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21화 (221/227)

< 제 75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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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군은 마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군이었다. 아직 다 뭉치지 않았음에도 큰 덩어리 하나에 포함된 사역마의 숫자가 십만이 넘었다.

대군의 이동은 산과 숲이 대지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더욱이 북부 군은 지상군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여러 비행형 몬스터들과 거대한 괴수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피아를 떠나 경탄이 일만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멀리서 북부 군의 움직임을 관측하던 가릉빈가들은 경이와 두려움에 압도당했다.

색욕의 왕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대군의 한 복판에 있었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히드라가 끄는 전투용 마차 안이었다.

히드라가 끄는 마차답게 거대했다. 가히 이동하는 궁전이라 해도 좋을 모습이었다.

색욕의 왕은 창가에 서 있었다. 마계의 붉은 하늘 대신 잿빛 구름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천계의 구멍이 다시 열렸다. 신인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천계의 힘은 여전히 마계의 존재들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천 하고 수백 년 전. 참으로 먼 옛날이지만 색욕의 왕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죄악을 가진 왕들이 마계 역사상 최초로 한 자리에 모였던 그때 그 시절로, 천계라는 외부의 적에 맞서 단결했던 그 옛날로.

색욕의 왕은 눈을 감지 않았다. 부질없는 감상이었다. 이미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과거를 추억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몇 번을 후회해도 과거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아침에 마계를 제압하려했던 오만의 왕의 기습 작전이 실패했을 때 색욕의 왕은 잠깐이나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냥 이대로 싸움을 멈추면 어떠할까.

굳이 남부를 제압해야만 하는 것일까?

폭력의 왕은 죽었다.

식탐의 왕과 질시의 왕도 없었다.

오만의 왕은 과거 마몬이 올랐던 경지에 올랐다. 아니, 단순히 마력만을 논한다면 이미 마몬을 뛰어넘었다.

아직 격노의 왕과 나태의 왕이, 다른 누구도 아닌 탐욕의 왕이 남아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오만의 왕에 견줄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오만, 질시, 색욕, 식탐 네 왕의 영토가 있었다. 마몬조차도 이렇게나 넓은 땅을 손에 넣지는 못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싸움을 멈추고 싶었다. 남부는 결코 북부를 먼저 노리지는 못할 터였다. 오만의 왕이 결심만 한다면 바로 몇 달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긴장 속에서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빗방울이 차가웠다. 색욕의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수천 년을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마몬과 함께 천계와 맞서 싸운 시절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질시의 왕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굴복하였고, 오만의 왕은 지독한 열등감을 표출하였다. 색욕의 왕 자신도 그런 왕들 사이에서 우물쭈물했을 뿐이었다.

오만의 왕을 멈춰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만의 왕이 마몬을 배신하려 한 그때 끝내 말리지 못하고 동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색욕의 왕 자신은 오만의 왕의 뜻을 거부하지 못했다.

마몬이 끝끝내 스스로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마계를 구원했을 때 색욕의 왕은 절감했다.

마몬 가가 사실상 몰락한 그 순간 오만의 왕의 얼굴에 떠오른 허무를 보며 이해했다.

색욕의 왕 자신이 알던 오만의 왕은 더 이상 없었다. 마몬이 마계를 구한 그날 오만의 왕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색욕의 왕은 돌아섰다. 어두운 실내 한 가운데에 커다란 옥좌가 있었다. 오만의 왕은 옥좌에 반쯤 누운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조각상이라도 된 마냥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만의 왕은 오만의 왕가를 먹어치웠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폭력의 왕의 자폭으로 인해 크나큰 상처를 입은 그는 지난 천 년의 세월동안 낳고 기른 모든 오만의 일족을 한 자리에 모은 뒤 모두 죽였다. 그들이 가진 정수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최고의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작들조차 놓치지 않았다. 오만의 왕이 흡수한 정수의 숫자는 일천을 헤아렸고, 그가 가진 지배의 권능은 정수 흡수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을 최소화했다.

색욕의 왕은 오만의 왕에게 다가섰다. 폭력의 왕이 자폭하던 날 오만의 왕을 따라나섰던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지금 오만의 왕과 다소 거리를 둔 곳에 있었다. 곁에 있다가는 언제 정수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색욕의 왕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옥좌 앞에 당도한 뒤에는 오만의 왕이란 이름의 괴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 하고 수백 년 전 그날 색욕의 왕 자신이 탐욕의 왕의 편을 들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천 년 만에 돌아와 자신을 도우라 말하는 오만의 왕에게 거절을 표하고 질시의 왕을 도와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색욕의 왕은 오만의 왕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도 불가능한 가정들뿐이었다. 색욕의 왕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수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손들의 육신을 빼앗아 연명한 괴물.

천년의 세월동안 자손들을 개나 소처럼 다루며 최고의 하나를 만들어낸 광인.

일천이 넘는 자신의 혈육들을 모두 죽여 먹어치운 학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색욕의 왕 자신의 정수와 죄악을 탐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색욕의 왕 자신이 끝끝내 오만의 왕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천계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부에는 천 년 전의 배신을 경험한 마몬의 12 사역마들과 나태의 왕 시트리가 있었다. 천계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대통합 같은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천계의 문은 시간제한과 같았다. 발밑에서 차오르는 물에 비유해도 좋았다.

시간이 되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 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남부 군을 무찌르고, 천계의 문까지 닫아 모든 일을 끝내면.

그때는 오만의 왕이 만족할까? 마몬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다시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색욕의 왕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오만의 왕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조금밖에 안 되는 온기를 찾아 뺨을 밀착시켰다.

색욕의 왕은 눈을 감았다. 과거 대신 미래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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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정원은 고요했다. 푸른 하늘 아래 낮밤을 가리지 않고 농사일을 하던 스켈레톤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컬의 껄껄 거리는 웃음도 없었고, 기회만 있으면 농땡이를 피려는 용아병도 없었다. 데스나이트의 지휘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휘둘러지던 수백 개의 쟁기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한 달은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일 년을 헤아리는 유리아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생명의 정원의 수비대장인 트리엔트는 뒤뚱뒤뚱 걸어 감자 밭 앞에 섰다. 정원사인 스카자하마저 떠난 생명의 정원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농사일에 매진 중인 유리아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쪼그려 앉아 감자를 캐던 유리아는 어느 순간 호미를 내려놓았다. 쪼그려 앉은 채 고개만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활했다. 스컬 부대랑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보니 새삼 너무 넓게만 느껴졌다.

“왈왈?”

“낑낑?”

바둑이와 낑낑이가 동시에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그런 둘에게 대꾸하는 대신 목에 걸고 다니는 주머니를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낑낑이가 저번에 준 치킨 교환권이었다.

본래는 가주님이 돌아오시면 바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쓰지 못했다. 돌아오신 이후에도 가주님은 물론이고 모두가 바빴기 때문이다.

유리아라해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몬 가 던전의 고참 가운데 하나인 고블린 레인저의 존과 론 아저씨에게도 대강 이야기를 들었다. 가주님과 마몬 가 식구들은 지금 마계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큰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면 안 되었다. 유리아는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싸움이 끝나면 모든 게 다 옛날처럼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었다.

“가주님 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 그치?”

유리아가 짐짓 커다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둑이와 낑낑이는 따라 웃었고, 셋은 다시 한 번 호미질을 시작했다.

트리엔트는 그런 셋을 위해 가지를 흔들었다.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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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림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일했다. 탐욕의 미궁을 나와 이번 북부 원정에 동참한 그는 마몬 가의 정병들이 사용할 무기들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마몬 가의 수비대장이자 블랙오크 전대의 수장인 리쿰은 그런 버그림과 마주 앉아 자신의 무구들을 점검했다.

버그림은 본래 말이 없었고, 리쿰은 전투 전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버그림이 망치를 두드렸다. 돌연 고개를 든 리쿰은 버그림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 보려다가 이내 관두고 다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포라스 님의 명을 받아 마몬 가에 쳐들어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그래도 그때는 제법 가깝게 느껴졌었는데.’

마몬 가의 가주님을 모시고 자유도시를 찾았을 때가 생각났다. 랜드 웜을 격파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뜬 일도 기억났다.

리쿰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엠브리오의 대군에 맞서 싸웠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었다.

‘정말 굉장했지.’

본 드래곤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본 드래곤을 단신으로 격파하는 사람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가주님.

탐욕의 왕.

리쿰은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가깝고 먼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리쿰 자신은 자랑스런 마몬 가의 수비대장이었다. 그것이면 족했다.

버그림이 다시 망치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썩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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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거룡 티아메트의 갑판 위는 남부 군의 야영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지였다. 점차 새카맣게 변해가는 하늘을 등진 채 홀로 선 티그리우스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조금 먼 북부에서는 한창 쏟아지고 있는 장대비 덕분인지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엘리고스는 어쩌고?”

“엘리 오라버니는 지금 한창 가주님 뵙고 있어요. 그리고 밤은 기니까요. 어차피 이따 볼 거니까 괜찮아요.”

티그리우스 옆에 선 오필리아는 마찬가지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티그리우스의 것과는 달리 제법 고풍스런 느낌이 나는 곰방대였다.

마몬 가가 손이 부족해 몸부림을 치던 시절부터 쭉 마몬 가의 바깥 살림을 돌봐온 두 사람이었다. 공백지 북부에 요새 도시를 만드는 과정도 함께했기에 사이가 결코 멀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라 해도 좋았다.

티그리우스는 점잖게 담배만 태웠고, 오필리아는 하얗고 긴 연기를 토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많은 것들이 변했죠? 짧은 시간 만에.”

용호는 오만의 왕의 뜻을 따라주었다. 남부 군은 현재 북부 군과 마찬가지로 천 년 전 천계의 문이 열렸던 장소로 진군 중이었다.

이제 겨우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후면 마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티그리우스는 북쪽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역사는…….”

말끝을 흐렸다. 오필리아는 티그리우스를 돌아보았고, 티그리우스는 노신사에 어울리는 점잖은 미소를 그렸다.

“역사서에서만 보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필리아도 웃었다. 까르르 소녀처럼 웃은 그녀는 다시 곰방대를 고쳐 물었다.

“그러게요. 남부 깡촌 선술집 여주인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뿔이 여섯 개나 된 자신을 보면 아버지 엔델리온이 무슨 말을 하실까. 자랑스럽다며 기뻐하실까, 아니면 자신도 그리 되고 싶다며 질투하실까.

“우리가 주인은 참 잘 만났죠?”

비록 그 시작은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그 이후는 아니었다.

“부정하지 못하겠군.”

티그리우스는 다 태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갈무리 한 뒤 돌아섰다. 이왕 역사의 한 장면에 서게 되었으니 그 이름을 단단히 새기고 싶었다.

“하여간 청춘이셔.”

티그리우스의 단단한 뒷모습을 쳐다보며 짧게 평한 오필리아는 곰방대를 거뒀다. 천계의 문이 있다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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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몬 가의 주력 가운데 하나인 투기장의 사역마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대 인원이었고, 저마다 출신이 달랐지만 자그마치 천 년이었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투기장 안이었지만 그래도 천 년은 온갖 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투기장의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유독 뭉쳐 앉아 있는 무리는 역시나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이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가운데 10대 전 가주인 유크라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회색 머리칼 아래 자리한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카이완?”

카이완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가주들에게 다가섰다. 유크라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욕망 덩어리 가주님 곁에 있지 않고 왜?”

“본래 전투 앞두면 감성적으로 변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꽁냥꽁냥 하는 거 아냐?”

가주들 가운데 누군가가 목소리를 더했다. 투기장 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제법 활기찬 목소리였다.

“아직 며칠 남았으니까 신경 꺼요.”

적당히 답한 카이완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조상인 유크라시온 곁에 앉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뒤 물었다.

“구시온은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꽁냥꽁냥 거리고 있지.”

“찾아가지 마라. 민망할 거다.”

“너 설마 소박맞은 거냐?”

가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연이어졌다. 투기장 안에 있을 때만 해도 태반이 시체처럼 칙칙했는데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들 밝아졌는지 원.

“허튼 소리 마요. 그냥 잠시 자리 피해준 거니까. 아무래도 원년 멤버라는 것도 있으니까. 이따 밤 되면 다시 찾아가서 원 없이 꽁냥꽁냥 거릴 테니 걱정도 말고요.”

틱틱거린 카이완은 유크라시온 앞에 놓여 있던 빈 술잔 가운데 하나를 들어올렸다. 유크라시온은 그런 카이완의 잔을 채워주는 대신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진짜 소박맞은 거야?”

장난으로 낄낄 거리는 다른 가주들과 달리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유크라시온의 모습에 카이완은 난처함을 느꼈다.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자기 손으로 술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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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은 다른 곳에서도 채워졌다. 격노의 왕에게 약주를 따라주던 키르티무카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찾아 가십니까?”

“어딜 찾아가?”

“아시면서.”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키르티무카가 경망스럽게 웃었다. 순진하긴 해도 결코 지식이 없지는 않은 격노의 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친 소리 작작할래?”

“아직 혼례는 안 치르셨지만 흠흠.”

키르티무카가 다시 주책을 떨었고 격노의 왕은 허둥거렸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르디문디는 결국 미소를 선택했다.

격노의 왕이 탐욕의 왕의 예속 사역마가 됨에 따라 가르디문디와 키르티무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격노의 왕과의 예속 사역마 관계 자체는 끊어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서로 간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격노의 왕이 예속 사역마가 됨에 따라 얻게 된 힘을 가르디문디와 키르티무카는 나눠받지 못했다.

마계의 운명을 건 전투가 겨우 며칠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책을 떠는 키르티무카나, 뺨을 붉히며 허우적거리는 격노의 왕이나 모두 정겨웠다. 두려워 벌벌 떠는 것보다 이렇게 즐거이 보내는 것이 두 사람답기도 했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가르디문디는 오랜만에 앙숙인 키르티무카를 거들기로 했다. 주군에게 품기에는 무례한 감정이었지만, 허둥거리며 발뺌하는 격노의 왕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

신실한 벗이자 수하인 두 사람의 맹공에 격노의 왕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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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온과 스카자하는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서로의 온기를 만끽했다.

새삼 새로운 각오는 필요하지 않았다. 마몬을 홀로 떠나보낸 그날 흘린 피눈물로 족했다. 지난 천 년의 세월동안 다짐하고 또 다짐한 일을 구태여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었다.

스카자하가 구시온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구시온은 스카자하의 가냘픈 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유스티아는 카드 점을 보지 않았다. 천 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순리에 따를 생각이었다.

유노는 그런 유스티아를 탓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침묵하는 리처드를 찾아갔다. 바위처럼 묵묵히 선 리처드의 입은 오늘도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결코 벙어리가 아니었다. 유노는 지금도 리처드의 목소리를, 그의 절규를 기억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과거를 기억했다. 그 날 모두가 함께 품었던 뜻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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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거룡 티아메트의 함장 석 바닥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 거적을 깔고 앉은 용호의 곁에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있었다. 스컬은 저만치 바닥을 뒹굴 거렸다.

아바타 오브 데스-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구르는 것이 너무나 어울리는 스컬이었다. 용호는 스켈레톤 일꾼이던 시절의 스컬을 떠올리며 키득 웃었다.

엘리고스는 용호의 눈앞에서 직접 팬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용호가 막 마몬 가의 가주에 올랐을 당시에는 매일 같이 보던 풍경이었다.

주름이 확연히 줄고 몸도 훨씬 좋아졌지만 엘리고스 역시 스컬처럼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마몬 가의, 용호의 집사장이었다.

“냄새 좋네.”

“거의 다 됐습니다.”

엘리고스가 푸근하게 웃으며 용호가 인계에서 사다준 프라이팬을 간이용 화덕 위에서 슬슬 돌렸다.

난데없이 팬케이크를 굽게 된 것은 용호의 요청 때문이었다. 비록 마몬 가 마왕의 방은 아니었지만, 카페트 위에 깐 거적과 바닥을 뒹구는 스컬, 팬케이크를 굽는 엘리고스에게서 용호는 향수를 느꼈다.

어렸을 때 플레이 한 RPG게임이나, 즐겨보던 만화에서 꼭 이런 장면들이 나왔었다. 마지막 전투를 하기 전에 동료들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말이다.

당시에는 막판에 왜 궁상이냐고 투덜거렸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막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큰 싸움을, 그것도 마계의 운명을 건 싸움을 눈앞에 두니 절로 수하들과- 아니,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아니, 이제 6년 전이라 해야 할 그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에는 마왕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5년 뒤에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용호 자신을 찾아왔다.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

죽을 고비를 정말이지 수없이 넘겼다. 인계에서 평범한 대학 새내기로 지냈으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들이 너무 많았다.

용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침에 약하고 밤에 강한 카타리나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팬케이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타리나도 똑같네.”

“네?”

카타리나가 귀를 살짝 움찔거리며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는 끌끌끌 혀를 찼다.

“처음에는 진짜 쿨한 여기사일줄 알았는데. 호구에 허당이여.”

크림슨 오우거 상대할 수 있냐니까 울상 지으면서 대답을 주저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카타리나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살랑살랑 거리던 꼬리로 용호의 팔을 살짝 쳤다. 소심한 그녀가 용호에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반항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라?”

용호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높였고, 혹여 자기가 꼬리로 친 거 때문에 그런가 싶은 카타리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꼬리를 수습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카타리나에게 꼬리로 좀 맞는다고 화를 낼 용호도 아니었고 말이다.

용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하며 말했다.

“진화 숙련치가 꽉 찼다?”

진화 숙련치는 전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 전반을 통해 습득이 가능했다. 그리고 방금 꼬리치기 한 방으로 카타리나의 진화 숙련치가 가득 찼다.

합체 강화를 한 건 얼마 안 되었지만, 진화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말미를 찍은 것이 꼬리치기라는 점이 우습긴 했지만 슬슬 할 때가 되기도 했다.

“가만있어 봐.”

용호는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어쩐지 모르게 오랜만인 것 같은 진화 상태 창을 보았다.

[이름 : 카타리나 (여)]

[종족/직위 : 쉐도우 퀸 (혼성마)]

[분류 : 마인 (최상급)]

[속성 : 바람 4레벨 / 어둠 10레벨]

[개체 천성]

[순박함 / 호구 / 요염함]

[개체 적성]

[매력 / 마력 / 민첩성 / 기량]

[진화 숙련치 : 100/100]

[매력 특화 7레벨 | ★★★★★☆(5.5)]

[체력 특화 5레벨 | ★★★★☆(4.5)]

[민첩 특화 9레벨 | ★★★★★★(6)]

[마력 특화 9레벨 | ★★★★★☆(5.5)]

[기량 특화 8레벨 | ★★★★★☆(5.5)]

[속성 강화 7레벨 | ★★★★★☆(5.5)]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해진 진화 상태 창이었다. 개체 천성 항목을 본 용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순박하면서도 요염한 호구라는 게 딱 카타리나다운 천성이었다.

“좋아, 그럼 간만에 진화를 해볼까?”

진화라는 말에 귀를 파닥파닥 거리며 좋아하던 카타리나는 개체 천성 ‘엉큼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용호의 모습에 뺨을 붉혔다. 긴장해서인지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주인이여.]

[번뇌력이 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스컬컬.”

스컬이 껄껄 웃었고 엘리고스 역시 푸근하게 웃었다. 카타리나 혼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용호는 카타리나의 양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용호 자신이 결코 엉큼해서가 아니었다. 아몬을 처음 발견했던 그 날, 카타리나를 진화시켰던 그 순간을 재현하고 싶어서였다.

카타리나도 결국엔 웃었다. 용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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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모두가 잠든 가운데 홀로 깬 시트리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과거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천계의 문 아래에서 최후의 결전이 펼쳐지는 것은 같았지만 그 대상도, 목적도 달랐다.

부당한 배신은 없었다. 전력을 다해 적과 맞서면 되는 단순한 싸움이었다.

시트리는 언제나처럼 과거를 곱씹었다. 가장 쓰리면서도 가장 선명한 기억을 떠올렸다.

시트리 자신의 손에서 마몬이 죽던 그 순간.

시트리 자신이 마몬의 마지막 숨을 끊은 그 순간.

마몬은 울지 말라 말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미소를 머금었었다.

“마몬.”

천계의 문이 열렸던 장소 아래 공백지에는 마몬의 무덤이 있었다. 오만의 왕과의 최종 결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시트리는 스스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시 한 번 마몬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각오를 굳혔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와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으리라.

밤이 깊었다.

시트리의 곁으로 새벽이 성큼 다가왔다.

&

< 제 7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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