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아이젠(3)
집으로 돌아온 제이슨은 결국 가족회의에 불려갔다. 트레버와 브렐리아나는 물론이고 클라이와 조안나까지 참석한 회의였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트레버였다.
“네가 백작이 되었다는 얘기보다 거트 공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온 것이 더 놀라운 일이더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이슨은 트레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클라이가 드물게 농담을 꺼냈다.
“형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이 걱정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신경 안 썼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제이슨이 그 부분에 대해서 신경을 껐을 때 끼어든 것은 조안나였다.
“아이젠 공주님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시던데. 못 봐서 아쉽네.”
사교계의 정점에 서 있는 여인이 아이젠이었다. 그녀가 참석하는 것만으로 그 초청자의 이름값이 드높아지는 이름. 제이슨은 조안나가 사교계에 들어갔다면 언제고 마주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녀가 흑마도공학을 하기로 했으니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었다.
브렐리아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네 뜻을 존중해서 약혼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제이슨은 잠시 고민해보았다. 자신을 배려해서 그렇게까지 양보한 아이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배려할 줄 아는 모습이 좋았다.
“약혼이라고 해도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을 뜻한다. 거트 공작가는 트랑 왕국 최고의 가문 중 하나다. 가문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 제이슨의 말을 들은 트레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문이 기울기는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해도 좋다.”
“제가 원하지 않으면 파혼해도 상관없습니까?”
“약혼도 안 했는데 무슨 파혼 얘기를 하는 거니?”
브렐리아나가 놀라서 하는 말에 제이슨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답했다.
“그냥 그래도 괜찮은지 물은 겁니다.”
“괜찮다. 네가 아니었다면 백작가는 무너졌을 터. 네 잘못으로 백작가가 무너진다고 해도 괜찮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려무나.”
제이슨이 돌아보자 가족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 약혼까지는 진행해 볼게요.”
어차피 중앙 정계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은 엘하르트의 봉인을 푸는 것과 스스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베제트의 도움을 얻을 때는 마스터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 그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수호의 검과 싸워보고 알았다.
진정한 마스터들이 어떤 자들인지.
엘하르트의 경지는 마스터들조차 내려다보는 수준이지만, 수호의 검은 자신이 베제트의 도움을 얻어도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 두 개의 차이. 어쩌면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를지 모른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 경지에 올라 엘하르트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결혼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하지만 아이젠은 마음에 들었다.
외모가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그녀의 당돌해 보일 정도로 자존감이 넘치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약혼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거트 공작가에는 제가 직접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는 길에 선물도 가지고 가면 좋겠구나.”
제이슨은 잠시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족회의가 끝나고 제이슨은 캐리를 만나러 갔다. 캐리는 제이슨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젠이 가진 것이 아닌 제이슨과 함께 있는 모습을 향한 질투였나 보다.
“잠시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이요?”
“거트 공작가에 가져갈 선물을 사러 나가봐야 할 듯한데 연구소에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가는 길에 함께 구매하려고 합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캐리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말했다.
“필요한 것이라면 많죠.”
아이젠에 대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제이슨이 거트 공작가를 간다는 것은 떠도는 소문대로 약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시죠.”
“좋아요.”
제이슨은 캐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직 바론 성은 들어와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암상인들을 만나려고 해도 근처의 큰 성으로 가야 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제이슨은 그냥 수도까지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도에는 없는 것이 없었으니까.
제이슨은 수도에 도착해서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수도에 왔다고 괜히 카이트 국왕의 눈에 띄어서는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제이슨은 캐리와 함께 암시장을 찾아가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사주었다. 이번에 얻은 것들도 많아서 그런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사는 데 들어간 돈만 30만 골드에 달했다.
나이트급 기간트 한 대를 살 정도의 골드가 들었지만, 골드라면 넘치도록 많았다. 아직 레드 드래곤 용병단의 기간트들은 처분도 하지 않았음에도 돈은 넉넉했으니까.
게다가 아직 하이젤 왕국에서 잡은 기간트들에 대한 골드도 받지 못했다. 그것까지 받는다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일이었다.
캐리는 이번에 흑마법사의 아공간 주머니에 든 것들을 모두 얻으면서 그것들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샀는데 그것들을 사주면서 제이슨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모습을 보고는 고민했다.
자신이 그저 조안나의 스승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제이슨은 그곳에서 진철 세라딘 덩어리를 구매했다. 어른 상체만한 크기의 진철 세라딘은 그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차피 거트 공작에게 골드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법.
그렇다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선물을 하기로 했다. 제이슨은 암시장에서 거트 공작의 초상화도 구하고는 캐리와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캐리는 뭐가 불만인지 제대로 인사도 하는둥마는둥하고는 연구소로 들어가 버렸다. 제이슨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신의 훈련장에서 진철 세라딘을 꺼냈다.
그리고 거트 공작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제이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고는 검을 뿌렸다.
스카카칵!
단 일검. 그 흐름을 끊지 않고 휘두른 검격이 멈췄을 때 진철 세라딘 덩어리는 거트 공작의 흉상이 되어 있었다.
미술적 감각이 뛰어나지는 않아서 비슷하지만 똑깥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거친 기상이 그대로 전해져서 오히려 더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나쁘지 않네.”
제이슨은 이런 정성 어린 선물이 통할 거라고 믿었다. 하긴 지금은 뭘 선물해도 거트 공작이 반대할 리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그저 명분일 뿐이니까.
제이슨은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기로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만에 온 것인지 방의 침대에 눕는데 픽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편안히 자신의 방 침대에 누운 게 오랜만이라고 느낄만했다. 하이젤 왕국과의 전면전을 치르느라 정신없었으니까.
“진전은 있어?”
제이슨의 물음에 엘하르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없어. 신의 의지를 더 구해야만 해.
“그래.”
엘렌을 만났다. 그리고 엘렌도 베제트를 감지했다면 상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거트 공작가 다녀온 다음에 찾아보자.”
원래의 목적을 잊으면 안 된다.
거트 공작가에 찾아간 제이슨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거트 공작은 밥 한 끼 먹고 가자면서 그를 불렀고,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곳에서 거트 공작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지금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을 만나다니. 절로 흥이 나는군. 시간이 되면 나와 대련이라도 해보겠나?”
거트 공작의 말에 아이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큰일 날 소리 하고 계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국 제일검한테.”
“지도 대련인거지. 지도 대련.”
“나이가 있으셔서 그러다가 큰일 나요.”
제이슨은 미소를 지은 채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조각한 흉상을 꺼냈다. 그걸 본 거트 공작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뭔가?”
“제가 직접 조각한 겁니다. 제가 미술적 감각은 없어서 그런지 잘 나오지는 않았네요.”
“아닐세. 왕국 제일검에게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나? 아주 마음에 드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받아서 돈으로도 받을 수 없는 것을 줬다. 거트 공작은 시종장에게 흉상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으라고 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들고 왔을 거라고 믿네.”
제이슨은 아이젠을 흘끔 바라보았다. 잔뜩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 제이슨은 차분하게 답했다.
“약혼을 허락해주십시오.”
아이젠의 눈에 흡족함이 감돌 때 거트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자네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말튼! 가서 ‘드래곤의 숨결’을 가져오게.”
제이슨은 그 비싼 술도 구비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병에 1만 골드. 몇 잔 나오지도 않는다.
아이젠도 놀라서 거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걸 드신다고요?”
“이런 좋은 자리에 좋은 술을 마셔야지.”
“치. 저 결혼할 때 마신다고 딱 한 병 구해놓으신 거면서.”
“걱정마려무나. 내가 다시 하나 구해보마.”
제이슨은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제가 한 번 구해보겠습니다.”
“호오! 그럼 누가 구하든 결혼식에 마시는 거로 하지.”
“그러시죠.”
술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드래곤의 숨결은 비싼 만큼 독했다. 한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거트 공작이 쓰러졌으니. 오러를 다루는 제이슨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었지만, 쉬이 버틸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제이슨은 그런데도 자신의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아이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전혀 취하지 않았다. 자신도 꼭 마셔봐야 한다면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거트 공작이 먼저 쓰러졌으니 웃기는 일이었다.
“아이젠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오. 하나도 안 취했어요오.”
제이슨은 말끝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꼿꼿하게 서 있다고 해도 그녀가 취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제이슨에게 손가락질했다.
“내가 약호온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에. 너어무 하신 거 아니···.”
말을 하던 중에 취기가 확 올랐는지 쓰러지는 아이젠을 보고 제이슨이 얼른 손을 내밀어 받아줬다. 제이슨이 손도 치우지 못하고 바라보자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달려와서 아이젠을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제이슨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거트 공작과 아이젠 모두가 떠나고 남은 술을 가만히 잔에 따르니 엘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구나. 이 제조법이 아직도 전해진다니.
“아는 술이야?”
-과거에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직접 이걸 인간들에게 전수해 주었었지.
제이슨도 얼핏 기억이 났다. 고대 던전에서 난 제조법으로 만드는데 그 재료 또한 구하기가 어려워 드래곤의 숨결이 그리도 비싼 술이라고.
제이슨이 남은 술잔을 쭉 비우자 엘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을 맛보니 떠오르는 곳이 있다. ‘북풍의 협곡’으로 가자.
“북풍의 협곡?”
-그래. 그곳에 이 술을 인간들에게 전수해 준 자의 던전이 있을 것 같다. 그곳에도 신의 의지가 있을 수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
“너 거기가 하이젤 왕국인 건 알고 있지?”
아무리 전면적인 항복을 했다고 하나 ‘북풍의 협곡’은 하이젤의 북부 귀족들이 판치는 곳이다. 그곳에서 잘못 걸리면 귀찮은 일이 터질 수도 있었다.
-왜? 못 가?
“아니. 확실하다면 그곳으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