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23화 (223/227)

< 제 75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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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요동치다 못해 세상 자체가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았다. 실로 개벽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힘의 격돌이었다.

지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두 왕의 마력이 서로 맞닿은 부분 근방에 있던 자들은 거대한 벽 사이에 끼인 것처럼 압사 당했다. 그야말로 종족을 가리지 않았다. 고블린이나 임프 같은 작은 인간형 몬스터는 물론이고 오우거나 트롤 같은 중대형 몬스터들조차도 몸이 터져 죽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거대한 괴수조차도 마력의 틈바구니에서 비명을 지르다 바닥에 나자빠졌다.

마신.

실로 신과 같은 마력.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무엇이 있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본능이라 해도 좋았다. 심지어는 던전 상회 마스터 키에 의해 ‘정지’당한 사역마들조차도 눈동자를 굴렸다.

수십 만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들 모두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것처럼 꺽꺽거리며 하늘을 우러렀다.

모두가 압도된 가운데 격노의 왕이 뿔피리를 입에 물었다. 색욕의 왕을 공격하는 대신 있는 힘껏 뿔피리를 불었다.

각성의 소리였다. 격노의 왕은 시트리가 유지할 수 있는 정지 시간이 이제 십초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남부 군이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북부 군을 지금 이 순간 쓰러트려야 했다. 잔혹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팔부중의 왕이었다.

거대한 적막을 뿔피리 소리가 깨트렸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팔부중의 수장들이었다.

“찢어발겨!”

가루라왕 비류박차가 명령했다. 오랜 세월 억압받고 학대받는 종족을 지키기 위해 훈련을 쌓은 팔부중의 전사들은 즉각 반응했다. 단 1초도 더 낭비하지 않고 주변에 있던 북부 군을 공격했다.

몇 초였다. 고작해야 몇 초인 그 시간들 동안 전장 곳곳에서 변화가 일었다.

용 군주 앙카블로사를 비롯한 용 군단은 더 이상 오만의 왕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준비했다. 하늘에 자리한 북부 군의 비행형 몬스터들과 괴수들을 쓸어버릴 채비를 갖췄다.

루시아는 적색거룡 티아메트가 아닌 탐욕의 미궁에 자리했다. 심층 심장 방에서 가장 위대한 던전의 힘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더욱 큰 아우라가 남부 군 전체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시트리가 수를 헤아렸다. 정지가 풀리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이제 겨우 수초 남짓이었다.

용호와 오만의 왕이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았다. 격노의 왕과 색욕의 왕이 눈부시게 빠른 공격을 주고받았다. 앙카블로사가 입 안 가득 드래곤 브레스를 머금었고, 용 군단의 여러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용언 마법의 마지막 문장만을 남겨두었다. 사마엘의 일격이 아브라삭스의 마력장을 깨트렸고, 엘리고스와 오필리아의 일권과 일각이 각각 비프론즈 마법을 파괴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를 모두 헤아린 순간.

드래곤 브레스가 하늘을 뒤덮었다. 번개폭풍이, 하늘에서 내리는 불의 비가,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이 북부 군을 휩쓸었다. 일시에 펼쳐진 극대급 용언 마법들 앞에 북부 군이 거짓말처럼 죽어나갔다.

정지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북부 군은 재빠른 반격을 취하지 못했다. 정지가 풀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작 몇 초였지만 그 몇 초는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한 몇 초였다. 정지가 풀린 그 순간 남부 군을 눈앞에 두고 있던 북부 군들은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완전한 정지를 맞이하였다.

용호와 오만의 왕은 더 이상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지 않았다. 용호가 돌진했고, 오만의 왕은 질시의 검은 거인 안에서 두 손을 크게 휘둘렀다. 검은 거인의 양 손에서부터 일어난 오만의 빛이 용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녹염이 빛과 충돌했다. 이미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었다. 마력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었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식탐의 죄가 오만의 빛을 먹어치웠다. 다 먹지 못한 것은 탐욕의 죄가 불살랐다. 격노의 죄로 전신을 강화한 용호가 질시의 검은 거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몬을 크게 휘둘러 지독한 감정의 덩어리를 찢어발겼다!

“왕이시여!”

아브라삭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른 직후 다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도저히 오만의 왕을 바라볼 여유를 만들 수가 없었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은 던전 상회 이사들 가운데서 가장 빠른 자였다. 아브라삭스는 그녀의 공격을 보면서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저 막대한 마력을 퍼부어 전 방향을 마력장으로 도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로바스의 부재가 뼈아팠다. 배신한 세 이사들 가운데서 사마엘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은 무투가인 그였다.

“빌어처먹을!”

압도적인 마력 그 자체로 찍어 누르려 해도 소용없었다. 탐욕의 왕의 예속 사역마가 된 사마엘은 이사 시절의 사마엘과는 너무나 달랐다. 정조준하지 못한 마력은 그녀의 마력을 따라 비껴나갈 뿐이었다.

아브라삭스는 조바심을 느꼈다. 날 때부터 어마어마한 마력을 타고난 그는 마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 외의 싸움방식을 잘 알지 못했다. 비프론즈라면 다양한 마법을 조합해 사마엘의 발이라도 묶을 터였지만 아브라삭스는 그렇지 못했다. 태어나 몇 번 마주해보지 못한 열세에, 그것도 발 아래로 보던 자의 맹공에 당황한 그는 가진 바 역량의 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전투에 있어 뿔의 개수는 절대적이지 않다.’

구시온의 말이었다. 사마엘은 공감했다. 다시 한 번 아브라삭스의 시야에서 사라져 등 뒤를 노렸다.

몇 수가 남지 않았다. 비프론즈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오랜 벗이 함께 수를 짜주었지만 그 어떤 경우의 수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네 개의 손으로 동시에 수인을 맺어 네 개의 마법을 발동시켰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마몬 가의 마법사인 티그리우스는 양 손으로 서로 다른 마법을 발동시켜 비프론즈의 마법을 상쇄시켰고, 마몬 가의 두 야수는 무식하게 짝이 없는 맹공으로 마법 그 자체를 분쇄하거나 견뎌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의 공격이 워낙 거세고 빨랐기에 비프론즈는 시간을 들여 마법을 준비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쥐어짜낸 마법들로는 마몬 가의 세 예속 사역마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애당초 뿔이 여섯 개인 사역마 셋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 오랜 벗은 앞으로 일곱 수를 말했고, 비프론즈도 동의했다.

색욕의 왕의 예속 사역마들은 비프론즈를 도우러 가지 못했다. 남부 군의 맹공으로부터 색욕의 군세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아브라삭스에게 하나, 비프론즈에게 셋, 색욕의 왕에게 다시 둘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등한 숫자의 예속 사역마들이 남아 있었다.

침묵의 전사 리처드가 오랜 금언의 시간을 깨트렸다. 그는 소리높이 포효하며 색욕의 군세를 박살냈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서도 최강의 무투파라 불리는 구시온에 버금가는 그였다. 리처드의 맹진을 막을 자는 색욕의 군세에 없었다. 양떼 사이에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간 격이었다. 새카만 몽둥이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리처드의 주위에 있던 색욕의 군세가 한 무더기씩 세상에서 지워졌다.

스카자하가 무한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그녀는 남부 군을 치료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북부 군 사이로 파고들어 그녀가 어째서 불사의 마녀라 불리는 지를 증명했다. 그 어떤 공격도 초월적인 재생력을 가진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못했다. 생명의 힘을 다루는 스카자하는 참으로 그녀다운 방식으로 북부 군을 공략했다. 푸른 물결이 휘몰아칠 때마다 과도한 생명력을 주입 받은 북부 군들은 몸이 터져 폭사했다. 팔이 잘려나간 부위에서 수십 개나 되는 팔이 돋아나 목숨을 잃는 자도 있었다.

“스컬컬!”

스컬 부대는 이미 전장의 악몽이었다. 죽음의 화신은 사방 천지에 죽음을 뿌리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 일어섰다. 폭풍처럼 진군하는 스컬 부대의 뒤를 따랐다. 북부 군이 죽으면 죽을수록 스컬 부대의 뒤를 따르는 사자의 무리가 커져만 갔다.

부케팔로스가 녹색 숨결을 토했다. 질주하는데 그치지 않고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짓밟아 부쉈다. 악몽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생명과 죽음 모두가 북부 군의 적이었다. 북부 군은 극한 혼란과 공포 속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정지 상태에 처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오만의 왕은 북부 군을 애당초 신경 쓰지 않았다. 색욕의 왕은 북부 군을 보살필 수 없었다.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는 자신의 목숨 외에 다른 것에 아주 잠깐의 시간도 허비할 수 없었다.

남부 군은 군대였고, 북부 군은 더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전투의 향방은 순식간에 대군 간의 회전에서 학살전으로 변모하였다.

“나는 용호 꺼야! 용호 꺼라고!”

카이완이 소리치며 사복검을 사방팔방으로 휘둘렀다. 검의 폭풍우로 북부 군을 도륙하며 색욕의 왕이 아닌 다른 곳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색욕의 왕이 지닌 유혹의 힘은 과연 강렬했다. 어째서 똑같이 죄악과 신기를 가진 격노의 왕 외에는 누구도 색욕의 왕에 맞설 수 없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브리가다를 통해 탐욕의 마력을 이끌어내도 견뎌내기 어려웠다. 마그나돈에게 물려받은 열정의 힘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색욕의 왕을 돕고 싶었다. 그녀의 발등에 입 맞추고 싶었고,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녀가 말하라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개처럼 짖으라 해도 좋았다. 그녀 앞에 조아려 복종하는 것은 행복이었다.

“개소리 마! 나는 용호 꺼야!”

카이완은 그 모든 망상에 용호를 대입하며 견뎌냈다. 유스티아가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가운데서 그나마 색욕의 왕에게 가장 잘 저항할 수 있는 자라 꼽은 것이 카이완이었다. 카타리나는 반은 서큐버스의 피가 흘렀기에 몽마의 왕인 색욕의 왕에게 저항할 수 없었고, 남은 사역마들 가운데서 용호에 대한 사랑이 가장 강한 것은 역시나 카이완이었다.

“으아아! 정실부인의 의지!”

카이완이 다시 발악하듯 외치며 사복검에 왜곡의 권능을 실었다. 공간 자체를 일그러트리며 그 어떤 북부 군도 색욕의 왕과 격노의 왕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격노의 왕은 카이완의 외침을 들었다. 반박하거나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나를 때릴 거야?

안 돼, 아파.

하지 마.

나를 사랑해줘!

색욕의 왕에게서부터 뿜어지는 유혹의 힘이 너무나 거셌다. 죄악과 신기는 다른 죄악의 힘을 중화시키는 것이지 상쇄시켜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색욕의 왕.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 죄악의 힘을 품은 기간을 논한다면 격노의 왕 자신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죄악과 신기에 대한 이해도와 활용 능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격노의 왕은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색욕의 왕의 유혹에 의해 자결하고 만 수백 명에 달하는 팔부중의 전사들을 생각했다. 노여움으로 격노의 죄를 더욱 거세게 일으켰고, 브리가다 반지를 통해 탐욕의 마력을 이끄는 한편 용호에 대한 사랑을 기억했다.

“크앗!”

격노의 왕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붉은 투기로 만들어낸 투기무장 강신의 기운을 색욕의 신기가 갈랐다. 긴 태도의 형태를 한 색욕의 신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격노의 왕의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위에 날카로운 검상을 남겼다.

격노의 왕은 전투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실전을 경험한 왕이었다. 날 때부터 팔부중의 희망이었던 그녀는 팔부중 최고의 전사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뼈를 깎는 수련을 해왔다.

하지만 미치지 못했다.

색욕의 왕은 검마였다. 천 년 전에 이미 마계 제일이라 불리던 위대한 검사였다.

제아무리 격노의 왕이라 한들 단신으로 검마에 맞서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만 벌자. 시간만 벌면 돼. 낭군님을 믿는 거야!’

격노의 왕은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소유주를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격노의 죄에 의존했다. 마력도, 기술도 모두 밀리는 그녀가 색욕의 왕을 앞서는 것이 있다면 괴력과 방어력이었다. 격노의 왕은 속된 말처럼 색욕의 왕의 공세를 몸으로 견뎌냈다.

격노의 왕의 역할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용호가 오만의 왕을 쓰러트리면 남부 군 전체가 승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최고의 그림은 격노의 왕이 색욕의 왕을 쓰러트린 뒤 용호를 돕는 것이었지만 과욕이었다. 격노의 왕은 이를 악물고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몸을 돌보지 않는 격노의 왕의 전투법은 그녀와 색욕의 왕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나마 좁혀주었다. 격노의 왕이 이 순간을 힘겹게 견디고 있듯이 색욕의 왕 또한 여유를 보이지 못했다.

짐승의 이빨과도 같은 격노의 신기가 허공을 물어뜯었다. 색욕의 왕은 연달아 지면을 박차 간신히 그 공격을 피했다. 격노의 왕과 벌어진 거리를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아 좁힌 뒤 색욕의 신기를 휘둘렀다.

일참.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일격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격노의 왕은 급히 몸을 뒤틀어 색욕의 신기를 피했다. 긴 태도가 격노의 왕의 어깨와 가슴을 스치며 다시 한 번 기다란 상흔을 남겨놓았다.

격노의 왕과 색욕의 왕이 서로를 보았다. 격노의 왕이 주먹을 당겼고, 색욕의 왕이 놀랄만치 빠르게 검을 회수했다. 허나 두 사람이 직후에 보인 행동은 서로를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하늘을 돌아보았다.

하늘 곳곳에 금이 갔다.

천계의 구멍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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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5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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