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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기간트 마스터-48화 (49/151)
  • 【48】 밀사(2)

    베르제 제국의 수도 안카에트에는 귀족들의 대저택들이 모여있는 거리가 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곳. 그곳을 제이슨이 걷고 있었다.

    제이슨은 그곳 중 한 대저택의 정문 앞에 섰다. 다른 곳에 비해 월등한 크기의 저택 앞에선 제이슨이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다가갔다.

    “공작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약속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트랑 왕국의 왕가에서 왔다고 알려주시면 됩니다.”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안에 통신 장비로 연락을 취하니 안쪽에서 여자 기사 한 명이 나왔다. 그녀는 경비병에게 제이슨을 소개받더니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공작부인을 모시는 호위 기사 제니라고 합니다.”

    “트랑 왕국에서 온 제이슨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부인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안으로 드시죠.”

    제니의 뒤를 따라 걸은 제이슨은 대저택 안으로 들어가서는 감탄했다. 수도에 지은 대저택인데도 본가의 건물보다 더 큰 곳이었다.

    제니를 따라 걸으며 제이슨은 비록 정략결혼을 했을지언정 공주가 왕족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은 제니를 따라 도착한 방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았다. 호위로만 기간트 라이더들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새삼 공작부인의 위세를 알 수 있었다.

    제니가 문을 열자 제이슨도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우아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와서 앉아요.”

    “감사합니다.”

    제이슨이 앉자 베르제 제국의 재상인 칸트 공작의 부인이자 트랑 왕국의 공주. 플로렌이 직접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어요. 아버지 장례식이 미뤄졌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어떻게 된 거죠?”

    제이슨은 군말하지 않고 품에서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건넸다.

    “우선 이것을 확인해 보시죠.”

    플로렌은 미소를 지은 채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확인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 제니의 안색도 그 영상을 확인하면서 딱딱하게 굳어졌다.

    플로렌은 영상을 모두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뭐죠?”

    제이슨은 또 하나의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건넸다.

    “이거까지 보고 말씀하시죠.”

    플로렌은 다시 한번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 나오는 것은 카이트의 얼굴이었다.

    -이걸 보고 있다는 건 상황을 제대로 들은 거겠지? 누나. 증거 영상에서 본 것처럼 아버지는 살해당했어. 쉬안은 그 일의 주동자로 처형했고, 그와 관련된 이들은 모조리 처형했어. 하지만, 아직 하이젤 왕국은 손을 대지 못했어. 그것 때문에 칸트 공작에게 전해야 할 영상 기록 수정구가 있어. 그러니 그 친구에게 공작을 만나게 해 줘. 부탁해.

    플로렌은 그 내용을 모두 보고는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정말 아버지가 살해당하셨다는 건가요?”

    “예. 증인들의 자백 영상은 직접 보신 바와 같습니다.”

    플로렌은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시는 길에 고통스러웠을까요?”

    “노쇠의 저주는 심장에만 급격한 노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고통보다는 탈력감이 컸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랬나요? 그래서 흑마법사는 어떻게 됐나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힌 덕분에 고통 없이 죽었지만, 그 전까지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플로렌은 제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작님에게 저녁 시간 비워달라고 전해드려. 꼭 뵈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제니가 밖으로 나가자 플로렌은 제이슨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차를 들어요.”

    “예.”

    제이슨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플로렌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카이트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면 꽤 믿나 봐요.”

    “좋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요즘 남편이 바쁘기는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항상 바쁘시겠죠.”

    다른 이도 아니고 대륙 최강인 제국의 재상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그가 안 바쁠 수가 없다.

    “이번에 일을 맡겼던 용병단 하나가 잠적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제이슨은 괜히 뜨끔했다. 레드 드래곤 용병단 이야기 같았으니까.

    저녁에 만나 본 칸트 공작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깐깐한 인상이었는데 플로렌을 볼 때는 꿀이 떨어지는 눈빛을 보여서 의외였다.

    칸트 공작은 칼 한 번도 안 쥐어 보았다고 하지만 다른 오러 유저들 조차 고개를 숙이게 하는 묘한 기세가 느껴졌다.

    식사 시간 내내 플로렌과 가벼운 담소만 나눈 그는 식사가 끝나자 서재에서 차 한잔하자며 제이슨을 불렀다.

    “반갑네. 트랑 왕국에서 왔다고?”

    “예. 카이트 국왕 전하의 뜻으로 왔습니다.”

    “큰처남이 국왕이 됐군. 그래 큰처남이 내게 뭘 전하라고 하던가?”

    제이슨은 영상 기록 수정구를 건넸다. 칸트 공작은 영상 기록 수정구를 받아서 내려놓고는 말했다.

    “다른 전할 말이 있다고 하던가?”

    “그것을 전하고 답을 듣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오늘은 푹 쉬시게. 내가 확인하고 답을 전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간 제이슨은 창틀에 기대고 서서 대저택을 돌아보았다.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과 곳곳에 보이는 기간트 라이더들.

    용담호혈이 따로 없었다. 제이슨은 창밖으로 저 멀리 궁전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심장.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용담호혈이 저기에 있었다. 그 거대한 궁전을 바라보던 제이슨은 침대로 가 몸을 던졌다.

    하지만 잠을 청할 시간은 없었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칸트 공작이 직접 나타났다.

    “지금 함께 가지.”

    제이슨은 군말하지 않았다. 밀사로서 자신은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제시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칸트 공작을 통해서 제국의 황제를 만나는 것까지가 자신이 할 일이었고, 카이트 국왕의 생각은 통했다.

    마차는 칸트 공작이 미리 말을 해 놓았던 건지 거침없이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마차가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내리지.”

    제이슨이 칸트 공작을 따라서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여인이 서 있자 칸트 공작이 말했다.

    “아공간 주머니는 맡기게.”

    제이슨은 순순히 팔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서 여인에게 건넸다. 어차피 황제 앞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열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는 베제트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칸트 공작을 따라서 걸어간 곳은 대전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대전의 옥좌에 앉아있는 사내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나이는 삼십 대라고 들었는데 보기에는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칸트가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늦은 시간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상이 이유 없이 불렀을 리는 없으니 됐다. 그보다 트랑 왕국의 밀사라고?”

    “예. 폐하.”

    무료해 보이는 사내. 베제트 제국의 현 황제 펠레드 폰 안카에트 베제트가 제이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칸트의 뒤편에 서 있는 제이슨을 보고 펠레드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친구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이슨이 천천히 무릎을 굽히자 그를 바라보던 펠레드가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말을 꺼냈다.

    “딱 보기에도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대공이 보기에는 어떤가?”

    제이슨은 그제야 펠레드의 뒤에 선 이에게 시선이 갔다. 지금까지 정말 있는 줄도 모르게 서 있던 사내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시선이 가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거구의 사내였다.

    사방으로 뻗친 수염을 지닌 사내는 제이슨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기 드문 인재군요.”

    “호오. 대공처럼 칭찬이 박한 이의 말을 들으니 탐나는군.”

    그제야 제이슨은 거구의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국의 검이자 수호검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마스터.

    수호검 샤이드 대공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위명과 다르게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고 있었다. 물론 무료해 보이면서도 그 위엄과 존재감을 마구 뿌려대는 펠레드 때문이라고는 해도 마스터씩이나 되어서 이렇게 존재감마저 감추고 있는 모습은 그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열중인지 알 수 있었다.

    “어때? 제국으로 넘어올 생각 없나? 마음만 있다면 수호검의 제자로 들어갈 수도 있고, 원하는 자리 하나 내줄 수도 있다. 뭘 해도 트랑 왕국보다 대접이 더 좋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는 이걸 전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제이슨이 미리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놓았던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건네자 그걸 받아 든 칸트 공작이 펠레드 황제에게 그걸 건넸다.

    펠레드 황제가 영상 기록 수정 구슬을 손에 들고 돌리다가 영상을 틀었다. 제이슨이 말릴 새도 없었다. 그곳에는 카이트 국왕이 정중하게 펠레드 황제에게 인사하고 용건을 말하고 있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직설적인 카이트 국왕의 말을 들은 펠레드 황제는 미소를 지은 채 옥좌에 등을 기댔다.

    “카이트 국왕이라고 했던가?”

    “예. 폐하.”

    “이번에는 조금 말이 통하는 친구가 된 것 같군.”

    펠레드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젓고는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군.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말고 일이 끝나거든 술이나 한잔하자고 전해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펠레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고생했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제국의 문은 열려 있으니 두드려라.”

    손을 휘 내저은 펠레드가 일어나서 대전을 나가니 칸트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가 저리 말씀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자네도 그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나?”

    “이 소식을 전하께 전해드려야죠.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선 함께 가지.”

    칸트 공작을 따라 걷던 제이슨은 대전의 입구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걷다 보니 대전의 기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샤이드 대공이 칸트 공작과 눈을 마주치더니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잠깐 시간 괜찮겠나?”

    칸트 공작이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칸트 공작이 먼저 떠났고, 샤이드 대공과 제이슨 둘이 남았다. 샤이드 대공은 제이슨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거구에 과묵한 성격인지 별다른 말도 없이 한참을 걷던 샤이드 대공은 온통 널찍한 공터에 도착해서 걸음을 멈췄다. 궁전 안에 왜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제이슨이 먼저 묻자 샤이드 대공은 담담히 답했다.

    “폐하의 취미 중 하나라네. 기간트 대련을 관람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그래서 이곳은 대련장이라네.”

    제이슨은 멀뚱히 샤이드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는 왜 이곳에 데리고 오신 겁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생겨서.”

    샤이드 대공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단순히 검을 뽑아 들었는데 세상이 변했다. 칼날 앞에 선 섬뜩함. 샤이드 대공은 제이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인 좀 해볼까?”

    “저기 확인은 검 좀 치우고 하면 안 될까요?”

    샤이드 대공이 검으로 제이슨을 겨누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역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샤이드 대공이 웃었고 제이슨은 땀을 삐질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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