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58화 (59/151)
  • 【58】 아이젠(2)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이젠은 제이슨이 떠나고 나서 자신도 곧장 카이트 국왕에게만 인사하고 거트 공작가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도 언뜻 그가 생각나기는 했다.

    자신의 얼굴을 그렇게 직시한 남자는 또 처음이라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남자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어디 가서 그렇게 천대받을 얼굴은 아닌데 말이다.

    충격은 받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했다. 카이트 국왕도 별말 하지 않고 그녀를 보내줬으니까.

    그렇게 돌아온 아이젠을 반긴 것은 거트 공작이었다.

    “딸!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느냐?”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고 하던데요?”

    “그래?”

    거트 공작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구나. 듣자 하니 벡스 장군만큼이나 큰 공을 세워서 기대하는 바가 컸는데.”

    “혼처가 거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제 이십 대인데 벌써 오러 유저란다. 그것도 하이젤 왕국의 제일 검호부터 시작해서 셋이나 되는 오러 유저를 죽였지.”

    아이젠이 볼을 부풀렸다.

    “그렇다고 절 보면서 결혼할 마음도 없다는데 다리라도 붙들어요?”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누가 우리 공주님에게 그런 짓을 하게 만든단 말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트 공작을 보고 아이젠의 마음이 약간 풀어질 때 그가 뒷말을 중얼거렸다.

    “사십 대에는 마스터의 경지에 들지도 모르지만. 뭐 상관없다. 왕국 최초의 마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어차피 에고 기간트도 없는데 뭔 상관이겠니.”

    마스터라는 말은 어감이 달랐다. 그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 대륙의 정점에 선 이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스터를 보유한 왕국은 그 국력의 크기 자체가 달라졌다. 그리고 마스터가 되면 어느 곳이든 그에게 공국을 떼주면서 대공의 작위를 내려준다.

    성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이번에 하이젤 왕국에서 얻을 거라고 하는 성 몇 개를 묶어서 내줘야 하는 존재가 마스터라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이젠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행동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그냥 보내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론 백작가에 다녀올게요.”

    “응? 거기는 왜?”

    “제이슨 백작이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들었거든요.”

    거트 공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럴래? 뭐 필요한 것 없니?”

    아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은 차 좀 있어요? 차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물론이지. 시종장에게 말해놓을 테니 네가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가지고 가려무나.”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면전에서 지금은 결혼할 생각 없다고 한 남자니까요.”

    “허허. 네 앞에서 그럴 수 있다니 오히려 더 마음에 드는구나.”

    아이젠은 픽 웃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시종장에게서 최고급 차를 구했다. 왕국 내에서가 아니라 대륙 단위로 찾으면 최고급 차의 가격은 입이 떡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차를 준비한 아이젠은 곧장 호위 기사들과 함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러 마탑으로 갔다.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몰라도 제이슨이 갑자기 더 보고 싶어졌다.

    제이슨이 연구소를 나와서 응접실에 나왔을 때 그곳에는 트레버와 브렐리아나가 앉아있었고, 그들의 앞에 아이젠이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온 그녀는 제이슨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주님이나 되면서 이렇게 먼저 인사를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제이슨은 얼른 다가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문으로 돌아가니 제이슨 백작의 얼굴이 떠올라서요.”

    그 말에 트레버와 브렐리아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제이슨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집안에는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었다. 숨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지금 밝혀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제이슨이 어색하게 웃는 것을 보고는 아이젠이 놀라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 표정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나 보네요.”

    “아닙니다. 어차피 밝힐 생각이었습니다.”

    제이슨은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자신도 자리를 하나 잡고 앉아서는 트레버와 브렐리아나에게 솔직히 이야기했다.

    “저는 비공식 오러 유저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굳이 밝히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영지도 주신다고 했는데 일단은 거절한 상태고요.”

    “그랬구나.”

    어차피 비공식 오러 유저로 활동하려고 했다 해도 이미 오러 유저를 셋이나 쓰러트렸기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가족들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아이젠은 호위 기사에게 눈짓했고,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는 준비해온 선물을 내려놓았다. 아이젠은 그걸 트레버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이건 아버지가 준비해주신 노르만 차에요.”

    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트레버는 단번에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이건 동쪽 아첼 왕국에서 나오는 차가 아닙니까?”

    “예. 아버지가 차에 관심이 많아서 예전에 아첼 왕국의 사신에게서 구한 물건이죠.”

    “허허허.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물건인데 이 귀한 것을.”

    차에 대한 욕심이 있는 트레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제이슨이 담담히 말했다.

    “선물은 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내 공작님께 보답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거트 공작 정도 되면 바랄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런 그가 아이젠을 왜 이곳에 보냈을까? 아니, 그녀는 왜 이곳에 왔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제이슨이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트레버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은 국왕 전하께서 중매를 서주셨었어요.”

    “국왕 전하가 누구의 중매를 섰다는 겁니까?”

    “제이슨 백작과 저의 중매를 서주셨죠.”

    트레버와 브렐리아나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보통내기가 아니네.

    ‘그래 보인다.’

    자신의 약점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냉정하게 돌아섰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가문을 찾아와서 폭탄선언을 할 줄은 몰랐다.

    제이슨이 바라보자 그녀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아직 제이슨 백작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었죠.”

    트레버와 브렐리아나의 시선이 제이슨을 향했다. 제이슨이 큰 공을 세운 것도 알고 있었고,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찬 그가 결혼을 뒤로 미루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젠을 찰 줄이야!

    아이젠은 외모뿐만 아니라 가문 또한 거트 공작가다.

    제이슨이 아무래도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따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여겼을 때 그녀가 뒤이어 폭탄을 던졌다.

    “그래서 먼저 약혼을 하면 어떨까 해요.”

    제이슨이 손을 들어 올리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건 응접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제이슨은 아이젠 뒤에 서 있는 호위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표정도 경악이 서린 것을 보니 공작가에서 결정한 사안은 아닌 것 같았다.

    제이슨은 오히려 연달아 폭탄을 맞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이슨의 시선이 아이젠을 가만히 향하자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 그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젠은 즉흥적이기는 했지만, 다시 만났어도 흔들림 없는 그를 보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렇게 폭탄선언을 했다. 솔직히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붙잡고 볼 일이기도 했고.

    자신의 미모는 지금이 절정이지만,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라면 앞으로 더 빛날 테니까.

    수많은 신랑 후보감도 감히 그 이름에 견줄 수는 없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붙잡아야 할 남자였다.

    아이젠의 눈빛을 바라보던 제이슨은 짧은 한숨과 함께 트레버를 돌아보았다.

    “잠깐 공주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려무나.”

    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이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난 찬성이다.”

    제이슨은 헛웃음을 흘렸고, 트레버와 브렐리아나가 자리를 비워줬다. 응접실에 남은 것은 제이슨과 아이젠 둘뿐이었다.

    “아이젠 공주님.”

    제이슨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젠의 미소가 진해졌다. 자신 앞에서 흔들림 없는 저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마스터가 될 재목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제 뜻은 분명히 전해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아요. 하지만 제이슨 백작은 지금 당장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했지 앞으로도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게···.”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이슨은 솔직히 답했다. 지금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이젠은 그 미소만으로 성 하나를 무너트릴 만한 여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단하다고 여기지만, 마음이 확 기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자신을 봐온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자신은 정략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냥 우연히 아이젠을 보았다면 반해서 자신이 쫓아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아이젠은 슬며시 손을 내밀어 제이슨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오러 유저인 그가 손을 빼고자 하면 못 뺄 것도 없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아이젠의 뒤에 선 호위 기사의 핏발 선 눈이 재미있어 제이슨은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전후가 바뀌었지만, 그녀만한 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 데다가 거트 공작가에 있다면 그녀가 위험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제이슨이 반대 손으로 아이젠의 손을 덮고는 말했다.

    “공주님.”

    제이슨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아이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 그래요.”

    아무리 당돌하게 나갔다고 해도 제이슨이 자신을 직시하며 하는 말에는 아이젠도 얼굴이 붉어졌다.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곧 공작가로 답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제이슨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서 따라나섰다. 아이젠은 제이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벡스가 있지만, 세운 공을 생각하면 제이슨이 왕국 제일검이라는 칭호는 이미 가져왔을 터. 그런 그의 에스코트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캐리는 조안나에게 클라이를 돌보라고 하고는 로크가 설치해 놓았던 장치를 통해서 들어오는 영상을 살펴보았다. 마차에서 내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눈에 담았다.

    트랑 왕국 제일 미녀라고 알려진 아이젠이 제이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거트 공작가의 차녀로 태어났고, 미의 신이 모든 축복을 몰아준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남자도 거절하기 힘든 여인이 제이슨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것이 아이젠이 가진 것에 대한 질투인지 아니면 제이슨과 함께 있는 모습에 대한 질투인지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평생 흑마법만 연구했던 캐리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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