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45화 (46/151)
  • 【45】 압도(1)

    베로니카 공주를 지키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서슬 퍼런 시선이 벡스 장군을 향했다.

    “무엄하다!”

    하이젤 왕가의 상징인 푸른 늑대를 새긴 푸른 늑대 기사단의 단장 플린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벡스 장군은 그런 플린트를 향해 검을 겨눈 채 말했다.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의 용의자를 체포하려는 중이다. 물러나라.”

    플린트는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아무리 그들이 하이젤 왕국에서 왔다고 하나 정신 나간 척하고 국왕 전하의 암살 용의자로 몰리면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벡스 장군의 검은 플린트를 지나 6왕비 모레아를 향했다.

    “6왕비 모레아. 당신을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한다. 저항한다면 사지를 잘라 숨만 붙여서 끌고 가겠다.”

    베로니카가 모레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베로니카 공주. 이건 모함이에요.”

    베로니카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모레아 6왕비는 제 어머니의 의자매로 제게는 이모님이나 다른 없는 분이에요. 이렇게 모함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벡스 장군은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플린트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서기에 제이슨도 검을 뽑았다. 플린트는 제이슨이 앞으로 나서며 뿜어내는 기세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꽃 전차라 불리는 벡스 장군은 알제리 왕국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이름. 그 이름은 하이젤 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의 경지가 대단한 것도 있었지만, 그의 전공은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옆에 선 제이슨이 뿜어내는 기세 또한 벡스에 못지않았다. 플린트 또한 하이젤 왕국 제 일 검인 오러 유저로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제이슨에게 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벡스 장군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계속 앞을 막는다면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의 용의자를 도운 것으로 간주. 모두 체포하겠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이건 경고입니다.”

    베로니카 공주에 대한 경고까지 더해졌다. 플린트는 이를 악물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난동을 부릴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모인 이들만 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곳은 적의 심처.

    기간트도 없이는 도망도 칠 수 없는 곳이었다.

    “공주님. 물러나야 합니다. 정식 재판을 요청하는 정도가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겁니다.”

    베로니카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따지고 들었다가는 같이 잡혀갈 판이었다.

    “정식 재판을 요청하겠어요.”

    벡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정식 재판이 벌어질 겁니다. 이 일에 연관된 모든 이들은 재판장에 올라가게 될 겁니다.”

    그 서늘한 시선을 마주한 베로니카가 긴장할 때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모레아가 베로니카의 뒤로 가서는 목에 팔을 두르고는 단검을 겨눴다.

    베로니카가 흠칫 놀랐을 때 모레아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게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네.”

    “무슨 짓이냐!”

    모레아는 플린트의 외침에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이 단검은 이렇게 보여도 일곱 가지 독을 조합해서 만든 독을 발랐거든. 여기 찔리면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 움직이지 마.”

    모레아의 말에 플린트의 안색이 굳어졌다. 모레아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대로 워프 게이트까지 가야겠어. 호위를 부탁해.”

    플린트가 그 말에 베로니카 공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푸른 늑대 기사단이 베로니카 공주와 모레아를 막아서는 걸 보고 벡스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왕궁 근위 기사들은 들어라. 이곳에서 저들은 한 발짝도 물러나게 하지 마라.”

    공주 일행이 머무는 곳을 지키던 왕실 근위 기사 둘이 나서서 근위병들에게 손짓했다. 근위병들까지 나서서 그들을 포위하자 모레아가 씨익 웃었다.

    “플린트 경. 이대로 공주가 죽어도 좋다는 건가?”

    “여기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길을 열어줘야지.”

    플린트가 베로니카를 바라보다가 검을 돌려 벡스를 가리켰다.

    “길을 열어주시오.”

    “그렇게는 안 되겠소.”

    “정말 공주님이 위험해지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거요? 만약 공주님이 위험해진다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소.”

    벡스의 시선이 모레아를 향했다.

    “이렇게 하면 정식 재판까지 가지도 못한다. 그러니 기회를 줄 때 공주를 풀어줘라.”

    “아하하하.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어?”

    모레아는 미소를 지은 채 베로니카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왕궁 내에서 정말 국왕 암살범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못할 것도 없지.”

    벡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국왕 전하 암살범을 돕는 자들 또한 조력자로 보아 모두 체포한다. 불응하는 자는 베어도 좋다.”

    벡스 장군의 시선이 플린트를 향했다. 플린트의 안색이 붉어졌다.

    “벡스 장군!”

    “국왕 전하 암살범과 함께 있던 그대들 또한 조력자로 보아 체포한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면 재판에서 참작해주겠다.”

    플린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지금 상황이 중과부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순순히 체포된다고 공주가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푸른 늑대들은 모두 무기를 들어라.”

    차차창.

    푸른 늑대의 기사들이 모두 검을 뽑는 것을 보고 제이슨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정리해도 됩니까?”

    “플린트는 내가 맡지.”

    둘이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 뒤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라!”

    제이슨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쉬안이 베로스와 ‘눈의 꽃’ 기사들에 이어 왕실 근위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다. 아마도 쉬안의 편을 들어주는 왕실 근위 기사들로 보였기에 제이슨은 벡스를 돌아보았다.

    벡스는 잠시 검을 내리고 기다렸다. 대충 그의 의중을 파악한 제이슨도 잠시 검을 내렸다.

    쉬안이 걸어와 6왕비 모레아를 흘끔 보고는 그들의 편에 가서 선 채로 소리 질렀다.

    “모두 길을 열어라. 베로니카 공주는 내 약혼녀이고 그녀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는데 동조한 자들은 내가 살려두지 않겠다.”

    쉬안의 시선이 벡스에게 향했다.

    “길을 열어라.”

    “그건 안 되겠습니다.”

    쉬안의 안색이 붉어졌다.

    “여기서 베로니카 공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하이젤 왕국과의 외교적 문제를 어떻게 하려는 거냐! 정신 차려라!”

    하이젤 왕국과의 외교 상황이 좋아지는 중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쉬안이 왕위를 물려받으면 트랑 왕국은 잘게 쪼개질 판이었으니까.

    벡스가 주저할 때 제이슨이 앞으로 나섰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쉬안의 눈이 제이슨을 향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드는 거냐?”

    “쉬안 왕자님께서는 국왕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뭐라?”

    쉬안이 제이슨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감히 그딴 말을 입에 담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는 건가?”

    “그럼 물러나십시오. 하이젤 왕국도 이미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의 용의자인 6왕비 모레아님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이젤 왕국의 왕비 마마와 친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이젤 왕국 전체가 혐의를 벗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이젤 왕국에 그 혐의를 물어 공주와 푸른 늑대 기사단장과 기사들을 처형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요.”

    쉬안은 볼을 푸들푸들 떨다가 입을 열었다.

    “베로스. 내가 이런 말까지 들어야 되겠습니까?”

    베로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벡스. 이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베로니카 공주가 하이젤 왕국의 왕실에서 가지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물러나라. 이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벡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군. 하이젤 왕국에서 국왕 전하 암살 사건의 배후가 된다면 이건 전쟁을 일으켜야 할 일이다. 제이슨.”

    “예.”

    “제압해라.”

    상대의 병력이 더 많았지만, 벡스 장군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검에서 불타오르는 플레임 오러를 보고 베로스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이런 미친놈이!”

    베로스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냉기가 맺혔다. 프로즌 오러를 일으켰다. 둘의 오러가 충돌하는 순간 제이슨도 몸을 날렸다.

    제이슨이 끼어들자 마주쳐 나온 이는 플린트였다.

    쩌엉!

    제이슨의 오러와 플린트의 오러가 부딪쳤다. 플린트는 제이슨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만 한 이가 있을 줄은 몰랐군.”

    제이슨은 플린트의 오러 블레이드와 마주한 채 자신을 가늠해 보았다. 지금까지 강자들을 만나지 못해서 몰랐는데 이렇게 부딪쳐 보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적어도 오러 운용법은 누구보다도 뛰어나 졌다는 것을.

    제이슨의 오러 블레이드가 점점 더 뚜렷해지면서 플린트의 오러 블레이드를 베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플린트의 눈이 커졌다.

    “핫!”

    플린트가 힘껏 제이슨의 오러 블레이드를 밀어내고는 검을 찔러왔다. 싸워보니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의 오러 블레이드의 뛰어남을.

    하지만 자신은 하이젤 왕국 제 일의 검호다. 단순히 오러 블레이드가 뛰어난 것은 상관없었다. 오러 유저들 간에 승패를 가르는 데는 오러 블레이드의 뛰어남은 큰 효용이 없었으니까.

    검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듯 플린트가 검을 찔러넣었고, 제이슨이 그걸 쳐내는 순간 플린트의 검이 점점 더 빨라지고 더 많아졌다.

    “길을 열어라! 왕궁을 벗어나겠다!”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여긴 플린트의 외침에 하이젤 왕국의 푸른 늑대 기사들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기간트 라이더인 그들은 기간트를 소환하지 못해도 충분히 강하다.

    그들의 조력이 더해진다면 아무리 제이슨이라고 해도 플린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길을 열어주게 된 상황.

    쉬안도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냐! 길을 열어라!”

    쉬안이 데리고 온 왕실 근위 기사들까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 건지 벡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쪽에도 왕실 근위 기사와 근위병들이 있었지만, 수가 적었다.

    제이슨은 그걸 보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전력으로 오러의 파편을 쏟아냈다. 기간트를 타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집단전에 이만큼 효과적인 공격도 드물다.

    쩌저저정!

    플린트가 뒤로 주루룩 밀려났고, 푸른 늑대 기사단은 황급히 피했다. 막아내기에 위협적인 공격이라 그들이 피한 덕분에 뒤편에 있던 왕실 근위 기사들이 공격에 노출됐다.

    콰콰쾅!

    그들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서 막아냈는데 방패가 모조리 박살 났다. 인가된 아티펙트들 중 하나인 방패였지만, 오러를 받아내는 것으로 수명이 끝났다.

    제이슨이 오러의 파편을 쏟아낸 사이에 그걸 받아냈던 플린트는 마음을 굳혔다. 제이슨이 가진 오러의 양은 자신의 예상을 넘어섰고, 저런 식으로 사방에 공격을 퍼부으면 공주가 위험했다.

    그것을 알았기에 플린트는 단번에 승부를 내기로 작정했다. 그가 땅을 박차고 간격을 좁힌 채 연달아 검을 찔러넣었다. 플린트를 하이젤의 정상에 서게 해 준 연환 찌르기였다.

    잔상을 일으킬 정도의 찌르기. 그 무수한 찌르기를 보고 제이슨이 전력을 다해 검을 쳐내는 사이 좌우에서 푸른 늑대 기사 둘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오랜 시간 합격을 훈련한 것처럼 합이 잘 맞았다. 다른 둘의 공격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은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쩌저저정!

    플린트의 찌르기를 받아내던 제이슨이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에 얕지만, 기사들의 검에 스쳤다. 옷이 갈라지고 피가 번져 나왔다.

    이대로라면 위험한 상황. 벡스의 상황도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베로스 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그 차이가 명백하지 않았고, 왕실 근위 기사들이 아티펙트까지 동원해서 공격을 퍼붓고 있었으니까.

    물론 시간만 끌어도 이곳에 왕실 근위 기사들이 몰려올 테고 승기는 넘어올 터였다. 그걸 알았기에 벡스도 체포를 감행했던 것.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틸 수 없을 듯 보였다.

    -쯧. 역시 나 없이는 안 되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은 거 아냐?”

    -봉인이 이제 조금 풀렸다. 그래도 내가 현신은 할 수 없어.

    날아드는 검격을 받아내면서 제이슨이 투덜거렸다.

    “그럼 별 도움도 안 되잖아.”

    -이거면 충분할 거다.

    촤라라락.

    제이슨의 가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몸을 베제트가 감싸 안았다. 제이슨은 자신을 감싼 베제트를 느끼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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