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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기간트 마스터-55화 (56/151)
  • 【55】 포상(1)

    총사령관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줄 검은 표범 기사단장 허클러가 죽으면서 지휘관이 부재하게 된 하이젤 왕국군이 후퇴를 시작한 것은 그들의 패색이 짙어진 뒤였다.

    후퇴도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후퇴하면서 더 큰 피해를 보았다.

    히어로급 기간트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다. 오러 유저들도 오러가 바닥나면 제대로 싸우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뒤를 받쳐줄 이들이 있을 때는 다르다. 미친 들소도 자체의 돌파력이라면 오러 유저가 둘이나 있는 만큼 따를 자가 없지만, 그들 뒤를 받쳐주는 벡스와 기사단이 있을 때는 적진을 반으로 가르는 위업도 저지르고는 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후퇴는 쉽지 않았다. 그들의 후퇴는 피로 길을 닦았다고 할 정도였다. 쏟아지는 눈발로도 다 덮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진 길고 긴 피의 길.

    그 길을 따라 도망친 기간트 라이더들도 있었지만, 후퇴를 포기하고 항복한 이들도 많았다. 병사들은 더욱 저항의 의지를 잃었다.

    하이젤 왕국에서 무사하게 도망친 것은 잘해야 나이트급 기간트 십수 기와 워리어급 기간트 3백여 기 정도였다.

    궤멸에 가까운 대패를 한 상황.

    무너진 요새의 잔해 옆에 급하게 지어진 천막 안에서 벡스가 회의를 진행했다.

    “모두 고생했다.”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그 피해가 작지 않았다. 벡스의 시선이 제이슨을 향했다.

    “특히 제이슨의 공이 가장 컸다.”

    카틀란 총사령관의 목을 벤 것은 가장 큰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이슨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벡스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하이젤 왕국에서는 이제 대항할 힘이 없다. 비공식 오러 유저가 몇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나선다고 상황이 뒤집힐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인 이들을 대표해서 제이슨이 묻자 벡스가 탁자에 펼쳐진 지도의 한 곳을 단검으로 찍었다.

    “리차드 국왕의 목이 필요하다.”

    왕국간의 전쟁에서 이 정도 총력전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주변국들의 눈치도 봐야 하다 보니 병력을 이만큼 끌어모으기 힘드니까.

    하이젤 왕국도 오랜 시간 준비했기에 벌일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잃었으니 이제는 대항할 힘도 없을 터였다. 어쩌면 살고자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목을 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저항할 테니까.

    왕궁까지 진군하려면 적어도 일곱 개의 성을 지나야 했고, 그동안 리차드 국왕은 주변국에 도움을 청하고 병력을 끌어모아 저항을 할 터였다.

    “일이 커지겠는데요?”

    “이번 승리가 전해지면 왕국의 분위기는 달라질 거다.”

    제이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트 국왕이 승리한다고 여기지 않아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이제 어떻게든 자신들도 한 손 거들어 공을 나눠 먹고자 할 터였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외부로 향했던 칼이 자신들을 향해 겨눠지지 않기 위해 이제는 사병들을 싹싹 긁어서 갖다 바칠 판이었다.

    즉 진군하는 와중에 병력이 계속 충원될 터였다. 적들이 병력을 모은다고 해도 그보다 더 빠르게 모일 수도 있었다.

    “동맹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알제리 왕국은 지금 손을 써줄 수 없는 상황이지.”

    제국에서 알제리 왕국의 국경으로 병력을 옮긴 것은 이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제국의 입장에서야 병력을 이동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얻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제국의 황제를 떠올렸던 제이슨은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그 쥐가 살아남지는 못하지.”

    제이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군에 있는 이들이었다. 자신이야 군에서 나온 데다가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을 물을 수 있었지 저들은 명령이 있으면 따를 뿐이라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지쳐 있기도 했고.

    “하이젤 왕국을 병합하실 겁니까?”

    영토의 일부를 얻는 것과 왕국을 병합시키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영토를 뜯어내는 것이라면 제국에서도 별말이 없을 테지만, 하이젤 왕국을 온전히 손에 넣는다고 한다면 제국에서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두 개 왕국이 하나가 되면 그만큼 영향력이 커지니까.

    “국왕 전하께서는 내게 전쟁이 시작될 때 딱 한 가지를 원하셨다. 리차드 국왕의 목.”

    “그 목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가능하면 영토를 넓히라고 했지만, 하이젤을 병합할 생각은 없어 보이셨다.”

    북부 전선과 맞닿아 있는 하이젤 왕국의 남부 성들을 몇 개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쟁에서 힘겹게 이겼다면 그 정도 얻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

    카이트 국왕도 리차드 국왕의 목을 원했지만, 그게 불가능할 거로 여겼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로 욕심을 낼만 해졌다.

    “그럼 진군하면서 국왕 전하의 의중을 듣도록 하죠. 하이젤 왕국 전체를 탐내다가는 목에 걸릴 겁니다.”

    하이젤 왕국을 찢어서 나눠 먹으면 모를까 전체를 탐낼 수는 없다. 제이슨의 말을 들은 벡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전하와 통신을 해보겠다. 그럼 모두 해산하고 푹 쉬도록.”

    제이슨은 그 말에 밖으로 나왔다. 그런 제이슨에게 로크가 다가왔다.

    “형. 저희 막사로 가요.”

    “그래.”

    미친 들소는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만큼 그들의 막사는 특별한 아티펙트였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막사는 그 안에 온도 조절까지 되어 훈훈한 공기가 차 있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엘레나가 펠릭스를 치료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마지막에 백곰 기사단을 막다가 다친 것 때문에 지휘부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펠릭스가 엘레나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그녀의 치료를 끝내고는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회의는 어떻게 됐어?”

    “국왕 전하께서 리차드 국왕의 목을 원하셨다고 하는데 수도까지 치고 올라갈 것인지 아닌지 여쭤본다고 하시더군요.”

    펠릭스는 그 말에 의자에 등을 푹 기댄 채 답했다.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을 텐데.”

    “수도까지 다 부수고 가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일이에요. 저항이 심해지면 반년에서 일 년도 걸릴 일이고요.”

    한 왕국을 집어삼키는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면 누구나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국들이 끼어들 가능성이 컸다.

    제이슨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럴 거면 하이젤 왕국에 통보하는 것이 낫겠죠. 왕의 목이 필요하다고.”

    펠릭스도 제이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우는 종종 있었다. 왕의 목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의 목을 가져다 바치는 경우가.

    제이슨의 말처럼 그것이 가장 깔끔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하이젤 왕국의 절반 정도를 손에 넣고, 왕의 목까지 얻을 수 있는 방법.

    “전하께서 결정할 일이지.”

    제이슨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많은 시간 뺏길 수는 없어요.”

    엘렌도 만나본 마당에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워낙 급한 상황이라 자신이 뛰어들었지만, 이제 큰 고비는 넘겼으니 그리 긴 시간을 빼앗길 전쟁에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눈이 그쳤다. 그간 쌓인 눈이 꽤 되었지만, 눈이 그친 것만으로 병력의 이동은 가능해졌다. 군량의 이동은 썰매를 이용해서 끌고 움직였고, 트랑 왕국군은 진군을 시작했다.

    적들이 하이젤 남부 전선에 있는 요새들을 비우고 성에 집결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하이젤 남부 전선의 요새를 점령하고 그 안에 자리를 잡은 벡스는 회의실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상처를 회복한 펠릭스와 아울, 마릴렌과 케이에 제이슨까지 모인 자리였다. 벡스는 그들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국왕 전하도 리차드 국왕의 목만 원한다고 하셨다. 이미 하이젤 왕국에 그 의견을 보냈으니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아닌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 그동안 우리는 계속 진군한다.”

    이미 전력의 열세는 느꼈을 것이고 적들의 성이 하나하나 함락될 때마다 귀족들은 흔들릴 터였다. 그들이 과연 리차드 국왕의 목을 들고 항복을 해오는 것이 언제가 될지가 관건이었다.

    벡스의 시선이 마릴렌을 향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눈의 꽃’ 기사단은 모든 잘못을 덮어주시기로 하셨다.”

    “감사해요.”

    “그대들이 목숨을 내걸고 얻은 공이 과를 덮은 것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지.”

    돌격대를 따라서 나섰다가 입은 피해가 꽤 컸다. 마릴렌은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이 인정받았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앞으로 진군하면서 이번에 얻은 신무기를 시험하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내일은 세드로 성을 공격한다.”

    “그 투창 말입니까?”

    최소 100기 이상의 워리어급 기간트가 던졌던 투창. 요새의 방어벽을 무효화시켰던 신무기라면 공성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이번에 얻은 마법 방어진 무력화용 창은 800자루다. 얻은 기간트보다 그것이 더 큰 효용이 있을 것 같더군. 그래서 연구용으로 빼놓은 것 말고 직접 시험을 해볼 생각이다.”

    “그들의 무기로 그들을 친다면 리차드 국왕이 열 받겠군요.”

    제이슨의 대꾸에 벡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파격적인 진군이 가능할 것 같다. 성이 빠르게 무너지는 만큼 반란이 일어날 시기도 앞당겨지겠지.”

    “저희가 나설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마법 방어진이 해체되고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설 일이 있겠지.”

    간단히 말한 벡스가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내일은 세드로 성을 점령한다.”

    국경에 있는 성들은 요새보다 더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갖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경을 점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성전이 어려운 것은 성에는 대기간트 용 마력포가 설치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격은 워리어급 기간트 정도인데 그 하나하나는 오로지 파괴력만을 극대화했다.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그 위력은 직격시킨다면 나이트급 기간트의 외장갑도 부술 수 있을 정도다 보니 성에 비치된 마력포만으로도 수성이 용이하다.

    그런 데다가 성에 대기 중인 기간트들까지 생각한다면 성의 마법 방어진을 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모든 방해를 뚫고 성의 마법 방어진을 부수고 나야 진정한 공성이 시작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공성 측에서는 몇 배의 전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딱 200자루의 투창이 꽂혔을 때 세드로 성의 마법 방어진이 사라졌다. 그곳에 있을 기간트의 최대치를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 트랑 왕국의 병력에 비하면 반도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성벽에는 곧 새하얀 백기가 올라오고 성문이 열렸다.

    성문으로 들어서는 벡스의 뒤를 따라 들어가던 제이슨은 성문 앞 공터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딱 보기에도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백 명이 넘게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한 대머리 장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벡스가 다가가자 대머리 장수가 입을 열었다.

    “세드로의 성주 율리스요.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기사 100명과 함께 트랑 왕국에 항복하겠소.”

    이곳으로 도망친 하이젤 왕국의 기사들도 이곳에 꽤 많이 남아 항복했다는 얘기다. 그만큼 하이젤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국경에서 싸운 이들이었다.

    “그대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그들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북쪽을 보았다. 구름낀 하늘은 마치 하이젤 왕국의 미래와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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