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26화 (226/227)
  • < 에필로그 (수정) >

    에필로그

    마계 전체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운 남북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이어진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겨우 한 달 남짓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남북 전쟁에서 바로 연이어진 천마 전쟁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을 때 마계가 겪은 변화는 지난 천 년에 걸친 변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컸다.

    &

    사마엘은 무너진 던전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이 오가던 그녀의 던전이었다.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벽과 바닥에는 경매장이 무너지던 날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검게 변색된 핏자국에 사마엘은 이를 악물었다.

    남북 전쟁으로 인한 변화들 가운데서 호사가들이 손꼽는 변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던전 상회의 붕괴였다.

    던전 상회는 무너졌다.

    다섯 이사 가운데 셋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파되었다고는 하나 던전 상회의 유통로는 여전히 마계 곳곳에 이어져 있었고, 각종 생산 시설 역시 건재했다. 사실상 마계 전체를 독점하고 있던 던전 상회였기에 위기를 틈타 그 자리를 대체할 경쟁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던전 상회는 무너졌다.

    마계는 더 이상 던전 상회를 믿지 못했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사마엘은 날개를 살짝 늘어트리며 시트리의 말을 생각했다.

    던전 상회의 창립자인 시트리는 던전 상회의 남은 모든 것들을 사마엘과 나눠가졌다. 사마엘에게 새로운 던전 상회를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마계의 주민들이 비록 던전 상회를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계에는 아직 던전 상회가 필요했다.

    “주인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마엘은 빙글 돌아섰다. 사마엘의 새로운 집사장인 인큐버스 헨리였다.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던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카롯의 아직 어린 사촌 동생이었다.

    “미안, 너무 지체했네.”

    사마엘은 새로운 던전 상회의 회주이자 하나의 던전을 소유한 가주였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단 한 사람 주인이 존재했다.

    “늦으면 안 되겠지. 서두르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카롯이 그러했던 것처럼 헨리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마엘을 모셨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 용호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탐욕의 미궁으로 향하는 비행 마차 위에 올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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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왕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자신들의 왕을 잃은 북부는 큰 혼란에 빠졌지만 잠깐 뿐이었다. 북부는 곧 마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북부 공백지.

    수십에 달하는 가주들이 저마다의 던전에서 군림하며 경쟁하는 땅.

    하지만 지난 천 년의 세월동안 분열했던 남부 공백지와는 차이가 있었다.

    작금의 마계에는 그가 존재했으니까.

    오직 하나.

    마계 역사를 모두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인 그 남자가 존재했으니까.

    북부 가주들은 서로 경쟁하듯 남부로 사신을 보냈다. 마계 전체에 있어 오늘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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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욕의 영지는 오만, 질시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분열해 공백지가 되었다.

    색욕의 왕의 가신들은 색욕의 던전을 지키며 자신들의 왕이 돌아오기를 갈망했지만 색욕의 왕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색욕의 왕은 살아 있었다.

    남북 전쟁과 천마 전쟁이 모두 마무리 된 지금도 색욕의 던전의 던전의 영혼은 건재했다. 이는 곧 던전의 가주인 색욕의 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색욕의 왕 아스모데우스.

    검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색욕의 죄를 간직한 여인.

    색욕의 왕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색욕과 함께했다. 그녀는 이미 색욕의 죄 그 자체라 해도 좋았다.

    때문에 천마 전쟁이 끝난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색욕의 왕으로 존재했다. 예속 사역마화를 통해 용호와 죄악의 힘을 공유한 격노의 왕이나 나태의 왕과 비슷한 경우였다.

    용호는 색욕의 왕을 죽이지 않았다. 마몬이 남긴 몇 안 되는 의지를 따라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색욕의 왕은 광야를 헤맸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녀는 북부의 작은 언덕 위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만치 오랜 옛날 오만의 왕과 처음 마주한 그 장소였다.

    거친 바람이 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이 가슴과 어깨를 때렸다.

    색욕의 왕은 용호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깊은 후회 역시 하지 않았다. 그저 오만의 왕을 위해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벨리알.”

    색욕의 왕 아스모데우스만이 기억하는 그 이름.

    색욕의 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더 시간을 지체했다. 그녀의 사랑인 오만의 왕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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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 전쟁은 세 번의 낮과 세 번의 밤 동안 지속되었다. 때문에 천마 전쟁을 삼일 전쟁이라 부르는 자도 있었다.

    천마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마계의 모두가 하나 된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남북 전쟁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던 남부 군과 북부 군의 생존자들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천계에 맞서 싸웠다. 비록 삼 일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 모두는 가장 위대한 왕의 사역마가 되었다.

    마계의 모두가 하나 되어 싸운 천마 전쟁.

    그 위대한 전투의 장이었던 탐욕의 미궁은 더 이상 마계 중앙에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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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래곤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태한 개인주의자들이었다.

    천마 전쟁이 마무리 된 그 날 용 군단은 해체되었다. 애당초 폭력의 왕이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존재했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용 군단이었다. 폭력의 왕의 유지마저 끝맺은 지금 더 이상 군단을 유지할 원동력도, 이유도 없었다.

    용 군주 앙카블로사는 한 마리의 자유로운 블루 드래곤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레어에서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던 그녀는 권속으로 부리는 다크 엘프들의 재촉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뭐야, 아직 약속한 날이 안 되지 않았느냐.”

    천마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으니, 잠든 시간도 겨우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앙카블로사는 지금보다 두 달은 더 지난 뒤에 깨어났어야 했다. 탐욕의 왕과 격노의 왕의 혼례 날에 말이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주인의 목소리에 다크 엘프들은 몸을 덜덜 떨며 두려움을 표했다. 앙카블로사는 화를 꾹 눌러 참은 뒤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너희가 미치지 않았다면 아무 이유 없이 날 깨우지는 않았겠지.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더냐?”

    다크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푸른 머리칼을 길게 기른 아프사라스로 화한 앙카블로사에게 급보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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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끼리라도 귀환을 서둘러야겠소.”

    용호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쌍둥이 좌- 조화의 티그리우스가 살라미의 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용호의 자가용인 살라미가 티그리우스를 태우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천마 전쟁이 끝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북부 원정군을 이끌게 된 티그리우스를 위한 용호의 작은 배려였다.

    천마 전쟁이 끝났을 때 오만과 질시, 식탐의 영토는 왕이 없는 땅이 되었다.

    오만과 질시의 영토는 남부에 위치한 ‘탐욕의 영토’에서 너무나 먼 곳에 존재했다. 하지만 식탐의 영토는 아니었고, 그랬기에 용호는 티그리우스를 수장으로 하는 북부 원정군을 편성했다.

    “스컬컬.”

    북부 원정군의 또 다른 기둥인 스컬이 껄껄 웃으며 티그리우스의 말을 받았다. 살라미와 더불어 허공을 질주하는 부케팔로스의 발아래에는 천마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스컬 부대가 북부 원정군의 최선두에서 진군 중이었다.

    본래라면 벌써 탐욕의 미궁에 도착했어야 할 북부 원정군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트러블로 인해 일정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북부 원정군을 이끌고 돌아가면 행사에 참가하지 못할 터였다.

    “음··· 동의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겠소. 그럼 귀환할 때까지 지휘는 위크로스에게 맡깁시다.”

    스컬은 이번에도 껄껄 웃었고, 티그리우스는 아주 작은 불안 속에서 메시지 주문을 발동시켰다. 중앙에서 북부 원정군을 지휘 중인 뱀파이어 로드 위크로스에게 원정군의 귀환 과정 전체를 맡긴다는 뜻을 전했다.

    “다 되었소. 이제 그럼 출발합시다.”

    “스컬스컬.”

    고개를 끄덕인 스컬은 부케팔로스의 박차를 가했다. 부케팔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녹색 잔영을 뿌리며 질주했고, 출발이 한 발 늦은 살라미는 분기탱천했다. 티그리우스가 출발하냐는 뜻을 전하지도 않았건만 불꽃의 날개를 활짝 펴고 속도를 높였다.

    바람막이 마법을 펼칠 새도 없었기에 티그리우스의 머리와 수염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지만 티그리우스는 노여움을 표하는 대신 스컬마냥 껄껄 웃었다. 살라미의 등에 난 손잡이를 꽉 잡고 바람을 즐겼다.

    “스컬컬!”

    서둘러야 했다. 오늘은 두 사람의 경애하는 주인인 용호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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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들이 왕은 왕이구만.”

    천기자.

    마몬의 후예이자 탐욕의 왕 천용호의 아버지.

    멋들어진 예복을 갖춰 입은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감개무량한 얼굴로 식장을 돌아보았다.

    수비대장 리쿰을 필두로 한 블랙 오크 전대가 번쩍번쩍이는 갑주를 입고서 식장 곳곳을 빛내고 있었다. 명목은 식장 경비였지만 천기자는 그들을 보며 잘 튀긴 치킨을 감싼 얇게 썬 파들을 생각했다. 저들 하나하나가 식장을 빛내주고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세 번째 며느리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충격이란 원. 대소환으로 인해 서울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천기자는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흐뭇함을 표했다.

    요 며칠 탐욕의 미궁에 머물며 왕 부럽지 않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모든 순간보다 이렇게 식장에 서서 치킨을 튀기고 있는 지금이 좋았다.

    용호가 천하의 패륜아라 천기자에게 치킨을 튀기게 한 것이 아니었다. 천기자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었다.

    치킨이 탐욕의 미궁의 명물이라니, 그것도 마계인들이 너도나도 먹고 싶어하는 최고의 미식이라니 이 얼마나 흡족한 일이란 말인가. 삼십 년 치킨 집 사장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식장 안에는 곳곳에서 온 하객들로 분주했다. 마계답게 사람이 아닌 것들도 많았다. 날개 달린 하피와 커다란 트리엔트,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슬라임까지 하나하나가 특색이 분명했다.

    “치킨 주세요!”

    “왈왈!”

    “낑낑!”

    시원하게 울린 삼중창에 천기자는 고개를 숙였다. 하얀 테이블 보 너머에 해맑게 웃고 있는 유리아가 보였다. 잔뜩 꾸겨진 치킨 교환권을 번쩍 내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오냐! 여기 있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거 필요 없단다.”

    손 때 묻은 치킨 교환권을 마다한 천기자는 막 튀긴 치킨을 푸짐하게 담아 유리아에게 주었다. 유리아의 얼굴에 새로운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왈왈!”

    “낑낑!”

    바둑이와 낑낑이가 촐싹거리며 좋아했다. 천기자는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허리를 곧이 폈다. 신부 대기실과 신랑 대기실 쪽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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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호구리나랑 합동이긴 하지만 괜찮아. 나는 정실부인이니까.”

    실버 드래곤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를 고쳐 신으며 카이완이 말했다. 누가 카이완 아니랄까봐 레오타드나 다름 없는 실버 드래곤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몸을 꽉 조이는 것이 웨딩 드레스가 아니라 전투복 같다는 느낌이었다.

    전갈 좌, 검의 여왕 카이완.

    언제나와 같은 호구 칭호에 카타리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카타리나는 카이완과 달리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하얀 예복을 갖춰 입었다. 유노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카타리나의 꼬리가 축 처지는 걸 본 카이완은 키득 웃더니 카타리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화장을 새로 해야 할 위험을 감수하고 카타리나와 뺨을 비볐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우리 호구리나라서 괜찮은 거야. 그것도 알지?”

    결국엔 카타리나도 웃고 말았다. 귀와 꼬리를 파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칭 좌, 왕을 수호하는 카타리나’라는 으리으리한 이명을 달고 있지만 그래도 카타리나는 카타리나였다.

    그리고 한 사람.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 역시 팔부중의 예복을 갖춰 입었지만 앞의 둘과 달리 혼례복이 아니었다.

    “뭔가, 뭔가 엄청나게 손해 보는 기분이야.”

    처녀 좌, 사랑에 빠진 처녀 드리타라슈트라.

    그녀의 결혼식은 앞으로 두 달 뒤였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은 카이완, 카타리나의 결혼식과 달리 오직 그녀 혼자만의 결혼식이었다.

    마몬 가와 팔부중이 하나 되는 결혼식이었다. 당연히 마몬 가의 가내 행사인 이번 결혼식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못 해도 수만 명이 지켜볼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어쩐지 모르게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선수 치듯 먼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할 줄이야.

    “성대하게 단독 혼례식 치루는 데 뭐가 손해야. 안 그래?”

    카이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더욱이 믿었던 카타리나마저도 베시시 웃으며 귀와 꼬리를 파닥 거렸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한 방 제대로 당하신 것 같네요.”

    가르디문디가 작게 말했고, 키르티무카가 펄쩍 뛰었다.

    “가르디문디!”

    가르디문디는 언제나처럼 키르티무카를 외면했고, 격노의 왕은 혀까지 베 내미는 카이완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를 악 물더니 키르티무카를 향해 돌아섰다.

    “으으, 안 되겠어. 키르티무카, 미친 소리 같지만 혼례복 하나 어떻게 더 공수 안 될까?”

    “차, 참으시죠.”

    키르티무카가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그러자 가르디무디가 다시 톡 쏘듯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첫날밤에 난입하세요.”

    “가르디문디!”

    키르티무카는 다시 펄쩍 뛰었고, 가르디문디는 이번에도 키르티무카를 외면했다. 카이완과 격노의 왕이 격렬한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카타리나는 꼬리를 파닥거리며 벽 쪽을 돌아보았다. 신랑 대기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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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 대기실이 소란스럽네요.”

    검붉은 예복을 입은 용호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천계의 문을 닫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소멸시켰을 때조차도 자신만만하던 모습과는 다소 달랐다.

    시트리는 대답하는 대신 용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손수 용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은 정말 복 받으셨다니까.”

    “흠흠, 부정 못 하겠군요.”

    용호와 시트리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시트리는 다시 입술을 벌렸다. 저도 모르게 충동을 토해냈다.

    “사랑하는 고객님, 잠시만 가만히 계셔줄래요?”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리는 가만히 선 용호를 끌어안았다. 용호의 가슴에 잠시나마 머리를 묻었다.

    마몬.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탐욕 그 자체가 된 마몬을 느꼈다.

    천마 전쟁의 마지막 순간, 수많은 신인과 신장들을 쓰러트리고 천계의 문 앞에 섰을 때.

    용호는 마몬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와 함께 위대한 마신왕의 힘으로 천계의 문을 소멸시켰다. 천계와 마계의 연결 자체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시트리는 마몬의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했다. 시트리 자신의 자결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 말이 그녀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용호 역시 마몬의 의지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용호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아니, 용호 자신과 이미 하나라는 사실만을 느낄 뿐이었다.

    용호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시트리를 마주 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고마워요.”

    시트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용호는 어쩐지 모를 쑥스러움에 뺨을 살짝 붉히며 답했다.

    “시트리니까요. 더한 부탁도 얼마든지 괜찮아요.”

    “어머나, 방금 그 말 후회 안 하시죠?”

    시트리가 돌연 도발적으로 말했고, 용호는 눈을 껌벅였다.

    “시트리?”

    “가주님, 앞으로 10분 뒤입니다.”

    마치 타이밍을 재기라도 한 것처럼 신랑 대기실 문 너머에서 집사보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 레인저의 홍일점인 그녀는 집사장 엘리고스와 마찬가지로 탐욕의 미궁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

    용호가 답했고, 시트리는 어느새 용호의 품을 빠져나갔다. 그녀답게 짓궂으면서도 신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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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단상 위에 용호가 섰고, 그 양옆에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섰다. 카타리나는 이번에도 감정을 감추지 못해 꼬리를 파닥거렸고, 카이완은 신부 대기실의 의기양양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수줍어했다.

    “엘리 오라버니, 우리는 언제 할까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오필리아가 작게 말했다. 한참 감격의 눈물을 훌쩍이던 엘리고스가 눈을 껌벅였다.

    “으응?”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오필리아는 키득 웃으며 엘리고스의 옆구리를 찔렀고, 엘리고스는 움찔하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다시 용호 쪽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이었다.

    “카이완이 소박 맞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곳에서 유크라시온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수줍어서 우물쭈물하는 카이완의 모습에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 모두가 빙긋이 웃었다.

    “이게 자식 장가보내는 기분인가.”

    투기장의 사역마들 한 가운데 선 구시온이 고개를 살살 흔들며 말했다. 스카자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주인님이 자식이야?”

    목소리에 은근함이 묻어났다. 유노와 유스티아는 구시온과 비슷한 눈빛으로 단상 위에 용호를 보았고, 그런 모두의 곁에 있던 홍련의 불길로부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만은 나도 구시온에게 공감한다.]

    홍련의 마창 아몬. 과거에도 지금도 탐욕의 왕과 함께하는 그.

    “나리의 번뇌력이 차오르진 않고?”

    구시온이 물음에 아몬은 그저 껄껄 웃었다.

    “시작한다.”

    유노가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마따나 단상 위의 용호가 카타리나와 카이완에게 키스했다. 버그림이 정성들여 만든 반지를 두 사람에게 끼워주었다. 바라보던 이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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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이는 정신없이 치킨을 먹었고, 낑낑이는 먹는 와중에도 꼿꼿이 고개를 들어 마계의 가장 위대한 왕의 결혼식을 관람하였다.

    루시아가 날개를 파닥이며 옆을 돌아보았다. 치킨의 바삭바삭한 껍질을 입에 무는 대신 뺨을 발갛게 붉힌 채 용호와 카타리나, 카이완을 바라보는 유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따로 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루시아가 눈짓했고, 유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탐욕의 마신 천용호.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

    그 옛날 마몬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계를 구원한 자.

    용호는 카타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이완에게 입 맞추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뛰어나온 드리타라슈트라 역시 품에 안았다.

    마계 제일의 욕심쟁이.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는 자.

    시트리는 그런 용호를 바라보았다.

    천 년의 시름을 훌훌 털어버리고 해맑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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