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기간트 마스터-4화 (5/151)
  • 【4】 납치(2)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기사가 자신의 말발에 넘어가 키스를 하려는 순간 여기사가 사라지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가면을 쓴 이가 서 있었다.

    “누, 누구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상대는 여유 있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확인차 묻겠다. 안톤 폰 테롤이 맞나?”

    “그래! 내가 테롤 백작의 아들 안톤이다.”

    가면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컥!”

    이가 몇 개나 부러졌고,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런데 주먹은 멈춘 것이 아니었다.

    뻑! 빠각!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튄다.

    “으아악! 왜, 왜 이러는 겁니까?”

    질문은 없었다. 무차별적인 폭력 앞에서 안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주세요!”

    하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사지가 부서져 덜덜거리면서 안톤은 혼절할 것만 같으면서도 혼절하지 않는 자신을 저주하는데 가면의 사내가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가면의 사내가 포션을 먹이고 부어서 치료해주자 그가 가한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었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효과가 좋은 포션인지 부러졌던 뼈가 빠르게 아물었다. 통증이 가시자 안톤은 조금 살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던 가면의 사내는 안톤의 표정이 좋아지자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악! 악!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질문이라도 던지기를 바라며 안톤은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혼절했던 여기사가 깨어나 안톤이 사라진 것을 밝혔고, 테롤 백작은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고대 대규모 던전의 입장 순서가 정해질 수도 있는 일. 그러니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이번 일에 나섰다.

    “그런 거라면 내게 맡겨요.”

    그린 드래곤 용병단의 단장 그레이스가 나서서 하는 말에 모두들 수긍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프 엘프인 그녀는 정령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으니까.

    “이번 일은 우리가 맡겠다.”

    베로스 장군이 나서자 그레이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베로스, 당신의 여기사가 놓쳤는데 당신에게 일을 맡기라고?”

    “그러니까 내가 맡겠다는 거다.”

    “웃기는 소리. 뒤를 쫓을 방법은 있고?”

    베로스 장군의 시선이 테롤 백작을 향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평상시라면 공작인 베로스 장군의 의견에 이견을 달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구든 먼저 제 아들을 데려오시는 분이 던전에 최초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테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아들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베로스 장군의 여기사가 함께 있었는데 아들이 사라졌다. 베로스 장군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알톤을 데리고 가서 협박하려고 했다면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누구든 좋습니다! 제 아들을 제 앞에 무사히 데리고 오는 이에게 최초로 던전에 입장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가 씨익 미소를 짓고 사건 현장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검은 피부의 사내가 홀로 그곳을 살피고 있었다.

    “판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롤 백작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좋다고 했다. 맞나?”

    “물론이오. 내 아들을 구해주시오.”

    “곧 데리고 오지.”

    판톤이 그 자리를 떠나자 베로스 장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여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여기사 둘이 판톤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레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내가 하는 일도 훔쳐볼 거야?”

    “마음대로 해라. 먼저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레이스는 어차피 정령과 대화를 하는 것은 자신만이라 옆에서 지켜봐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땅의 정령을 소환하고는 물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줘.”

    여기사와 알톤이 키스를 하려는 순간 여기사가 쓰러졌고, 알톤도 쓰러졌다. 그런데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투명화 마법이군.”

    투명화 마법 장비를 착용한 자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정령이 괜히 정령이 아니다.

    정령은 그 흔적을 쫓아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그레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령의 움직임이 흔적을 쫓던 중에 딱 멈췄다.

    그곳으로 걸어간 그레이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보석을 주웠다.

    “정령석?”

    정령이 환장할 만한 물건이다. 이걸 던져놓으면 정령의 집중은 이곳으로 몰려서 말을 듣지 않는다.

    뒤따라 오던 베로스 장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꼴 좋군.”

    그레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베로스 장군은 태연하게 돌아섰다.

    “북부의 레인저들이 워프로 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

    그레이스는 베로스 장군의 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최고의 추적자를 수배해. 상대가 어떤 녀석인지도 설명해주고.”

    “알겠습니다.”

    수하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레이스는 정령석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자신에게 망신을 준 남자를 찾으면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안톤은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 고통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다. 커튼이 쳐져서 캄캄한 방.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곳.

    그곳에서 계속되는 구타. 순간이 영원과도 같아 이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

    “뭐든, 뭐든 말하겠습니다. 제발. 물어주세요.”

    가면의 사내는 그제야 주먹질을 멈추고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안톤을 앉혔다.

    이가 몇 개나 빠졌는지 제대로 말을 하기도 어려웠지만, 안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면의 사내는 그에게 포션을 줬다. 상처를 회복하는 사이에 가면의 사내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촛불 하나를 켰다.

    “4년 전. 바론 백작 성과 함께 할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고 들었다.”

    안톤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누가 사주한 짓인지 깨달은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칼이 날아들었다.

    칼이 정확히 목젖 앞에 멈췄다. 서늘한 살기에 베인 것인지 목에서 한 방울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가면의 사내의 무심한 눈이 안톤과 마주했다.

    “잘 생각해보고 말해. 거짓을 말하거나 허튼수작을 부리면 손가락부터 하나씩 자른다.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어깨와 다리. 총 스물네 번의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 선택하는 것도 괜찮겠지.”

    안톤은 뱉어내려던 말을 삼키고 눈치를 살폈다.

    “제대로 해먹은 사기극이었더군. 얼마나 받았나?”

    “우리도 당했습니다.”

    “스물세 번 남았다.”

    안톤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숙였다가 자신의 소지가 잘려나간 것을 보았다. 어찌나 빨랐는지 검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손가락이 잘려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악!”

    손으로 감싸보지만, 피가 멈추지는 않았다. 가면의 사내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받았나?”

    안톤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300만 골드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투자하기로 한 금액 말고 말인가?”

    “예!”

    가면의 사내, 제이슨은 침착하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다리우스는?”

    “그 뒤로 못 봤습니다.”

    다리우스가 멍청하지 않았다면 안톤에게 자신의 행적을 알려 줄 리 없었다. 바론 백작 성에서 해먹은 700만 중에서 300만을 내주고 400만을 들고 튀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720만 골드.

    안톤이 받은 것을 다 토해낸다고 해도 부족하다.

    “연락 방법은?”

    “없습니다.”

    “스물두 번 남았다.”

    안톤은 그제야 자신의 약지 하나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으아아악!”

    “연락 방법은?”

    안톤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 연락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는 국경을 넘어 알제리, 알제리 왕국으로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알제리 왕국이라면 치가 떨리도록 싸워 온 왕국이었다. 동부 전선을 맞대고 있는 왕국이었으니까. 그쪽으로 넘어갔다면 직접 넘어가서 잡아 오지 않는 이상 협조도 요청할 수 없다.

    다리우스가 현명하게 움직였다. 문제는 4년이 지난 지금 다리우스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적대국에 숨어있다면.

    제이슨이 아무리 비밀리에 침투한다고 해도 밝혀지는 순간 최우선 척살 대상이 될 곳이 알제리 왕국이었다.

    “사기로 해 먹은 거. 테롤 백작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네 계획인가? 아니면 테롤 백작의 계획이었나?”

    “다리우스가 접근했고, 그 계획을 아버지가 수락하셨습니다.”

    당장 돈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은 돈을 받아낼 방법도 없었다.

    “클라이는?”

    안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검을 휘둘렀다.

    “배포가 좋군. 스물한 번 남았다.”

    안톤은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1년 전에 거렁뱅이가 다 된 모습으로 찾아와 돈을 빌려 갔습니다.”

    “얼마?”

    “5천 골드를 빌려 갔습니다.”

    제이슨은 헛웃음이 나왔다. 300만 골드를 해먹고 5천 골드를 빌려줬다?

    “어디로 갔지?”

    “알제리 왕국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다리우스의 행적을 알려준 건가?”

    “예. 그랬습니다.”

    제이슨은 안톤의 생각을 읽었다. 적대국에 넘어가면 클라이의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 억류된다. 귀족이라 처형은 안 당하겠지만, 비싼 돈을 내야만 그를 다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돈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가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노예로 팔려나간다. 다행이라면 아직 가문에 연락이 없었다는 정도다.

    생각보다 서둘러 움직여야 하게 생겼다. 다리우스가 아니라 형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라도.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톤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모든 것을 무너트린 자. 어차피 그자가 가지고 간 돈을 되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돈은 다른 곳에서 찾아와야 하게 생겼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 사건이 필요했다. 제이슨은 검을 들며 말했다.

    “억울해하지는 마라.”

    “예?”

    안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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