓰러트렸다. 대부분의 공격은 피했지만, 피하지 못하는 공격은 흘려 맞으려고 했는데 그럴 때는 보호의 망토가 움직였다.

제이슨은 오러 홀의 회복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만 오러로 검을 감쌌다. 그것도 검극에만 감싸서 관통력만을 얻어 오직 찌르기만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신장이 거의 두 배 차이가 나다 보니 엄청나게 뛰어다녀야 했지만, 오러 유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제이슨의 체력은 그 정도에 무너지지 않았다.

제이슨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참격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장도 2미터인 그가 쓰러트릴 수 있는 적은 한계가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한 자리에서 쓰러트린 적군 기간트만 해도 서른 기가 다 되어 가는 만큼 적들도 이제는 기가 질리고 있었다.

아무리 눈이 뒤집혀 상대를 죽이고자 해도 이미 제이슨과 돌격대의 주위로 쓰러진 기간트가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 산을 넘어 공격하는 것도 일이었는데 그렇게 다가왔을 때는 제이슨의 검과 펠릭스의 도끼가 그들을 맞이했다.

제이슨은 그나마 보호의 망토를 얻고 나서는 작은 피해도 보지 않았지만, 펠릭스와 엘레나의 기간트는 적들의 파도를 헤쳐나가면서 만신창이가 됐다.

돌격대도 이제 운신 가능한 인원은 고작 일곱. 그 많던 인원이 이렇게 줄었다.

제이슨은 기간트의 산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감히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적들의 뒤로 어느새 벡스가 이끌던 본진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지휘관이 죽고, 난전으로 치달은 알제리 왕국군은 지금 6할 이상이 무너졌다. 압도적인 전력은 이제 반 토막이 나버렸다.

벡스가 도착해서 그를 중심으로 아군이 제이슨과 펠릭스, 엘레나를 포함한 살아남은 돌격대를 감쌌다.

더는 적군의 위협이 없어진 상황.

벡스는 살아남은 이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고생했다.”

벡스는 천천히 돌아서서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검에서 타오르는 플레임 오러가 높이 치솟았다.

“이제 남은 잔당을 쓸어버리자!”

알제리 왕국군이 트랑 왕국군에게 쉽게 항복하지 않고 결사 항전을 벌인 것은 그만큼 서로 간에 악의의 골이 깊어서다. 그러나 그건 트랑 왕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알제리 왕국군을 쓸어버릴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파도처럼 밀고 들어가는 트랑 왕국군의 공격에 적들은 저항을 해보지만, 체계적인 공격 앞에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본진의 전력 중 중앙을 돌파해서 제이슨과 돌격대를 구출하기 위한 이들을 제외하고 외부에서 넓게 포진한 채 적을 압박하던 이들이 있었다.

적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놓았지만, 결사 항전 중에 포위망이 뚫리는 곳이 몇 곳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뚫린 길을 통해 도망치는 적들은 대략 200기 내외. 나머지는 동부 전선에서 모두 죽었다.

도망친 이들을 추격하기보다는 우선 살아남은 이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을 우선했다.

적군 생존자의 숨통을 확실히 끊으며 아군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제이슨은 산처럼 쌓아놓은 적군 기간트 위에 올라앉은 채 정리되어 가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참격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어지간한 오러 유저들의 오러 블레이드를 함께 베어버릴 수 있으니 오러 유저는 더는 제이슨의 상대가 아니었다.

베제트를 입은 상태로는 검술 자체가 그들을 압도하지만 참격을 쓰게 되면 상대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베어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약점도 알아냈다. 생각보다 참격은 많은 양의 오러를 쓴다. 오러 블레이드도 닿지 못하는 곳까지 베어낼 수 있어서인지 몰라도 상당량의 오러가 쓰이다 보니 오러가 부족함을 느꼈다.

엘하르트에게 오러 심법을 배운 후에 단 한 번도 대충 수련한 적은 없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아직 부족함을 알게 됐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제이슨은 전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옆에 서 있던 펠릭스도 기간트를 역소환하고는 제이슨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친 들소라는 돌격 대대의 대대장으로서 숱한 전장에 많이 나섰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은 몇 번 치르지 못했다.

적국인 알제리 왕국과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이만한 대승을 치른 적도 없었다.

“모르겠군. 어떻게 될지.”

“알제리 왕국의 국왕을 죽여야 끝나는 전쟁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이제는 그들의 힘도 많이 줄었잖습니까? 충분히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알제리 왕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왕국의 총력이라고 할만한 이들을 끌고 왔으니. 그런 그들의 전력 중 8할이 사라졌다.

아군의 피해도 2할. 전력의 차이까지 생각하면 지금 아군의 전력이 크게 앞선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트랑 왕국은 급하게 모은 병력일 뿐이었다.

아직 전력을 충분히 충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알제리 왕국이 무너졌으니 승기를 쥔 트랑 왕국의 편에 서려고 하는 곳은 많았다.

그러니 이 전쟁의 승패는 지금 가려졌다. 하지만 그들의 왕국까지 공략하고 왕의 목을 베기 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다.

그리고 알제리 왕국의 국왕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테고 말이다.

“하이젤 왕국과는 다르다.”

하이젤 왕국이야 새로운 국왕을 앉히면서 속국처럼 되어버린 덕에 반란군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알제리 왕국은 다르다. 그때 기간트를 역소환하고 훌쩍 뛰어오른 벡스가 그들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이젤 왕국과는 다르지. 하지만 저들의 불만을 잠재울 인물이 있으니 꼭 다르다고 할 것도 없지.”

“롤로 공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있었기에 이 병력은 이 정도에서 그쳤던 거지. 반란군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거다.”

“하지만 그러면 그에게 많은 것을 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국왕 전하가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는 계획만 말해주면 된다.”

제이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롤로 공작은 분명 빚을 졌다. 그러니 그가 알제리 왕국의 국왕이 된다면 분명 크게 적대하지 않게 되리라.

“게다가 우리가 알제리 왕국을 고스란히 먹게 되면 제국의 눈 밖에 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하긴 근래에 들어 그만큼 영토가 넓어진 곳이 없기는 하네요.”

마스터를 보유한 곳이 전쟁을 일으키면 다른 마스터를 보유한 곳에서 가만두지 않는다. 외교적인 압박은 물론이고 어떻게든 견제해 왔다.

그래서 급격하게 영토가 넓어진 왕국은 없었다. 설령 마스터를 보유했다고 해도 인근의 다른 마스터들이 견제해 왔으니까.

제국의 무지막지한 성장이 멈춘 것도 혼자서 다른 마스터들을 압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스터가 있는 왕국들은 어떤 식으로든 힘을 키웠고, 그런 그들의 힘은 제국이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 칠왕국 연합의 움직임에 제국이 곧장 반응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트랑 왕국은 오히려 마스터가 없다 보니 그들이 크게 견제하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마스터를 보유한 곳에서 작정하고 제재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은 제국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제국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다.

“롤로 공작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격을 해야 한다.”

이미 전쟁에서의 승패는 판가름 난 상황. 역으로 진격해 나가는 것도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그만큼 양국은 백성들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으니까.

서로 기회가 될 때마다 국경을 넘으며 차지한 영토에서 약탈과 살인을 저질러 왔기에 양국의 감정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격한다면 알제리 왕국에는 길고 긴 피의 길이 열릴 터였다.

“제가 필요할까요?”

그 길은 길고도 길고 추악한 길이 될 터였다. 제이슨은 굳이 그 길을 걷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패는 이미 이번 전투로 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이슨의 말을 들은 벡스 장군은 가만히 그를 돌아보았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새운 것은 제이슨이었다. 그는 홀로 많은 기간트를 쓰러트린 것은 물론이고 적군 총사령관과 그린 드래곤 용병단장에 적들이 숨겨왔던 두 오러 유저 또한 제이슨이 쓰러트렸다.

그런 그가 뒷정리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전쟁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돌아가고 싶은 거냐?”

“마무리 전쟁이 좋은 꼴 보기도 힘들 테고, 저는 이번에 깨달은 것이 있어서요.”

“이 와중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런 것도 있지만, 제 부족함을 깨달았죠.”

제이슨의 대답을 들은 벡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 마스터라도 될 생각인 거냐?”

제이슨은 그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에고 기간트를 이미 손에 얻었다. 그러자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신의 의지를 얻어서 엘하르트를 온전히 구해야 했고, 그 후에 자신도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되면 곧장 대륙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마스터가 된다.

벡스가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왕국 차원에서 밀어주는 것이 정석이지. 이번 전쟁에서 네가 세운 공은 국왕 전하에게 전해드리지.”

“그래 주실 겁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왕국 내에서 가장 마스터에 근접한 네가 한 부탁이니 들어줘야지.”

“감사합니다.”

벡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이 전쟁의 끝을 봐야죠.”

“그래줄 거라 믿었지.”

제이슨은 가만히 벡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령관. 혹시 알제리 왕국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벡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기간트를 소환하고는 남은 적군의 잔당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벡스 장군의 가문은 알제리 왕국군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었다. 복수하기 위해서는 군부에 들어가야만 했고, 군부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깨달았지. 그리고 그의 복수심은 그와 함께 알제리 왕국에 복수하고자 하는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게 대장 얘깁니까?”

“그래.”

펠릭스도 군에 남은 이유는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 동생을 잃었다.”

“그럼 끝을 보시겠네요.”

제이슨이야 군인으로서 전쟁을 치른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스스로 복수를 위해 싸웠던 것. 그러니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이슨은 기간트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이 해줄 일은 끝났다. 총사령관의 허락도 얻었으니 이제 자신은 해야 할 일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