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밀사(1)
제이슨은 그들 면면을 살펴보았다. 기사들의 수가 줄었으니 엘렌이 저 넷 중 하나일 수 있었다. 제이슨의 시선이 날카롭게 네 명의 기사들을 향하자 그들도 눈을 부라렸다.
적대국의 기사들이다 보니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제이슨은 그들을 살피며 물었다.
‘누가 엘렌이지?’
-젠장. 봉인돼서 정확하게 읽을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거?’
-내 힘이 봉인된 만큼 엘렌도 명확하게 너를 느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베제트는 느낄 수 있을 거다.
‘그럼 내가 손핸데? 게다가 어차피 다른 이로 변신도 가능하다고 했잖아.’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라고 느낀 것이 사실은 베제트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그런 오해가 도움될 거다.
제이슨의 시선이 알제리 왕국의 기사들을 향했다. 네 명의 기사 중 하나가 엘렌이라고 하는데 그걸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든 엘렌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 지금 알아낸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네 힘을 숨겨 봐. 시간을 벌어보자.’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기다려.
알제리 왕국 사절단의 호위 기사를 마음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일이 복잡하게 꼬일 테니까.
제이슨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톨로프가 앞으로 나서서 얘기를 꺼냈다.
“왕궁이 소란스럽더군요.”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굳이 더 알려고 하지 말라는 듯 말을 끊는 모습에 톨로프 왕자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마 대충 파악은 하고 왔을 테지만, 함부로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
“장례식과 즉위식까지 참여하고 가려고 했지만, 본국에 일이 있어 그만 돌아 가봐야 할 듯합니다.”
카이트는 그 말에 톨로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것이 다 거짓말인 걸 알지만, 이런 복잡한 시국에 적국의 왕자를 데리고 있는 것도 부담이 컸다.
카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제리 왕국의 호의는 잊지 않겠소. 조심히 돌아가시오.”
“1왕자의 배려는 잊지 않겠소. 그럼.”
톨로프가 일어나서 멀어지는 와중에 제이슨은 한 호위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유독 자신을 오랫동안 보고 있는 자.
그 순간 육감이 반응했다. 저자가 엘렌이다.
자기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쥐는 모습에 상대는 눈웃음을 짓고는 멀어졌다.
‘들켰을까?’
-아니. 지금은 봉인이 오히려 도움됐다.
제이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카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문 장소로 가겠다.”
“가시죠.”
제이슨과 엘레나, 왕실 근위 기사까지 카이트의 호위를 맡았다. 심문 장소에는 의자에 묶여 있는 6왕비 모레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로 처음 보는 도구들을 꺼내놓고 있는 캐리를 볼 수 있었다.
카이트가 오자 모두 옆으로 물러났다. 벡스가 다가오자 카이트는 손을 들어 그를 말리고는 모레아 앞으로 걸어갔다.
“모레아.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그대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군.”
모레아는 고개를 들어 당당하게 카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어떤 제안을 하려고 왔나요?”
“제안이라···.”
카이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서 모레아의 손등에 찍었다. 모레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카이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모레아는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아버지를 암살한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 모두 얘기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모레아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카이트는 단검을 뽑아내고는 말했다.
“어차피 배후는 밝히게 되어 있다. 왕궁 내에는 고문관도 따로 있으니까. 고통 없이 죽고 싶다면 순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레아는 그제야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말을 꺼냈다.
“누구 이름을 불러주길 원하지? 하이젤 왕국의 국왕? 알제리 왕국의 국왕? 그도 아니면 쉬안 왕자? 누구의 이름이 필요하지?”
카이트는 경멸어린 시선으로 모레아를 바라보며 답했다.
“진실. 진실이 필요하다.”
“아직 어리군.”
쫘악!
모레아의 따귀를 날린 카이트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진실을 듣고 싶다. 가능하겠나?”
캐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몇 가지 아티펙트를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가한다.”
카이트가 물러가자 캐리는 모레아의 손등에 난 상처에 품에서 꺼낸 약병에서 한 방울의 액체를 떨어트렸다.
“끄으읍!”
단검에 꿰뚫릴 때도 비명 한 번 안 지르던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스펙터의 영체에서 뽑아낸 거예요. 아마도 당신은 가장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거예요. 우선은 이것부터 시작하죠.”
캐리는 모레아의 입에 헝겊을 물려주고는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저랑 같이 가요.”
“그냥 둬도 되는 겁니까?”
“끔찍한 고통에 너덜너덜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니 지금은 시간을 줄 때에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이골이 난 것인지 캐리는 아주 능숙했다. 대체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캐리는 함께 마법 통제 마법진으로 향하는 길에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그때 입었던 마갑은 뭐죠?”
“제 개인 장비입니다.”
“인가받지 않았는데 사용했잖아요.”
“고대 던전에서 얻은 물건인데 사용할 수 있더군요.”
“연구해볼 수 있을까요?”
제이슨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테르 코어와 그걸 이용한 소형 기간트 베제트는 내주고 싶다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요? 아쉽네요.”
“미안해요. 이건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저랑 하나가 된 상태라 내줄 수가 없어요.”
고대 마도 시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장비였지만, 이걸 내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강적을 만난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확실한 대비책. 기간트를 몸에 둘렀을 때의 제이슨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법 통제 마법진에서 캐리는 모두 다섯 개의 아티펙트를 인가받았다. 제롬은 이번에는 군말하지 않고 다섯 개의 아티펙트를 모두 인가 내주었다.
캐리는 심문실로 돌아와서는 눈이 까뒤집힌 채 눈물을 쏟고 있는 모레아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좋은 모습일 거 같은데 굳이 구경하시겠어요?”
제이슨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펠릭스와 엘레나가 지키고 있었고, 모레아가 빠져나갈 구석은 없어 보였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리를 독려했다.
“수고해요.”
“머지않아 다 토해내게 될 거예요.”
어딘가 능숙해 보이는 캐리의 말에 제이슨은 의외의 그녀의 재능을 발견한 것을 깨닫고는 밖으로 나갔다.
국왕이 암살당했고, 그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구금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왕궁은 흉흉한 바람이 불었다. 장례식과 즉위식에 참석하겠다고 왔던 귀족들은 슬슬 도망칠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빠져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례식이 연기되었다. 제대로 한을 풀지 못하고 가실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카이트는 딱 닷새 만에 진실을 듣게 됐다.
“쉬안, 그리고 베로스. 이미 오래전부터 하이젤 왕국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거군.”
“예. 모레아 6왕비가 국왕 전하를 만나는 것부터가 그들의 각본이었습니다.”
카이트가 쥔 주먹이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이 다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카이트는 그 상태로 묵묵히 벡스의 보고를 들었다.
“흑마법사인 모레아를 어떻게 구한 거지? 진짜 왕비와 친한 사이던가?”
“그 부분은 재미있더군요. 왕비가 다른 왕비들과 후궁을 처리하기 위해 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이젤 왕국에 역대급 한파가 불어 닥치면서 연속해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국왕은 저희 왕국의 북부 4성을 탐냈습니다.”
“베로스가 지금까지 잘 막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베로스를 유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로스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이 일의 주동자가 된 것 같습니다.”
카이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찾아가려고 한 건가? 아버지에게 국혼 이야기를 넣었던 것도 다 계획이었다는 건가?”
“국왕 전하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이트는 긴 숨을 토해내고는 말했다.
“벡스. 쉬안의 외가 쪽 인물들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역모를 꾸민 이들에 대한 철퇴를 내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겠다.”
“명을 받듭니다.”
카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벡스가 물었다.
“하이젤 왕가에서 온 연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로니카 공주의 구금에 대한 건 말인가?”
“예. 하이젤 왕국에서 국경 부위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무력시위라도 할 생각인가 봅니다.”
카이트의 입에 조소가 그려졌다.
“웃기는 소리군. 역모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심판을 내릴 때 베로니카 공주라고 무사할 것 같은가?”
벡스가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자 카이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벡스 장군을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을 잘라 하이젤 왕가에 돌려보낼 것이네.”
제이슨은 캐리와 함께 카이트에게 초대되었다. 낮에만 해도 벡스가 왕실 근위 기사들은 물론이고, 중앙군의 대표 기사단인 검은 표범 기사단이 함께 워프 게이트를 타고 떠나갔다.
쉬안의 외가는 물론이고, 베로스 장군일가까지 모조리 잡아들이는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었다. 저항하는 이들은 아마 없으리라.
벡스가 대동하고 움직인 기사단은 모조리 기간트 라이더들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영지는 그대로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왕궁에 와있던 귀족들은 그대로 체포됐고, 각 영지에 있는 가족들까지 모조리 체포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왕궁에 부는 피바람 때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런 와중에 불려온 식사 자리에서 카이트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제이슨과 캐리는 그의 눈치를 보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카이트는 스테이크를 다 먹도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의 심기가 편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차와 케이크 앞에서 카이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이게 첫 끼니였네.”
카이트는 그동안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의 눈빛이 흉흉한 것을 보면 복수의 화신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흉흉한 눈빛에 미소를 머금으니 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씩 얘기하지. 우선 캐리. 이번에 보여준 심문 기술이 대단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이미 모두 얻었습니다.”
“모레아 왕비의 물건 정도로 괜찮겠나? 원하는 것을 말한다면 챙겨주겠다.”
“괜찮습니다.”
카이트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든 말하게. 그대의 공은 실로 크니까.”
캐리가 와서 국왕 암살 사건의 진범을 밝혀냈고, 그들을 고문해 진실을 알아냈다. 그녀의 공은 지대했다.
고작 모레아 6왕비의 모든 물건을 가진 정도로는 보답이 되지 않으리라.
카이트는 캐리에게 더 말을 꺼내지 않고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이슨 백작. 그대에게 청이 하나 있네.”
“하명 하십시오.”
카이트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제이슨이 홀로 벌인 일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홀로 하이젤 왕가의 푸른 늑대 기사단을 상대한 것은 물론이고 쉬안의 편에 선 왕실 근위 기사들마저 제압했다.
제이슨의 무력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제국에 밀사로 가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