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24화 (224/227)
  • < 제 75장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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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년 전에도 천계의 구멍이 열리는 위치는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천계의 구멍이 열리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열렸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천계의 존재들이 천계의 구멍을 여는 위치를 완전히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천계의 문이 더 크게 열리면 열릴수록 놈들은 보다 공격적인 방식으로 천계의 구멍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는 땅 대신 도시 위나 군대의 주둔지를 선택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몬의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비전투 계열에 속하는 유노와 유스티아는 적색거룡 티아메트의 갑판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유스티아의 카드들이 허공에 절로 나열되며 천계의 구멍의 숫자와 크기를 알려주었다. 이미 열렸고, 지금 이 순간 열리고 있는 천계의 구멍은 모두 다섯 개였다.

    지난번 전투와는 달랐다. 군사를 물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부 군과 북부 군이 뒤엉킨 상황에서 천계와 싸워야 했다. 초대형 신인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동시에 나타났을 때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유스티아는 카드 뭉치를 갈무리 한 뒤 손가락을 튕겨 적색거룡 티아메트의 코어가 있는 방으로 공간을 도약했다. 티아메트를 통해 탐욕의 미궁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유노는 천 년 전을 기억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숨결이 자꾸만 거칠어졌다.

    “이번엔 다를 거다. 다를 것이야.”

    유스티아가 말했고, 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천계의 문이 활짝 열린 상황이 아니었다.

    별을 헤아리는 유노는 탐욕의 왕 마몬에게 기도했다. 유스티아와 함께 자신의 마력 모두를 탐욕의 미궁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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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형 신인이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온통 하얀 빛에 뒤덮여 있기에 검은자위를 가진 눈이 더욱 섬뜩하였다.

    구멍은 다섯이었고, 그중 네 개의 구멍에서 초대형 신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남은 하나의 구멍에서는 회색빛에 휩싸인 천인들이 물이 쏟아지듯 지상으로 밀려나왔다.

    북부 군의 혼란은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휘하 부대를 수습하던 북부 군의 장수 하나는 욕지거리조차 토하지 못했다. 이제 전투고 뭐고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부 군 역시 동요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초대형 신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선두에 서서 북부 군을 박살내던 스컬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부 군의 머리 위에 열린 구멍으로부터 몸을 내민 초대형 신인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데스나이트들에게 스컬 부대를 맡긴 뒤 박차를 가했다. 스컬을 태운 부케팔로스가 허공을 달려 초대형 신인을 향해 돌진했다.

    초대형 신인으로부터 발산된 천계의 힘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스컬은 보랏빛 사기邪氣가 묻어나는 바포메트의 낫을 크게 휘둘러 천계의 힘 그 자체를 베어냈다. 강력한 마력으로 노도를 찢고 길을 열었다.

    “스컬컬!”

    스컬이 초대형 신인 하나를 맡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가루라왕 비류박차는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마력을 둘러라! 천계의 힘에 대비하라!”

    북부 군과 달리 남부 군은 아직 군대였다. 천계의 구멍을 마주했지만 그들은 공포에 매몰되지 않았다.

    [천계의 힘이 밀려옵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루시아가 소리치며 탐욕의 미궁의 힘을 남부 군의 머리 위로 뿌렸다. 남부 군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던 아우라가 천계의 힘을 막는 방벽이 되었다.

    구멍 아래 있던 북부 군이 일시에 죽어나갔다. 비명조차 없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살려줘! 살려줘!”

    북부 군 일부가 무기를 버리고 남부 군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남부 군의 창칼 아래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는 살아남았다. 남부 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북부 군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탐하는 전장이라 해도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었다.

    “북부 군은 버린다! 천인들에 대비해라! 자리를 지켜라!”

    비류박차의 명이 연달아 내려왔다. 회색 빛에 휩싸인 천인들과 남부 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구시온은 욕지거리를 토했다. 용호와 오만의 왕의 대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끼어들 틈을 찾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뻥 뚫린 구멍에서 신인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네 개의 구멍에서 나온 자들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신장.

    마몬의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오직 구시온과 리처드, 엘룬만이 맞상대가 가능했던 괴물들.

    신장 둘이 구시온을 보았다. 그 등 너머에 자리한 용호와 오만의 왕 또한 보았다.

    “카타리나! 다른 한 쪽을 맡아라!”

    즉각적으로 외친 구시온은 마력을 전신에 두르고 허공을 박찼다. 신장들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카타리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신장들이 용호의 싸움에 끼어들게 둬서는 안 되었다. 검은 마력으로 만들어낸 분신 둘을 대동한 채 구시온의 뒤를 따랐다. 신장들을 막는 것은 이번에도 12 사역마의 몫이었다.

    앙카블로사가 포효했다. 남부 군의 머리 위에 나타난 신장 하나를 향해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다. 그녀 주변에 있던 드래곤들은 천인들을 향해 연달아 광역 마법을 발사했다. 천계의 힘 덕분에 마법 하나 둘은 우습게 견뎌내는 천인들이었지만 마법이 중첩되자 버티지 못했다. 용 군단은 하늘에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괴수들이 추락했다. 수십은 족히 될 천인들에게 온 몸이 뒤덮인 채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괴수의 모습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북부 군과 남부 군의 격돌로 혼란스러웠던 전장은 더욱 더 큰 혼란 속에 빠졌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서 마력과 마력이 충돌했다. 용호와 오만의 왕이 서로를 향한 살의를 감추지 않았다.

    양쪽 모두 마력이 너무 강했다. 아몬과 오만의 신기가 격돌할 때마다 세상이 요동쳤다. 지면은 깊이 파이다 못해 거대한 구멍이 뚫린 지 오래였고, 하늘에는 단 한 점의 구름도 남지 않았다.

    “탐욕의 왕! 탐욕의 왕! 탐욕의 왕!”

    오만의 왕이 광소하며 오만의 신기를 휘둘렀다. 거대한 빛의 검의 형상을 한 오만의 신기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함께 움직였다. 검격 그 자체보다는 마력의 움직임이 몇 배는 더 위협적이었다.

    단순한 검격이 아니었기에 용호 역시 마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아몬과 오만의 신기가 재차 충돌했고,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아몬을 쥔 팔 자체가 뜯겨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씹어 삼켰다.

    오만의 왕은 다시 웃었다.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적잖은 손상을 입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기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죄악의 숫자만을 논한다면 용호 쪽이 위였다. 하지만 마력의 총량과 육체의 강건함은 역시 오만의 왕 쪽이 한 수 위였다. 공격을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곧 마계다! 내가 곧 마계이다!”

    수천 년을 넘는 삶을 이어왔다. 지난 천 년의 세월을 통해 만들어낸 이 육신이야말로 마계라는 세계의 결정체였다.

    이계의 피가 뒤섞인 잡종 따위에게 지지 않았다. 질 수 없었다. 마계 제일은 탐욕이 아닌 오만이었다!

    [주인이여!]

    아몬이 절규했다. 용호는 피를 토했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에 마침내 우열이 생겼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오만의 왕의 검격을 막아낸 용호였지만 이어진 마력까지 이겨내지는 못했다. 오만의 왕이 아몬의 창대를 찍어 누르고 있는 오만의 신기에 새로운 힘을 더하자 용호가 추락했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바닥에 처박혔다.

    “죽어!”

    원색적인 말은 곧 감정이 되었다. 사용자의 감정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더 강한 힘을 발하는 질시의 죄가 용호를 추적했다. 오만의 왕 주위를 휘감고 있던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검은 거인의 형상을 갖추었고, 바닥에 추락한 용호를 향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지축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용호가 비명을 질렀다.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용호의 마력이 질시의 주먹을 막아냈다. 하지만 밀어내지는 못했다. 여전히 짓눌린 상태였다.

    녹염이 피어올라 질시의 검은 감정을 불태우고자 했다. 식탐의 죄가 오만의 마력을 발악하듯 먹어치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번 기울어버린 역학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용호야!”

    카이완이 비명을 질렀다. 예속 사역마인 그녀는 영육의 주인인 가주의 위험을 즉각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용호와 오만의 왕을 향해 질주했지만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 사이에는 접근 자체를 불허하는 오만의 왕의 마력이 있었다.

    격노의 왕은 용호를 돕고 싶었다. 허나 색욕의 왕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격노의 왕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붙잡아 두는 쪽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카타리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바로 등 뒤에서 신장의 공격이 가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러했다. 검은 마력의 분신 둘이 신장을 가로막았고, 카타리나는 스스로의 육신을 하나의 칼과 같이 생각했다. 어떻게든 오만의 왕의 마력을 뚫고 들어가고자 검은 마력을 끌어 모았다.

    다른 12 사역마들도 용호의 위급을 알았다. 하지만 카타리나나 카이완처럼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스컬컬!”

    스컬이 신인의 거대한 목 위에 죽음의 흔적을 남겼다. 그대로 신인을 지나쳐 용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비프론즈의 가슴에 마지막 일곱 번째 수를 내리꽂았다. 그 즉시 용호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리!”

    구시온이 절규했다. 리처드가 포효했다. 스카자하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아우성 사이에서.

    그녀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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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이 두근거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이지만 용호는 알 수 있었다.

    격노의 왕과 색욕의 왕 또한 알았다. 격노의 왕은 숨을 헐떡였고, 색욕의 왕은 애달픔과 위급함을 동시에 느꼈다.

    오직 용호만을 노려보며 지독한 감정을 토해내던 오만의 왕이 고개를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렇게 만들었다.

    “나태의 왕!”

    시트리. 그녀. 마몬의 곁을 끝까지 지킨 여인. 그의 최후를 지켜본 자.

    “오만의 왕.”

    시트리의 영혼은 천계의 힘에 중독 당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태의 힘을 품어온 그녀였지만 이 전장에 선 왕들 가운데 최약체라 해도 좋았다. 여덟 개의 뿔을 얻어 마신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을 오만의 왕에 맞서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행동했다. 오만의 왕은 나태의 왕에게서부터 위기감을 느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

    그녀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

    공간을 뛰어넘은 그녀는 허공을 밟았다. 측면에서부터 오만의 왕을 향해 다가섰다. 나태의 힘에서부터 비롯된 부식 결계가 오만의 왕의 마력을 밀어내고 길을 만들었다. 시트리와 오만의 왕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부식 결계의 힘이 더욱 더 커졌다.

    “시트리?”

    카이완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었다. 카타리나는 처음으로 자신이 엘룬의 환생임을 자각했다. 시트리의 뒷모습으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간파했다.

    질시의 검은 기운이 시트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해체되어 사라졌다.

    평소의 시트리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이적이었다. 오만의 왕은 이해했다. 그랬기에 용호에게 쏟아 붓던 힘을 시트리에게도 돌렸다.

    부식 결계가 오만의 마력 사이로 길을 열었다. 죄악의 힘은 곧 영혼의 힘. 시트리는 스스로의 영혼을 불태웠다. 던전 상회에서 배신한 세 이사들과 맞설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살고자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죽는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나태의 힘을 최대한 내뿜어 오만의 왕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는다.

    오만의 왕은 이미 마신이나 다름없었다. 시트리 자신의 영혼을 모두 불사른다 해도 결코 그를 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손상은 입힐 수 있으리라. 용호가 다시 일어나 그에 맞설 시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 약해진 오만의 왕을 용호가, 탐욕의 왕이 제압하리라.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마계는 다시 한 번 구원받으리라.

    “시트리!”

    용호가 바닥에서 소리쳤다. 만류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시트리는 듣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는 아예 전력을 퍼부으려는 오만의 왕에게 몸을 던지며 마몬을 추억했다. 용호에게 마지막 미소를 보이며 나태의 힘을 최대한도로 일으켰다.

    불꽃.

    왕이 스스로를 산화시켜 일으키는 아름답고 거대한 불꽃!

    그것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오만의 왕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시트리 스스로의 의지도 아니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그것을 저지했다. 하나 된 목소리가 눈앞에서 일어나려는 희생을 용납하지 않았다. 용호의 의지와 부름이 마침내 그를 이끌어냈다. 한 자리에 모인 칠대죄악의 공명이 그를 오랜 잠에서 일깨웠다. 그는 결코 시트리의 죽음을 지켜만 보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아.]”

    허락할 수 없어. 너는 내 것이니까. 네 영혼은 나의 것이니까!

    부식 결계가 해제된 순간 오만의 왕의 마력에 밀린 시트리가 튕겨져 나갔다. 카타리나가 그녀를 허공에서 붙잡았다.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트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오만의 왕은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격노의 왕은 전율했다. 색욕의 왕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 하고도 수백 년 전의 기억이 새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구시온이 소리 높여 외쳤다. 12 사역마 모두의 울부짖음을 대신했다.

    “나의 왕이시여!”

    용호와 마몬은, 하나 된 탐욕의 왕은 부름에 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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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하고도 수백 년 전 그날.

    탐욕의 왕 마몬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탐욕의 왕 마몬은 천계의 문을 닫고 힘이 다해 죽었다.

    오만의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탐욕의 왕 마몬은 결코 그렇게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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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느꼈다. 이해했다.

    별을 헤아리는 유노는 용호에게 말했다. 당신은 탐욕의 왕 마몬의 환생이 아니라고. 하지만 당신의 곁에는 항상 마몬이 함께하고 있다고.

    마몬의 유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노가 본 것은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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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장과 신인들을 죽이고 또 죽인 마몬은 마침내 천계의 문을 닫았다. 어마어마한 천계의 힘에 노출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마계 제일의 위대한 왕이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던 나태의 왕 시트리가 마몬을 맞이하였다. 마몬은 오열하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네 힘으로 나를 죽여줘.’

    시트리의 품에 안긴 마몬은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몸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의 천계의 힘이 담겨 있었다. 마력으로 짓누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몬의 숨이 끊기는 순간 천계의 힘은 폭주할 터였고, 마계에는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질 터였다.

    그래서 마몬은 시트리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부식 결계로 마몬 자신을 천계의 힘과 함께 세상에서 지워 달라 청했다.

    마몬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잔혹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었다.

    시트리는 떨리는 손으로 마몬을 끌어안았다. 부식 결계를 펼쳐 마몬의 청을 들어주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긴 시간을 들여 마몬의 목숨을 끊었다.

    시트리의 영혼은 천계의 힘에 중독되었고, 그녀의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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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탐사를 시작하자마자 아몬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

    스카자하가 보여준 기억을 체험하던 중 들려왔던 목소리.

    인계에서 보았던 마몬의 기억.

    마몬 사후 천 년의 세월동안 어찌하여 탐욕의 죄를 이은 자는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 긴 세월 동안 탐욕의 죄는 대체 어찌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찌하여 시트리는 탐욕과 식탐, 격노의 힘을 얻지 못했던 것일까.

    용호는 모두 이해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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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트리의 품 안에서 숨이 다하기 전 마몬이 마지막으로 행한 일.

    시트리의 부식 결계가 천계의 힘을 거두어 주었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일.

    칠대죄악은 마신왕의 영혼의 파편.

    탐욕의 왕 마몬은 탐욕의 죄를 놓지 않았다. 스스로를 소유했다. 천 년의 세월을 거쳐 탐욕의 죄 그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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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마몬을 느꼈다. 그는 탐욕이었다. 용호 자신과 함께하는 존재였다. 이미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용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공간을 뛰어넘어 시트리와 카타리나의 곁에 섰다. 오열하는 시트리를 품에 안으며 탐욕의 신기의 힘을 발하였다.

    탐욕의 신기의 힘은 소유.

    오만의 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탐욕의 왕을 막기 위해 오만의 신기를 휘둘렀고, 오만의 빛과 질시의 검은 기운을 한 데 모아 내뿜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용호는 시트리를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를 소유했다. 그녀의 영육 모두를 받아들였다. 천계의 힘 따위 집어삼키며 열세 번째 예속 사역마의 계약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변화.

    그리하여 이 세상에 강림하는 것.

    마신왕의 심장이 요동쳤다. 일곱 번째 발톱이 용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제 칠마가 발동하였고, 탐욕과 식탐, 격노와 나태 네 가지 죄악이 용호의 영혼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용호의 머리 위에 돋아나 있던 빛으로 된 여덟 개의 뿔이 모두 사라졌다. 뿔의 개수로 지금의 용호를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만의 빛과 질시의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천계의 힘이 증발해 사라졌다.

    전장에 있던 모두는 싸움을 잊었다. 심지어는 천계의 존재들조차도 움직임을 멈추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탐욕의 왕.

    아니, 탐욕의 마신.

    용호는 아몬을 움켜쥐었다. 탐욕의 불길을 일으켰다.

    오만의 왕을 내려다보았다.

    제 75장 - 마몬 끝, 최종장 - 마신왕으로 이어집니다.

    < 제 75장 #5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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