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60화 (61/151)
  • 【60】 북풍의 협곡(1)

    술이 깬 거트 공작은 가문의 어른들끼리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따로 연락해준다고 했다. 제이슨도 약혼이 간단히 자신들끼리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카이트 국왕이 중매를 본 것이기에 그도 분명 만나자고 할 터였다.

    어째 일이 커지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시간을 벌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자신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으니까.

    제이슨은 집으로 돌아와 트레버와 브렐리아나에게 약혼에 관해서 한 번 뵙자고 하신다는 말을 전하고는 다녀올 곳이 있음을 알렸다.

    우선은 새로운 신의 의지가 필요했다. 베제트를 타고 싸우는 것도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기간트와의 대전에서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아무래도 압도적인 신체의 차이에서 나오는 불리함은 어쩔 수 없는 법.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엘하르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엘하르트를 타면 그런 신체적인 모든 문제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자면 그의 봉인을 풀어야 했기에 제이슨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고대 던전을 찾아 이동하기로 했다.

    전면적인 항복을 해서 국경이 아니라 수도로 곧장 마탑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된 하이젤 왕국으로 간 제이슨은 자신의 일을 보기 전에 이곳에 와 있는 벡스를 만나러 갔다.

    수도 외곽에 포진한 병력은 이제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병력이 수도에 남아있기로 했다.

    지금은 그곳에 벡스를 비롯해 ‘미친 들소’의 요원들이 모여 있었다.

    제이슨의 방문에 벡스는 자리를 마련했다. 새로이 얻은 성들에 대한 인수인계와 얻게 될 광산에 파견될 인원들을 추리는 등 벡스는 하이젤 왕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벡스의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고생이 많으신가 봅니다.”

    “누구처럼 전쟁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녀석과는 다르지.”

    “부러우십니까?”

    코웃음을 친 벡스가 제이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젠 공주와 만났다고?”

    “그건 또 어떻게 들으신 겁니까?”

    “여기 앉아있다고 왕궁이 돌아가는 걸 보고받지 않을 줄 알았나?”

    제이슨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답했다.

    “약혼하기로 했습니다.”

    “호오. 이제 독립하기로 한 거냐?”

    “독립이요?”

    “그럼 아이젠 공주를 맞이하면서 바론 백작가에 남아있을 생각이었냐?”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새로이 영지를 받고 그걸 관리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제이슨의 표정을 본 벡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생각 없는 것은 여전하구나.”

    제이슨은 픽 웃고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북쪽은 어떻습니까?”

    “북쪽?”

    “국왕의 뜻을 잘 따릅니까?”

    “전대 국왕과는 뜻을 달리했지만, 이번에 새로이 국왕에 오른 레이먼 국왕의 뜻은 따르는 것 같더구나. 그건 왜 묻는 거냐?”

    “그냥 물어본 겁니다. 아무래도 국왕이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한다고 해도 지방 귀족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 군이 주둔하고 있다.”

    수도에 배치되어있는 전력만 해도 상당했다. 오로지 기간트 라이더들로만 이뤄져 있는 데다가 오러 유저가 둘이나 있으니 분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벡스는 그런 부분에서는 철저했다.

    “그보다 어쩐 일이냐?”

    벡스의 물음에 제이슨은 담담히 답했다.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뵈러 온 겁니다. 안 보고 가면 뭐라고 하실 것 같아서요.”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다고.”

    하긴 제이슨은 언제나 벡스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군 사령관 앞에선 돌격 대대원으로서 당연했다. 게다가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던가?

    지금 흘리는 땀 한 방울이 훗날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않게 해줄 거라며 정말 죽어라 굴렸으니까.

    그러니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것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기를 못 편 것도 사실이었다. 엘하르트를 만나고 베제트를 얻으며 이제는 벡스와도 비벼볼 만 해지니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벡스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것처럼 굴었다. 아무래도 왕국에서 가장 강한 데다가 고집도 센 그는 정적은 있을지언정 지인은 없었으니까.

    “잠깐 짬을 낸 것이었다. 이만 가봐라. 만나봐야 할 사람들도 더 있을 테니.”

    “그러죠.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약혼식을 치르면 가보마.”

    그렇게 거창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부르지 않으면 섭섭해할 분위기라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제이슨은 ‘미친 들소’의 숙소로 찾아갔다.

    이번에 처형된 귀족의 대저택을 점령하고 그곳을 쓰는 것이었기에 제이슨은 금세 ‘미친 들소’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숙소 뒤편에서는 펠릭스가 땀을 흘리며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엘레나가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제이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엘레나가 먼저 발견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제이슨은 펠릭스에게 방해가 안 되게 엘레나에게 먼저 다가갔다.

    펠릭스는 훈련이 끝나지 않았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제이슨이 다가가자 엘레나는 미소를 지은 채 차를 권했다. 제이슨이 차를 받아서 한 모금을 마시자 엘레나가 물었다.

    “아이젠 공주가 그렇게 예쁘다면서?”

    제이슨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며칠이나 됐다고 그걸 벌써 다 알고 있습니까?”

    “아울이 알려줬어.”

    아울은 블랙 아울로 알제리 왕국이나 살펴볼 것이지 아이젠 공주를 소개받은 것은 또 줄줄이 알려줬는지 투덜거리는데 엘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예뻐?”

    “예뻐요.”

    다른 종족과의 혼혈들은 그 종족의 특색 때문에 잘 생기거나 예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젠은 순혈의 인간인데도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래서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이슨의 얼굴을 보고 엘레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군 전역하고 다 잘풀리는 것 같네.”

    “그러니까요.”

    얼른 전역했어야 하는 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펠릭스가 훈련을 마쳤는지 다가왔다. 그런 그를 보고 엘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동시에 나서서 땀내 훅 풍기던 펠릭스를 뽀송뽀송하게 씻기고 말려버렸다.

    전쟁 중이 아니니 이렇게 여유롭게 정령술을 사용하는 것이리라.

    펠릭스는 엘레나가 따라준 차를 단숨에 비우고는 제이슨의 앞에 앉았다.

    “어쩐 일이냐?”

    “하이젤 왕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서 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국경이 아니라 수도까지 단번에 올 수 있으니 굳이 국경 쪽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수도에서는 어디로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이젤 왕국은 아직 치안이 안정되지 않았다.”

    “길가다 칼 맞을 만큼 어수룩하진 않잖아요.”

    제이슨은 하이젤 왕국의 내로라하는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그런 제이슨을 감히 누가 해할 수 있단 말인가?

    “왕국에서 이름이 알려진 자들은 모조리 처리되었지만, 아직 비공식 오러 유저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라.”

    “그럴게요.”

    마스터의 영역에 든 이가 아니라면 어떤 이와 싸워도 도망은 칠 자신이 있었다.

    펠릭스는 제이슨을 보며 물었다.

    “잠깐 시간 내 온 거라면 대련 한번 하고 가라.”

    제이슨은 펠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갑을 입은 상태로도 괜찮다면요.”

    “그거 입으면 둔해지지 않나?”

    “기능 좋은 것은 안 그렇습니다.”

    “그래?”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아. 그럼 한 번 붙어보자.”

    제이슨은 기회라고 여겼다. 펠릭스에게 대련을 빙자해서 얼마나 구타를 당했던가? 그걸 갚아줄 기회가 생겼다.

    제이슨은 베제트를 소환해서 입고는 펠릭스의 앞에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시작하죠.”

    로크는 지금 한창 바빴다. 전장에서만큼 음차원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 없어서 그걸 회수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이번에 워낙 많은 재료를 잃었기에 그걸 보충해야 하는 것 때문에도 바빴다.

    듀라한은 로크가 부릴 수 있는 두 번째로 강력한 패였는데 그걸 이번에 모두 잃었다. 전장에서 그만큼의 가치를 했지만, 부서진 듀라한을 회복시킬 수는 없어 그걸 다시 만들어야 했기에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로크였지만, 제이슨이 찾아왔다는 말에 모든 작업을 멈추고 다가왔다.

    “왔어요?”

    “그래.”

    제이슨은 로크의 간이 연구소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장비를 늘어놓기에는 좁아서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지내는 건 괜찮냐?”

    “나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연구하기보다는 사용했던 것들을 채워 넣는 수준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겠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잠깐 갈 곳이 있어서 가는 길에 들렀어.”

    “하이젤 왕국 안에서요?”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는 말을 이었다.

    “형의 팔은 잘 이어졌더라.”

    “진짜요? 대박! 그게 성공했어요?”

    “그런데 팔이 가진 성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마갑을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더라고.”

    “우! 누나가 부럽네요.”

    “그래서 말인데 너 전역하면 내 영지로 오지 않을래?”

    “형. 영지도 있어요?”

    “아직 받지 않았는데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오! 조안나는요?”

    “거기서 조안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야?”

    “연구는 같이하면 좋으니까요.”

    흑심 가득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제이슨은 담담히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건 생각 좀 해보고.”

    “그럼 저도 생각 좀 해보고요.”

    제이슨은 조안나만 있다면 로크를 거두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전역할 때쯤에 다시 얘기해 보자.”

    “에휴. 그러게요. 앞으로 5년이나 남았는데.”

    “그래. 그럼 열심히 뺑이쳐라.”

    로크가 입을 댓발이나 내밀었다.

    “아, 진짜! 약 올리러 오셨어요?”

    제이슨은 대답 대신 로크의 머리를 슥슥 비벼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썼으니 서둘러 움직일 때였다.

    바닥에 대자로 누운 펠릭스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엘레나가 그런 펠릭스를 치료하며 물었다.

    “성과는 좀 있었어요?”

    “응. 그냥 깨진 건 아니니까. 실마리를 얻은 것 같기는 해.”

    제이슨과의 대련을 복기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 검에 당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더 빨랐던 것 같은데 자신의 모든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는 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은 제이슨에게 닿지 않았다. 고작 한 치 정도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내는데 그 간격이 영원히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제이슨이 그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총사령관도 못 이기겠더군.”

    “제가 보기에도 그랬어요.”

    아무리 강한 공격도 상대에게 닿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제이슨은 그 미려한 움직임으로 펠릭스를 농락했다. 펠릭스는 편하게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다시 대련을 복기하려는 것을 보고 엘레나도 한 발 물러나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제이슨과 펠릭스의 대결을 떠올려 보았다.

    그 신묘한 검술을 떠올린 엘레나가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녀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그녀의 체내에 깃들어 있던 마나가 끈적해지며 그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응축되었다.

    자신의 체내에 깃든 마나가 극한까지 융합하며 생체 파장과 일치해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오러. 오러 유저로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그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그것은 어떤 깨달음이 필요했던 것. 그리고 지금 엘레나는 제이슨과 펠릭스의 대결을 보면서 얻은 깨달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러 유저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펠릭스를 약 올리기 위해서 로크를 만나고 돌아오던 제이슨과 바로 옆에서 대련을 복기하던 펠릭스가 보았다.

    “헐.”

    제이슨이 놀라는 사이에 펠릭스가 씨익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얻었군.”

    제이슨이 빠지며 약해졌던 ‘미친 들소’의 전력이 다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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