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레이스(3)
딱 하루 만에 부관 베넷은 정보를 가지고 왔다.
“제이슨 폰 바론. 나이는 25세. 15세에 입대. 10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2월 12일 전역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특이 사항?”
“동부 전선에 배치된 것까지만 기록이 되어 있고 그 뒤로 군 생활 모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레이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발끝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동부 전선이면 불꽃 전차가 있는 곳이지?”
“예. 벡스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있는 곳이죠.”
“그 인간이랑 엮여서 좋을 게 없는데.”
그레이스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벡스가 동부 총사령관이 되기 전에 한 번 전장에서 부딪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용병단도 드래곤의 이름을 받기 전이었는데 그때 전장에서 부딪쳤을 때 처음 깨달았다.
재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오러 유저도 같은 오러 유저가 아니고, 마스터가 될 자가 있다면 아마도 벡스 같은 자일 거라고 여겼다. 그 뒤로 더 강해졌지만, 이미 벡스 장군은 동부 총사령관이 된 것은 물론이고 오러 유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10년 군역을 마치면 얼마나 벌지?”
“배정된 곳마다 세운 공마다 다르겠지만, 훈장을 받은 기록도 공로가 인정된 기록도 없습니다. 귀족의 자제이니 일반적인 군 생활을 했다고 했을 때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면 대략 1만 골드까지 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군인도 할만하네.”
“동부 전선이 봉급이 많은 편이긴 하죠.”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부 전선에서의 기록이 없다고 하니 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어떻게 하실 거죠?”
“한번 찾아가 보자.”
“직접 보시게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나아.”
안톤을 죽이고 자신들을 따돌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만나는 순간 알 수 있다. 그레이스가 일어나서 씨익 웃더니 아공간을 열어 옷들을 꺼내 침대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베넷은 한참 걸리겠다고 여기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트레버의 부름에 서재로 찾아간 제이슨은 엘하르트가 그림처럼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을 흘끔 보았다.
“눈이 안 좋아?”
엘하르트는 안경을 쓰고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답잖은 말을 들었다는 듯 다시 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트레버를 돌아보았다.
트레버는 제이슨이 돌아보자 낮게 속삭였다.
“도수 없는 안경이다. 예전에 내가 쓰던 거.”
“그걸 왜 주셨어요?”
“책을 볼 때 집중이 잘 된다나?”
제이슨은 픽 웃고는 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찾으신 거죠?”
“그린 드래곤 용병단이라고 알고 있니?”
“예. 대충은요.”
“그린 드래곤 용병단장이 혹시 초대해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대륙 3대 용병단의 단장이고 오러 유저로서 언제든 어떤 왕국에서든 백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작위 하나도 없는 용병일 뿐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무시 받을 이는 아니다. 사실 그녀 정도 되면 어느 귀족이든 자신의 성에 온 걸 알면 알아서 초대하려고 난리가 날 인물이다.
그녀 정도 되는 인맥을 쌓을 기회를 마다한다면 귀족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먼저 요청을 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초대하면 되죠. 함께 저녁 먹으면 되겠네요.”
“그래도 되겠니?”
“당연하죠. 누가 뭐라고 해도 이곳은 아버지 영지입니다. 영주가 원하는 대로 하셔야죠. 게다가 영지에 그녀 정도 되는 이가 찾아왔다면 만나는 봐야죠.”
“그만한 여인이 우리 영지에는 왜 온 것인지 짐작가는 바가 있니?”
“아뇨.”
“그래. 우선 헤이튼에게 말해놓도록 하마.”
제이슨은 서재를 나서서 복도를 걷다가 멈춰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성을 내려다보았다. 외성의 여관에 있을 그녀를 떠올린 제이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 정도 되는 거물이 나타났다면 보통 영주들이 먼저 알아서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직 바론 성에는 마탑 지부를 오가는 이들을 감시할 만큼의 인력이 없고 체계가 안 잡혀 있어서 성내에서는 그녀가 온 것도 몰랐다.
그래서 직접 초대를 요청했다. 그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의를 갖춘 편이라고 봐도 좋았다.
“만나보고 싶단 말이지?”
제이슨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몰랐다.
“그럼 만나야지.”
갑작스러운 거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성이 바삐 움직였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에 브렐리아나가 시녀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지만, 분위기는 성의 안주인의 취향을 따라간다. 그리고 조안나도 신나서 브렐리아나를 따라 다니며 배웠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파티도 아니고 단순한 저녁 초대일 뿐이지만, 브렐리아나가 열정적으로 임하니 제이슨도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트랑 왕국에서도 밀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보니 중앙 정계에 나가면 촌사람 취급받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래도 귀족가의 안주인이었다. 누리고 살았어야 할 것들은 못 누리고 살았던 것.
제이슨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트레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구나.”
“지난 일은 잊어버리죠.”
트레버는 제이슨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맙다.”
거의 내성을 새로 단장하는 수준의 준비가 끝나고 브렐리아나와 조안나는 꾸미러 들어갔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온 브렐리아나는 브랙스의 장신구를 하고 있었고, 조안나는 사교계에 나갈 때 입으라고 사준 옷을 입고 나왔다.
그것만으로 둘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옷이 날개라고 전역하고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 헤이튼이 다가왔다.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같이 갈까?”
트레버의 물음에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발치에서 그녀를 확인하고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안톤을 납치했었다. 그런 그녀와 마주할 생각을 하니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성의 저택 앞으로 나가니 마차에서 내리는 이가 있었다. 녹색 머릿결을 단정하게 정돈한 그레이스는 엘프와의 혼혈답게 아름다웠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그녀는 용병이라기 보다는 귀부인을 닮아있었다. 그녀와 함께 온 이들은 그린 드래곤 용병단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래서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처럼 보였다.
트레버가 직접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슴에 살짝 손을 얹고 눈웃음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린 그레이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너무 누추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레이스는 내성의 저택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백작 부인의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요.”
그레이스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브렐리아나에게 인사하다가 그녀의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올해 특별판으로 나온 브랙스 제품이군요. 이번 특별판은 저도 못 구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의 목에도 브랙스의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브렐리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들의 선물이라 더 뜻깊답니다.”
“그랬군요. 부럽네요.”
공통 관심사가 나타나서 그런지 그레이스는 삽시간에 브렐리아나와 친해져서 웃고 떠들며 식당으로 향했다. 제이슨은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섯 명의 인물들. 모두 기간트 라이더들이다.
어지간한 기사단 이상의 전력을 데리고 떳떳하게 성으로 들어온 그레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슨은 눈을 반짝였다. 로크가 보았다면 사고 치지 말라고 허리를 붙들 눈빛이었지만, 그는 지금 연구소에 있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레이스가 조안나의 옷을 먼저 칭찬했다.
“브랙스 한정판 드레스까지! 정말 예쁘네요.”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가족들은 슬슬 방심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그때쯤 제이슨을 향했다.
“반가워요. 어머니와 동생에게 브랙스를 선물한 멋진 남자분이 당신인가요?”
“제이슨이라고 합니다.”
그레이스의 에메랄드빛 눈이 탐색하듯 제이슨을 살폈다. 태연하게 눈빛을 받아내는 모습에 그레이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레이스는 장난처럼 물었다.
“뭘 하면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죠?”
브렐리아나와 조안나를 슬쩍 보며 묻는 것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제이슨은 담담히 답했다.
“그건 극비 사항이라서요. 알려드릴 수가 없겠네요.”
그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니 슬슬 몸이 달아오른다. 정령과 계약해서 기감이 발달한 그녀는 제이슨의 저 단단한 눈빛을 보니 확신이 섰다.
이 자다.
지금까지 숱한 전장을 살아남게 해주었던 본능이 알려줬다. 그렇다고 식당에서 칼부림을 곧장 할 수는 없었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제이슨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레이스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갔다. 제이슨도 자신도 이곳에서 결판을 낼 수 없음을 알았다.
제이슨도 부드럽게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만, 손에 든 포크가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본 그레이스는 깨달았다. 자신만 눈치챈 것이 아니라 제이슨도 자신이 눈치챘음을 확신했다.
서로의 의중을 숨긴 채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레이스는 가지고 온 선물을 풀었다. 간단한 선물이라고 나눠주는 물건을 보고 제이슨은 속으로 웃었다.
제이슨이 정령을 따돌리려고 던져놓고 왔던 정령석이었다.
“예쁘네요.”
“정령들이 좋아하는 돌이죠. 혹시 본 적 있나요?”
“아뇨.”
“정령석은 정령이 좋아해서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정령이 항상 곁에 머문다고 해요. 정령이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노화 방지에 좋답니다.”
브렐리아나가 눈에 띄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제이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화 방지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그 효과는 정말 미미하다.
정신 나간 마법사가 측정하기로 대략 1년에 하루 정도 노화 방지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약을 파는 그녀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어머니가 좋아하니 됐다. 하지만 저걸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내려놓았다는 것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도발이다.
그레이스는 제이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언제고 술 한잔해요. 군인이었다니 말이 통할 것 같은데.”
제이슨은 자신을 초청하는 말에 미소로 화답했다.
“미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역시 화끈하네요. 그럼 내일 저녁 어때요?”
“여관으로 찾아가죠.”
“기다릴게요.”
그레이스는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떠났다. 그녀의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브렐리아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굉장한 미녀더구나.”
“그렇기는 하죠.”
“사근사근하고 말도 잘 통하고.”
제이슨이 돌아보자 브렐리아나가 미소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잘 만나보렴.”
그녀가 약속했던 술자리가 뭔지도 모르고 말씀하시는 모습에 제이슨도 웃으며 멀어지는 마차를 두 눈에 담았다.
“예. 잘 만나 볼게요.”
만나기는 만날 생각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