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25화 (225/227)
  • < 최종장 - 마신왕 >

    최종장 - 마신왕

    우연과 필연이 만나 현재를 낳았다.

    천 년의 세월에 걸쳐 탐욕과 하나 된 마몬은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용호는 마몬의 의지를 느꼈다. 그는 지금 용호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수십 만 명이 한 데 모여 있는 전장이었지만 마른 침 삼키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부가 정지한 것 같았다.

    한 자리에 모인 네 개의 죄악.

    서로 다른 죄악들의 힘을 하나로 이어주는 마몬의 신기.

    소유자의 영혼의 힘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마신왕의 심장.

    오만의 왕은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신과 같은 마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것을 휘두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강대한 존재를 눈앞에 둔 충격에 얼어붙을 따름이었다.

    용호는 오만의 왕을 내려다보았다. 마몬의 속삭임에 따라 마몬의 신기를 들어올렸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숨 막히는 적막에 커다란 파문을 던져 넣었다.

    “소유하라, 탐욕의 미궁이여.”

    루시아가 응답했다. 탐욕의 미궁이 지상에 뿌리를 내렸다. 아우라를 발산하는데 그치지 않고 주변 일대를 소유했다. 전장 전체를 탐욕의 미궁으로 만들었다!

    지면이 솟구쳐 올라 벽이 되었다. 방벽은 남부 군과 북부 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마계의 주민들이었다. 마신왕의 백성들이었다.

    전장 전체를 짓누르던 천계의 힘이 밀려났다. 고통과 공포 속에 신음하던 마계의 존재들은 던전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용호의 힘이 더욱 더 강해졌다.

    마왕이 강해진 만큼 던전 역시 강해졌다.

    천계의 존재들이 소리 없는 괴성을 토하며 마계의 존재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제까지와 달랐다. 던전 안에 자리한 마계의 존재들은 더 이상 천계의 힘에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하늘과 땅 모두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비프론즈는 미소 지었다. 엘리고스의 일권과 오필리아의 일각에 가슴이 파괴된 그는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몇 마디 말을 내뱉는 것조차 무리였다.

    하지만 만족했다. 그의 선택은 틀렸지만, 그가 바랐던 것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였지만 알 수 있었다.

    마계는 하나가 되리라. 그의 오랜 갈망은 이루어지리라.

    엘리고스는 비프론즈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대신 용호를 향해 달렸다. 오필리아가 그런 엘리고스의 옆을 달렸다. 티그리우스 또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브라삭스는 현실을 부정했다. 일곱 개의 뿔을 가진 자신이었다. 던전 상회 최강의 마력이라 불린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어째서.

    사마엘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브라삭스의 등과 심장을 꿰뚫은 검을 거두었다. 그대로 돌아서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최속의 날개를 활짝 펴 날아올랐다.

    리처드는 신장의 머리를 박살냈다. 폭발해 흩날리는 빛 속에서 입을 열었다. 단순히 목소리를 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말을 만들어냈다.

    “나의 왕이여. 나의 왕이시여.”

    유스티아와 유노가 탐욕의 미궁 속에서 눈물지었다. 스카자하가 울면서 웃었다. 구시온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색욕의 왕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숨을 토했고, 이내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천 년 이상이나 이어온 후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렇기에 물기 어린 목소리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

    오만의 왕. 수천 년을 이어온 색욕의 왕의 사랑.

    “으아아아아아아아!”

    오만의 왕이 비명을 질렀다. 괴성을 토하며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 모았다. 독존의 힘인 오만의 빛과 지독한 감정인 질시의 검은 기운을 발산했다.

    천 년이었다. 자그마치 천 년의 세월을 들여 최고의 육신을 만들어냈다. 과거의 마몬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대체 왜!

    “나를 내려다보지 마!”

    실로 강대했다. 마신이라 불릴만한 마력이었다. 허나 그 상대가 좋지 못했다. 용호는 마주 노여움을 토했다. 아몬을 크게 휘둘러 탐욕의 녹염을 일으켰다.

    마력이 마력을 집어삼켰다. 탐욕뿐만 아니라 식탐의 힘까지 머금은 녹염이 오만의 빛과 질시의 검은 기운을 불살랐다. 나태의 힘이 충돌의 여파를 지웠고, 격노의 힘이 용호를 돌진시켰다.

    용호가 녹염을 꿰뚫었다. 다시 한 번 아몬을 크게 휘둘러 오만의 왕을 강타했고, 오만의 왕은 다급히 오만의 신기를 들어 용호의 공격을 막았다.

    창과 검 사이로 용호와 오만의 왕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이전과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오만의 왕은 용호의 힘을, 마신왕의 힘을 견뎌내지 못했다. 왈칵 피를 토했다.

    다시 한 번 창과 검이 격돌했다. 용호는 오만의 왕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마력을 손에 넣었는지 간파했다. 오만의 왕의 영혼 속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았다.

    오만의 왕이 여섯 장의 광익을 펼쳤다. 허나 부질없었다. 용호가 아몬을 휘두를 때마다 광익이 하나씩 깨져 비산했다. 천지를 요동케하는 마력임에 분명했지만 용호의 힘이 보다 강했다.

    “탐욕의 왕!”

    오만의 왕이 절규했다. 용호는 그 절망과 질시와 노여움을 마주하며 마몬의 신기에 힘을 모았다. 12 사역마는 물론이고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힘을 응집시켰다.

    [나의 주인이여!]

    아몬이 호응했다. 용호는 끝없이 솟구쳐 오르는 힘 속에서 모두를 느꼈다.

    마신왕.

    오직 하나뿐인 마계의 주인. 마계라는 이름의 던전을 지배하는 자!

    아몬이 오만의 신기를 깨트렸다. 녹염이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살랐다. 최후의 일격이 오만의 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오만의 왕이 용호를 보았다. 입술을 벌렸고,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던 말을 토했다. 마지막을 눈앞에 둔 순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이름뿐이었다.

    “아스모··· 데우스······.”

    색욕의 왕. 홀로 독존할 뿐인 그를 수천 년에 걸쳐 사랑해준 여인.

    녹염이 오만의 왕을 불살랐다. 용호가 손을 내뻗어 오만의 왕의 정수를 움켜쥐었다.

    오만과 질시. 두 개의 죄악.

    탐욕의 죄가 힘을 발했다. 그 모든 것을 소유했다.

    &

    여섯 개의 죄악이 하나로 모였다.

    색욕의 왕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자연스런 이끌림을 따랐다.

    칠대죄악. 본래 하나였던 것.

    그렇기에 색욕의 죄는 하나 됨을 원했다. 색욕의 죄는 탐욕의 왕의 것이 되었다.

    색욕의 왕은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오만의 왕을 위해 울어줄 이는 이 세상에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

    남부 군과 북부 군을 공격하던 천계의 존재들은 공격을 멈추고 하늘로 향했다. 전력을 온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강대한 마신왕의 힘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천인과 신인들뿐만 아니라 신장들까지도 하늘로 향했고,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천계의 구멍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

    용호는 탐욕의 미궁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오만의 왕을 쓰러트렸지만 아직 천계의 문이 남아 있었다. 오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붉은 하늘이 푸른빛으로 물들어갔다. 천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용호와 오만의 왕 간의 격돌이 만들어낸 마력의 소용돌이가 천계의 문을 자극한 결과였다.

    용호는 마몬의 기억을 통해 인지했다.

    마몬이 인계에 후손을 남긴 것은 우연이었다. 어쩌면 그것조차 운명의 인도였을지 모르지만, 마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몬은 천계와의 마지막 싸움을 치루기 직전에 다시 인계를 찾았다. 마몬 자신이 끝내 천계를 막지 못해 마계가 멸망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마몬은 자신의 후손들을 찾아 마신왕의 심장을 전해주었다. 언젠가 자격을 갖춘 자가 태어난다면 마신왕의 심장은 그 역할을 다할 터였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새로운 탐욕의 왕이 나타났고, 그는 마신왕의 심장과 마몬의 신기를 손에 넣었다. 칠대죄악을 모두 모아 진정한 마신왕의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천계의 문이 열렸다.

    천계는 마계에게 있어 최악의 이계였다. 존재 자체가 마계의 상극인 그것은 끊임없이 마계를 갈망했다.

    마몬조차도 천계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계의 문을 통해 천계를 들여다본 그는 확신했다.

    천계의 문을 닫는데 그쳐서는 안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신왕의 힘으로 천계와의 연결 그 자체를 끊어야 했다.

    과거와 현재의 12 사역마들이 용호의 곁에 모여들었다. 하늘 너머에서 천계의 문이 열리고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두려움을 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라미가 용호의 곁에 안착했다. 마신왕이 된 용호의 막대한 존재감에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언제나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용호는 하늘을 보았다. 기억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계단이 보였다. 천계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였다.

    “스컬컬.”

    스컬이 말했다. 용호는 부름에 따라 돌아섰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탐욕의 미궁 1층과 통하는 입구 위에 유리아와 바둑이와 낑낑이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리쿰과 버그림뿐만 아니라 고블린 레인저들이 서 있었고, 다시 그 너머에는 뒤뚱뒤뚱 계단을 오르는 트리엔트가 있었다.

    유리아는 오늘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 잘 알지 못했다. 용호가 지금부터 누구와 싸우러 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용호가 지금부터 가려는 곳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몰랐다.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용호를 올려다보았고, 손에 쥔 치킨 교환권을 만지작거리다가 억지로나마 웃었다.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말했다.

    “다녀오세요.”

    바둑이와 낑낑이도 허리를 숙였다. 리쿰과 버그림이 예를 표했고, 고블린 레인저들은 뒤늦게 도착한 트리엔트와 더불어 용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유리아의 옆에 루시아가 자리했다. 던전의 영혼인 그녀는, 용호의 분신이라 할 수 있을 그녀는 긴 말을 늘어놓는 대신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용호가 웃었다.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연이어 유리아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유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다녀올게. 갔다와서 같이 치킨 먹자.”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용호는 그런 유리아의 눈물을 닦아준 뒤 다시 일어섰고, 루시아는 어른스런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세요.]

    [나의 주인님, 마계의 왕이시여.]

    용호는 돌아섰다. 천계의 문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12 사역마들이 하나씩 말을 꺼냈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집사장은 던전 최후의 보루. 하지만 이번에는 가주님의 보루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가 용호의 곁에 섰다. 구시온과 스카자하가 연이어 말했다.

    “이번에는 절대 나리 혼자 보내지 않아.”

    “예속 사역마들과 함께 싸우라 말했었지? 나의 주인님.”

    천계의 구멍에서 신인과 신장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에 그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12 사역마들은 멈추지 않았다. 사마엘과 티그리우스는 조용히 용호의 곁을 지켰고, 리처드는 구시온의 뒤에 가서 섰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주님을 지키겠습니다.”

    카타리나가 귀와 꼬리를 파닥거렸다. 그녀는 언제나 용호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였다.

    “나는 정실부인이니까. 와이프 실드도 이번에는 용서할게.”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낭군은 나와 팔부중의 왕이니까. 다녀오면 혼례도 치러야 하고.”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가 뺨을 붉히며 약간은 소심하게 말했다.

    스컬이 껄껄 웃으며 가장 앞 열에 섰다. 용호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사랑하는 고객님. 믿고 있어요.”

    시트리는 용호에게 미소 지었다. 용호 안에 존재하는 탐욕을 느꼈다.

    용호 역시 시트리에게 미소를 보였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천계로 이어진 계단.

    탐욕의 왕 마몬이 홀로 올라 마계를 구원했던 그 길.

    하늘과 땅에서 마계의 모두가 바라보았다. 푸르게 물든 하늘에서부터 천계의 존재들이 내려다보았다.

    [나의 주인이여.]

    [최후의 최후까지 그대와 함께하리라.]

    홍련의 마창 아몬.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그.

    용호는 마신왕의 힘을 개방했다. 압도적인 마력에 세상 천지가 요동쳤고,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천계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용호는 허공을 박차 첫 번째 계단을 올랐다. 12 사역마 모두에게 명했다.

    “가자.”

    그 한 마디.

    마몬이 끝내 하지 못했던 그 말.

    12 사역마들은 용호의 명을 받들었다.

    왕의 뒷모습을 따라, 그들 모두의 왕과 함께 천계로의 계단을 올랐다.

    최종장 - 마신왕 끝, 에필로그와 SS(외전)들로 이어집니다.

    {@PIC:193399}

    < 최종장 - 마신왕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