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고대의 마법서(1)
레이나는 연구소에서 나온 제이슨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살벌하다 못해 숨 막히는 살기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형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에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은 어때? 치료가 가능하대?”
“아니.”
짧게 말을 끊은 제이슨이 물었다.
“아직 알제리 왕국에 침투 요원들 남아있지?”
“그렇기는 한데. 왜?”
“프레이 백작성에서 가장 가까운 요원이 누구야?”
“프레이 백작? 우리가 주시하는 자가 아니라서 가장 가까운 이도 코어 카트로 달려서 사흘 거리 정도에 있어.”
“연락해서 좌표 잡아줘.”
레이나는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좌표 잡아주고 보내주는 것까지는 상관없지만, 그곳에서 지원은 힘들어.”
“상관없어. 알제리 왕국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돼.”
전이었다면 블랙 아울의 힘을 빌리고자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 기간트를 타보고 알았다. 기간트를 탄 채로 엘하르트가 보여주는 영역의 전투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적수는 없다.
만약을 위해 엘하르트가 함께 간다면 성 하나 짓밟고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레이나도 제이슨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홀로 기간트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제이슨을 상대할 자는 몇 없어 보였다.
알제리 왕국에 오러 유저는 고작 다섯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과 마주칠 가능성은 적었으니까.
그리고 오러 유저를 상대한다고 해도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제이슨이 보여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잠깐만.”
레이나는 품에서 통신 장비를 꺼냈다. 통신 수정구는 영상을 같이 주고받는 것이라 그 크기를 줄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기는 손바닥만 했다.
“카르고. 레빗이다.”
-카르고 통신.
“좌표 설정을 부탁한다.”
-좌표 설정? 누가 와?
“그래. 두 명 갈 거야.”
-카르고 통신.
잠시 후 좌표를 설정했다는 말을 듣고 제이슨은 레이나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주면 돼?”
“이번에 다녀온 골드하고, 이쪽 좌표 설정하고 가져갈 것까지 생각하면 총 2만 골드.”
제이슨은 2만 골드를 건네주고는 단방향 장거리 텔레포트 장비를 넘겨받았다. 곧 통신 장비로 연락이 왔다.
-레빗. 좌표 설정 마쳤다.
좌표를 들은 레이나가 단방향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진을 작동시키고는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알제리 왕국 지도야. 필요할 것 같아서.”
“고맙군.”
제이슨은 수정구를 챙기고는 마법진 위에 올랐다. 엘하르트가 그를 따라서 마법진 위에 오르자 강렬한 빛과 함께 주변의 풍광이 변했다.
그곳에는 강아지 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어? 제이슨?”
“카르고. 오랜만이군.”
“형은 찾았어요?”
지금 막 절망의 뇌옥을 무너트리고 와서인지 아직 그 자세한 내용은 블랙 아울 요원들도 모두 알지는 못했다.
“찾았어.”
“다행이다.”
카르고가 환하게 웃자 제이슨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고맙다. 걱정해 줘서.”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요?”
“프레이 백작성과 제일 가까워서.”
“프레이 백작성? 안 가까워요. 서북쪽으로 코어 카트로도 사흘은 가야 해요.”
“알아.”
제이슨은 코어 카트를 꺼내고는 카르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그럼 수고해.”
엘하르트를 뒤에 태운 제이슨은 곧장 프레이 백작성이 있다고 알려진 서북쪽으로 달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고는 통신기를 꺼내 말했다.
“레빗. 제이슨은 떠났다.”
-목적지는 프레이 백작성이야. 넉넉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서 정보를 취득해 와.
“어, 지금 제이슨 보면 별로 따라가고 싶지 않은데요?”
-그럼 연락 기다린다.
뚝 끊어진 연락에 카르고는 울상을 짓고는 코어 카트를 꺼내면서 투덜거렸다.
“아이 씨. 걸리면 꿀밤으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던데.”
투덜거리면서도 카르고는 코어 카트를 출발시켰다.
벽에 그려진 고대 룬어를 해석하고 있던 중년 사내의 뒤로 젊은 귀족 하나가 다가왔다.
“보그스. 소식 들었나?”
고대 룬어를 해석하던 중년 사내가 돌아섰다. 고글을 들어 올린 그는 젊은 귀족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었다.
“어떤 소식을 말입니까?”
“절망의 뇌옥이 무너졌다는군.”
중년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재미있는 농을 하시는군요.”
“맞아. 검은 투견 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절대 무너질 리 없다고 알려진 곳이었는데 박살 났다고 하더군. 왕실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었는데 아직 잔해를 다 치우지 못해서 생존자가 누구인지 파악 못 했다고 해.”
“정말입니까?”
젊은 귀족, 단테 폰 프레이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이런 거로 농담해서 뭐해? 그보다 귀찮게 됐어.”
“뭐가 말입니까?”
“자네 부탁으로 절망의 뇌옥에 그 장난감을 보낼 때만 해도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은 몰랐지.”
보그스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인 단테는 취미가 고문이었다.
자신을 용케 찾아온 클라이에게 금제만 걸고 쫓아내려고 했을 때 단테가 자신에게 달라고 하더니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오죽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프레이 백작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죽이지는 말고 절망의 뇌옥에 넣어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프레이 백작이 발견한 고대 던전의 발굴을 멈추겠다고 했다.
그렇게 절망의 뇌옥으로 보내고 잊어버렸는데 그 뇌옥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테는 뒷짐을 진 채 고대 룬어가 새겨진 벽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물었다.
“그보다 진척상황은 어때? 자네가 호언장담한 대로 곧 이 안쪽의 물건을 확인할 수 있을까?”
“멀지 않았습니다. 7할 정도 해석이 끝났으니까요.”
“다행이군.”
단테가 보그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서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했으니 성과라도 보여야지. 안 그래?”
단테의 눈이 뱀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 보그스는 고글을 쓰며 말했다.
“곧 좋은 소식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단테는 콧노래를 부르며 보그스를 떠나갔다. 곧 그의 새로운 장난감의 비명이 들릴 것 같아 보그스는 귀를 막고는 다시 고대 룬어 해석에 집중했다.
사흘 만에 프레이 백작성에 도착한 제이슨이 프레이 백작성을 바라볼 때 엘하르트가 물었다.
-계획은?
“프레이 백작에게 다리우스의 행방을 물어야겠지. 그리고 놈을 만나서 한 점 한 점 회를 뜨며 내 형에게 한 짓에 대해 들을 생각이야.”
-고문 방법이라면 몇 가지 아는 것이 있다만.
“그거 잘 됐군.”
제이슨은 어둠이 내려앉은 프레이 백작 성의 성벽을 넘어 곧장 내성으로 향했다. 프레이 백작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별 어려움 없이 성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절망의 뇌옥이야 워낙 넓은 공간에 감지 장비가 되어 있어서 공간 왜곡 장치를 쓸 수 없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제이슨은 공간 왜곡 장치를 이용해서 단숨에 프레이 백작성 안까지 진입했다. 제이슨은 이번 일에 연관된 자들을 단 하나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백작성의 구조는 대부분 비슷했다. 백작성의 침실 위치를 파악한 제이슨은 곧장 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선 제이슨은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방안을 돌아보고는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제이슨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위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만든 후에 제이슨은 침대에 누워있는 사내 위에 올라탄 여인의 뒷목을 가격했다. 여자가 쓰러진 것도 모르고 사내는 허리를 흔들다가 목을 틀어쥐는 손길에 눈을 부릅떴다.
제이슨은 가면도 쓰지 않고 침대 위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검지를 들어 입을 가렸다.
“누···.”
목을 누르던 손이 입을 틀어막았고 사내의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갔다.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입이 막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이슨은 사내 위에 올라탄 여인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으면 해도 돼. 지원이 빠를지 내가 널 죽이는 게 빠를지 궁금하면.”
제이슨은 거기까지 말하고 손을 놓았다. 사내는 잘린 팔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제이슨은 침대 옆의 의자를 가져다 앉고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프레이 백작?”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슨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절망의 뇌옥으로 사람 하나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기억하나?”
프레이 백작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자르고 그 부위를 태웠다. 그리고 팔을 녹였지. 머리에는 금제까지 당했던데 기억하나?”
프레이 백작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제야 제이슨이 누구를 찾아왔는지 파악한 탓이었다.
“기억하오.”
제이슨은 검을 들어 프레이 백작의 잘린 어깨 반대쪽에 검을 올리고는 물었다.
“그가 이곳에 온 연유가 있을 터. 알고 있나?”
“그, 그는 영지 마도공학자인 보그스를 공격했고, 그에게 잡혀 험한 꼴을 당했소.”
“마도공학자 보그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프레이 백작은 눈을 굴렸다. 그 잠깐의 망설임에 제이슨의 검이 번뜩였다.
“끄아악!”
또 하나의 팔이 떨어지자 프레이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제이슨은 그가 비명을 지르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벅지에 검을 꽂았다.
“끄흡!”
“어디 있지?”
프레이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의 눈을 보니 자신을 살려줄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욕이나 시원하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개···.”
제이슨은 프레이 백작이 욕을 내뱉으려 하는 것을 보고 허벅지에 꽂았던 검을 비틀었다.
“꺼어억!”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뼈가 틀어지며 전해지는 고통 앞에서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그가 신음을 토하는 사이에 제이슨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주지.”
프레이 백작은 어금니를 깨물고 소리쳤다.
“웃기지 마!”
제이슨은 자신의 얼굴에 피를 토하며 소리치는 프레이 백작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허벅지에 꽂았던 검을 옆으로 그어 그의 다리마저 잘라냈다.
제이슨이 프레이 백작의 목을 치려고 할 때 엘하르트가 그 손목을 잡았다. 제이슨이 돌아보자 엘하르트가 담담히 말했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내고 죽여야지.
“말할 것 같지 않은데?”
엘하르트는 앞으로 나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프레이 백작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엘하르트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우드득.
프레이 백작은 머리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 입을 딱 벌렸다. 욕은커녕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엘하르트는 손을 놓더니 프레이 백작의 턱을 잡고는 물었다.
“그는 어디 있나?”
프레이 백작은 엘하르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엘하르트의 눈은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원한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금과 같은 고통을 줄 자였다. 자신이 죽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눈빛에 프레이 백작은 힘겹게 답했다.
“크···롤 산에서 발견···한 고대 던전을 발굴하고 있소.”
엘하르트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죽여 주시오.”
제이슨의 검이 프레이 백작의 목을 쳤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에 관심도 주지 않은 제이슨은 레이나가 준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수정구에서 떠오른 지도에서 크롤 산을 발견한 제이슨은 곧장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