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57화 (58/151)
  • 【57】 아이젠(1)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슨 폰 하르트 백작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이젠 폰 거트에요.”

    거트 공작가의 차녀. 하지만 그녀는 외모만으로 타국에서도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무기인지 제이슨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범접하기 힘든 그녀의 외모에 제이슨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아이젠이 자리에 앉자 카이트 국왕이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아이젠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카이트 국왕을 돌아보았다.

    “전하. 이 차는 처음 맛보는 향입니다. 혹시 이름이 무엇인지요?”

    “하이젤 왕가에서만 맛보았다는 ‘새벽 서리 풀’이라는 거네. 차 향이 괜찮지?”

    “예. 전하.”

    아이젠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어냈다. 홀로 빛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이는 미녀.

    아이젠은 제이슨의 탄성에 그를 돌아보다가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렸거든?’

    제이슨이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엘하르트는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떠올랐다.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엘하르트의 외모. 그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런 녀석과 함께 지냈던 것을 떠올린 제이슨은 그제야 아이젠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았지만, 이제야 그녀가 제대로 보였다.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이목구비의 조화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도 중요한데 그녀는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싱그러워 보였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젠은 제이슨의 눈빛이 일순간 변하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이 동했다. 누구나 그녀를 처음 보면 보는 것만으로 반쯤 홀린 것처럼 굴었었다. 그건 상대의 경지와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이슨은 달랐다.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자신을 직시하면서도 눈에 일말의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이젠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트 국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군.”

    제이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카이트 국왕에게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만든 자리였기에 화를 낼만 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국왕이다 보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이젠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만남이었다.

    자신의 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제이슨의 눈빛을 보고 카이트 국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눈치 없었군. 둘이 얘기를 나눠보게.”

    제이슨이 입을 열기 전에 카이트 국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네의 포상에 대해서는 다시 시간을 잡아보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 놓도록 하게.”

    제이슨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카이트 국왕이 물러가자 제이슨은 아이젠과 단 둘이 남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군대에 있다 나온 제이슨은 그녀와 대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이젠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니까. 자신의 자랑이든 아니면 환심을 사기 위해서든.

    그런데 제이슨은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젠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듣기로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어요.”

    제이슨은 가능한 외부에 드러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너무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 보니 더는 자신을 숨기지 못하게 됐다.

    아마 집에 가면 난리가 날 터였다.

    “함께 해준 이들 덕분이었습니다.”

    “겸손하시네요.”

    대륙 3대 용병단 중 하나인 블루 드래곤 용병단의 단장 그렌달을 베고, 적군 총사령관 카틀란을 벤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카이트 국왕이 널리 알린 탓도 있었다. 왕국에 벡스를 제외하고도 이만큼 강한 이가 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이었나 보다.

    그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숨기고 싶었지만, 숨겨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좋았으니까.

    제이슨은 아이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많은 혼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적다고는 못하겠네요.”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발이 묶인다. 그리고 새로운 약점이 생기게 된다.

    자신이 영지를 아직 받지 않은 것은 그런 것도 염두에 둔 탓이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약점을 늘릴 수는 없었다. 가문의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이젠은 그런 제이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중매는 거트 공작가에서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카이트 국왕은 역대 어떤 왕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얻었다.

    그런 카이트 국왕이 주선한 자리였다. 게다가 이번에 공을 세운 제이슨도 떠오르는 신성이었다. 벡스가 왕국 제 일검이자 최고의 사령관이라면 제이슨은 홀로 오러 유저들을 줄줄이 꺾은 인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카이트 국왕이 그 자리에 오르게 하는 데도 지대한 공을 세운 이였기에 그는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

    자신을 소개한 것도 후작위를 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딱 잘라 들어오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결혼이라는 것은 언젠가 누구와 해야 할 문제였고,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이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싹 틔울 일은 없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만난 상대는 달랐다.

    “아직 없다는 거죠?”

    “물론 하기는 해야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일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고대 던전을 털러 가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 독식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왕국에서 알게 되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으니까.

    제이슨의 대답을 들은 아이젠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혼처로는 제이슨보다 좋은 곳도 제법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온 것으로 카이트 국왕의 면은 세워준 셈이다.

    “그래도 전하께서 주선한 자리니 차는 다 마시고 갈까요? 이만한 차는 저도 처음 맛보는 거라.”

    제이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차를 비웠다. 왕국 제일 미녀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는 이 순간은 제이슨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얼마 전에야 전역한 입장에서 이건 다른 군인들이 꿈꾸는 그런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더 대화는 없었다. 둘은 서로의 자리에서 차를 다 마셨고, 그렇게 헤어졌다.

    제이슨은 아이젠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은 전했고 그녀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서로 카이트 국왕의 면을 생각해서 시간을 잘 보내고 왔다. 제이슨은 카이트 국왕을 만나 가문에 다녀오겠다고 전했고,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제이슨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자신의 형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클라이는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얼굴색으로 제이슨을 바라보다가 다가와서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제이슨은 그런 클라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고생했어.”

    클라이는 그 말에 답했다.

    [고맙다.]

    뭔가 고저가 없는 말이었지만, 로크가 준비해준 장비는 그래도 의사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이슨은 클라이의 양팔을 잡아주었다.

    캐리가 구해다 달아놓은 두 팔은 클라이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상생활이 가능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침 자신이 작위를 받고 영지까지 받기로 했으니 형과 다툴 일도 없었다. 형이 스스로 영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이슨은 트레버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고생했다. 너의 공에 대해서는 왕궁에서 나온 특사가 전해주었다.”

    “그랬습니까?”

    “아직 포상은 준비 중이라고 하더구나. 그보다 몸 성히 잘 돌아온 것만으로도 되었다.”

    트레버가 제이슨의 어깨를 잡아주고는 물러나자 어머니 브렐리아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매일 같이 클라이를 간호하느라 전보다 말라 있었다.

    제이슨은 그녀에게 다가가 살포시 포옹해주었다. 제이슨의 등을 토닥여 준 브렐리아나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녁은 함께 먹자꾸나.”

    “물론이죠.”

    가족들의 환대가 끝나고 제이슨은 동생 조안나의 연구실에 갈 수 있었다. 제이슨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조안나는 캐리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로크가 끌려오는 바람에 둘이서만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진행 상황이 있었다. 클라이도 요즘에는 연구실에 붙박이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새로 얻은 두 팔이 과연 혈계 전승되는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주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 데이터 수집 목적이었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속 능력과 빙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데 모두 그 수준은 낮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고작 팔만 가져다 붙였다고 아무것도 없던 클라이가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까.

    캐리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어요. 그 능력을 증폭할 수 있는 마갑을 제조하면 될 것 같거든요.”

    “마갑을 말입니까?”

    “예. 기간트를 다루는 것은 무리가 있고, 저 몸으로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하면 몸이 견디지 못해요. 오른팔만 가속을 쓴다고 생각하면 뜯겨나갈 수도 있으니 그걸 보조해줄 마갑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기간트처럼 고성능 코어가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갑이었다. 에테르 코어를 이용하는 베제트와 같은 기술은 없으니 마정석을 이용해 보조하는 수준의 마갑이 현재 나와 있는 것들 중 가장 뛰어난 마갑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만 보조해도 형은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으리라.

    제이슨의 시선이 클라이를 향했다.

    “형. 형 생각은 어때?”

    [솔직히 말하면 굳이 필요할까 싶기는 해.]

    클라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그는 지금 몸의 회복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정신의 회복이었다.

    망가진 정신을 보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아니면 보듬어줄 사람이 되었든 그를 도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갑을 입고 전보다 강한 힘을 얻게 되면 그것만으로 자존감을 회복할 수도 있었다.

    제이슨은 캐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갑을 만들어 보도록 하죠.”

    “그래요. 저번에 늑대형 기간트가 가진 신경회로를 이용하면 마갑이라고 해도 전과는 다른 성능을 보일 수 있을 거예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제이슨의 시선이 클라이를 향했다. 지친 눈빛의 클라이는 제이슨의 시선에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제이슨이 뭐라고 하기 전에 밖에서 헤이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제이슨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명성을 얻었으니 손님들이 찾아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본가로 돌아온 것을 알 이가 얼마나 있을까?

    “거트 공작가의 공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이슨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을 들었다.

    “아이젠 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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