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64화 (65/151)
  • 【64】 영지(1)

    달콤한 입맞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의 부드러움에 정신이 녹아내린다.

    “풉. 안 일어나냐?”

    눈치 없는 엘하르트 같으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지금 엘하르트의 목소리가 왜 들린 걸까?

    눈을 뜬 제이슨은 자신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던 혀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핥던 스노우를 집어 들었다.

    “야!”

    스노우는 왜 그러냐는 듯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제이슨은 그 뒤에 서 있는 엘하르트를 볼 수 있었다.

    “어?”

    “이제 일어났냐?”

    “너! 너!”

    제이슨이 놀라서 바라보자 엘하르트는 담담히 말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오랫동안 현신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봉인은 푼 거야?”

    “아니. 이번에 온전히 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를 더 얻어야 해. 쉽지 않네.”

    “하나면 되겠어?”

    “솔직히 여기는 기억이 나서 왔지만, 다른 곳들은 달라. 게다가 찾는다는 것이 쉽지도 않고.”

    “그래도 네가 추려준 것들만 찾다 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고대 던전이라고 전부 신의 의지가 깃든 물건을 가진 것은 아니야. 아마 많은 허탕을 칠 거다.”

    “그런가?”

    제이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때 옆에 있는 술독 중 하나를 가지고 온 엘하르트가 제이슨의 앞에서 술독을 열었다. 훅 밀려오는 주향에 제이슨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주향은 맡아본 적이 없었다. 옆에서 술잔 두 개를 꺼낸 엘하르트가 술독에서 술을 두 잔 떠서는 내밀었다.

    제이슨이 그걸 하나 받아들자 엘하르트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제이슨도 술잔을 비웠고,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좋은 술은 처음이었다.

    엘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 녀석이 담그는 술은 신들도 탐내던 술이었지.”

    “신?”

    “그런 게 있다.”

    제이슨은 오랜만에 본 엘하르트의 얼굴에 깃든 그리움을 읽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을 줄 알았나 싶었다.

    제이슨이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술잔을 건네자 엘하르트가 술잔을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만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딱 하나. 네가 처음에 마셨던 술에만 신의 의지를 넣을 수 있었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담아낸 술. 내가 올 줄 알았나 보더군.”

    “친구였나?”

    “그랬지. 설마 제 마지막에도 날 생각할 줄은 몰랐다만.”

    엘하르트는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고는 쭉 들이키고는 말했다.

    “이 술들은 실패작이야. 하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술이다. 그러니 잘 챙겨 둬.”

    “챙겨 둬?”

    “이건 내 친구가 나에게 남긴 거니까. 딱 한 개만 네가 마시게 해주마.”

    입맛을 다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건 마셔도 되는 거지?”

    “내가 계약자와 마셨다고 하면 녀석도 이해해주겠지.”

    그리 말한 엘하르트는 쭈욱 술잔을 들이켰다. 술독 하나는 적어도 열 병 이상은 나올 터. 그런데 처음 맛보고 곯아떨어진 것에 비하면 떨어진다고 해도 어떤 술보다 맛이 좋았다.

    엘하르트는 다음 술잔에 술을 따르다가 인상을 굳혔다.

    “확실히 제약이 많네.”

    엘하르트는 놓인 술잔을 쭉 비우고는 그대로 흐려졌다.

    “어? 엘하르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대로 사라진 엘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연결은 전보다 자주 할 수 있을 거다. 이 술독만 비우고 나머지는 다 챙겨 놔. 나중에 내가 다 마실 거니까.

    “그렇게 해라.”

    제이슨은 엘하르트가 떠나고 나자 남은 술독에서 술을 따라서 마셨다. 그때 슬그머니 엘하르트의 자리에 나타난 스노우가 술잔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어이가 없었다.

    “좋냐?”

    컁! 컁!

    술을 좋아하는 꼬마 정령이라. 제이슨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스노우와 함께 술잔을 비웠다.

    아공간 주머니에 술독들을 모두 담고 제이슨은 떠날 채비를 마쳤다. 고대 던전 치고는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훌륭한 술이었다. 처음 마셨던 술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지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술이었다. 사실 신의 의지가 깃들었던 것은 술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제이슨은 설인에게 죽은 스노우의 부모도 잘 묻어주었다. 스노우는 그 앞에서 가만히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제이슨은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돌아섰다.

    제이슨이 모든 짐을 다 챙기고 나가려고 할 때 그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스노우가 서 있었다. 제이슨은 그런 스노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이곳의 패자였던 설인의 심장을 먹었으니 오히려 이곳에 지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런데 스노우는 무슨 소리냐는 듯 제이슨을 바라보며 짖었다.

    컁! 컁!

    “같이 갈까?”

    꼬리를 흔들며 주위를 도는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슬쩍 손을 내밀어 스노우를 집어 들었다. 옷 속에 스노우를 집어넣은 제이슨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가자.”

    새로운 동행을 데리고 제이슨은 고대 던전을 나왔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 작은 겨울 여우 정령은 북풍의 협곡의 패자.

    설인이라고 무시했다가 죽을 뻔했던 제이슨의 입장에서는 그 심장을 먹었다고 해도 그만큼이나 강해졌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함께 데리고 갈만하다고 여겼다.

    제이슨은 스노우와 함께 엘하르트의 친우가 만들었다는 고대 던전을 떠났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이슨은 협곡의 일부가 눈으로 뒤덮인 것을 보고는 뺨을 긁적였다.

    산사태가 일어난 협곡은 절반 가까이 파묻혀 있었다. 제이슨은 자신이 벌인 흔적을 보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 벽을 타고 달리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

    이번 산행에서 몇 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균형감도 달라졌다.

    “좋네.”

    제이슨은 빠르게 협곡을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제이슨은 왕실에서 나온 특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제이슨을 향해서 국왕의 칙서를 전했다. 제이슨은 그걸 받아서 내용을 살폈다.

    “이 두 개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해서 내린다는 겁니까?”

    “전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네.”

    영지의 크기는 상당히 컸다. 백작령으로는 비상식적으로 컸다.

    “이거 왜 이리 큰 겁니까?”

    “승작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후작으로 승작할 것 같더군.”

    “그런데 특사로 오시기에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쁘네. 자네의 일이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오지도 않았겠지.”

    트레이 후작. 카이트 국왕의 왼팔이라고 할만한 인물로 현 재상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칙서를 가지고 온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제이슨은 긴 숨을 토해냈다.

    “솔직히 영지를 받아도 지금은 아닐 줄 알았습니다만.”

    “그곳은 현재 영주가 없는 상황이야. 왕국에서 파견한 관리자가 그곳을 관리하고 있었지. 이제 슬슬 준비하자는 뜻이라고 하던데.”

    긴 숨을 토해낸 제이슨이 말했다.

    “그러니까 영지를 인계받아라. 뭐 이런 말씀이신 거죠?”

    “왕국에서 파견된 관리자들은 당분간 유지할 생각이네. 하지만 자네가 영주가 되고 난다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겠지.”

    제이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관리를 뽑고 그걸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마 제가 오면 바로 영지로 가보라고 와 계신 겁니까?”

    “맞네. 눈치가 빠르군.”

    “알겠습니다. 내일 떠나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래도 되네.”

    제이슨은 트레이 후작과 헤어지고는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 이미 그들도 칙서의 내용을 들은 상태였다. 모인 가족들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갔던 일은 잘되었느냐?”

    “예. 잘 되었습니다.”

    제이슨의 대답을 들은 트레버가 미소를 지을 때 불쑥 제이슨의 품에서 튀어나온 것은 스노우였다.

    컁! 컁!

    갑자기 튀어나온 스노우를 보고 모두 눈을 빛냈다. 특히 조안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빠! 그게 뭐야?”

    “이번 여행에서 만난 친구.”

    “한 번 만져봐도 돼?”

    다가온 조안나가 손을 내밀자 스노우가 으르렁거렸다. 제이슨은 그런 스노우의 머리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톡 두드리고는 말했다.

    “내 동생이다.”

    스노우가 제이슨을 올려다보더니 다가온 조안나의 손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픽 웃음을 흘렸다. 조안나가 꺅꺅거리며 스노우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브렐리아나도 놀라워하며 만져보았다.

    “여우를 구해 온 거냐?”

    “보기에는 여우지만 그냥 여우는 아닙니다.”

    “그래?”

    클라이도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귀엽기는 하구나.]

    그 특유의 목소리에 제이슨은 담담히 답했다.

    “저리 보여도 보통 녀석은 아니에요. 겨울 여우 정령이라고 하프 정령이에요.”

    “정령?”

    스노우를 품에 안고 있던 조안나가 놀라서 돌아보자 제이슨이 담담히 말했다.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말이죠.”

    엘하르트에게 듣기는 했지만,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이슨도 알지 못했다. 제이슨은 조안나의 품에 안겨있는 스노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문장은 정했느냐?”

    “문장이요?”

    “가문의 문장 말이다.”

    제이슨은 그 말에 새삼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새로이 생기는 거대한 영지. 그곳을 관리하기 위해서 수많은 관리가 파견 나와 있었다. 제이슨은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총 스물두 명. 이 큰 영지를 관리하기에는 빠듯한 숫자였지만, 이것도 많은 것이었다.

    “용케 이만한 인원들을 차출했군요.”

    빼앗은 영지는 많았고, 그것을 관리할 관리자들의 수는 적었다. 갑자기 생긴 수많은 일자리를 채워 넣기에는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관리자들을 만들어 놓지 않았었다.

    왕국의 백작령 두 개. 붙어있는 영지라고 하나 그들이 지금까지 해 먹었던 것들을 파악하고 투명하게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은 퀭했다.

    제이슨은 담담히 물었다.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영지 인수인계되면 다른 영지들로 가서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겠지.”

    퀭한 안색의 인물들이 안색이 더 나빠지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픽 웃음을 흘렸다. 제이슨은 집무실에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보았다.

    제이슨은 관리들을 보며 물었다.

    “영지를 정상화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관리들의 대표인 바벨이 답했다.

    “최대한 빠르게 한다면 3년입니다. 이 인원들이 바뀌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요.”

    제이슨은 그 말을 듣고는 트레이 후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영지 정상화도 안 됐는데 넘기실 생각은 아니시죠?”

    “지금 관리들이 부족해서 이것도 힘드네.”

    제이슨은 덤덤히 바벨에게 물었다.

    “3개월 안에 끝내려면 얼마나 관리가 필요합니까?”

    바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지금의 열 배가 필요합니다.”

    제이슨의 시선이 트레이 후작을 향했다. 트레이 후작이 그 눈빛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만한 인원을 어디서 구해오라는 건가?”

    “그 정도도 못 해 주시는 겁니까?”

    트레이 후작은 제이슨의 물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카이트 국왕이 왕위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물론이고, 하이젤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그런 그가 관리 좀 파견해 달라고 하는데 인원이 부족하다고 잡아뗄 수는 없었다.

    “하, 한 번 알아보겠네.”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슨이 스노우를 품에서 꺼내며 말했다.

    “바쁜 건 알겠는데 가문의 문장을 만들 생각입니다. 이 녀석으로 문장 좀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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