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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20화 (220/227)
  • < 제 75장 - 마몬 >

    제 75장 - 마몬

    탐욕의 왕 마몬이 천계의 문을 닫았다.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마계를 구원하였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마몬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항시 마몬과 함께 했던 아몬조차도 그랬다. 12 사역마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홀로 계단을 오르는 마몬의 뒷모습이 다였다.

    하지만 시트리는 그렇지 않았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이 탐욕의 미궁으로 강제 귀환 조치 당한 그때에도 그녀는 마몬의 곁에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탐욕의 왕 마몬의 진정한 최후.

    그가 천계의 문을 닫고 행한 모든 일들.

    시트리는 기억했다.

    결코 잊지 못했다.

    잊을 수 없었다.

    &

    마몬 가와 팔부중의 주요 인사 모두가 적색거룡 티아메트에 모였다.

    비밀스런 회동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를 아는 것은 마몬 가와 팔부중 양측 모두에서도 극소수뿐이었다.

    적색거룡 티아메트의 코어를 단말로 삼은 루시아는 몇 시간이고 공을 들여 탐욕의 미궁과 티아메트 사이의 마력 공유로를 만들어냈다. 마계의 남쪽 끝에 자리한 탐욕의 미궁과 현재 티아메트가 자리한 팔부중의 던전 요새 사이의 거리가 어마어마한 만큼 실로 장대한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해냈다. 문자 그대로 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용호와 격노의 왕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용호의 등 뒤에는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필두로 하는 ‘용호의 12 사역마’들이 자리했고, 격노의 왕의 등 뒤에는 가르디문디와 키르티무카 두 예속 사역마와 팔부중의 살아남은 수장들인 아수라왕 라크시카와 용왕 수르카, 가루라왕 비류박차가 자리했다.

    12 사역마와 팔부중의 수장들은 아무렇게나 서지 않았다. 그들 각자의 발아래에는 별을 헤아리는 유노와 길을 인도하는 유스티아가 그린 마법진이 있었다. 작은 마법진 여럿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는 형태였다.

    [자자, 긴장들 푸시고요.]

    [뭔가 주례사 같은 걸 해야 할 것 같지만 생략하도록 할게요!]

    루시아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자 12 사역마와 팔부중 수장들 모두의 얼굴에 저마다 다른 표정들이 그려졌다.

    격노의 왕은 뺨을 발갛게 붉혔다. 입술을 입 안으로 한 차례 말아 넣더니 살며시 고개를 들어 용호를 올려다보았다.

    천계의 공격이 확실시 된 상황인데다가 북쪽에는 오만의 군세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두려움과 공포에만 빠져 있는 것은 오히려 좋지 못했다.

    격노의 왕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다. 이 자리는 예속 사역마 계약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지만, 격노의 왕에게는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격노의 왕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밤새도록 고민을 한 결과였다. 용호는 그 눈을 마주하였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뒤 루시아에게 의식을 시작할 것을 명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의식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몸에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마력을 개방해 주세요.]

    12 사역마들 모두가 자신들의 뿔을 개방했다. 12 사역마 가운데 가장 마력이 약한 자도 여섯 개의 뿔을 가지고 있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똑같이 마력을 개방하려던 팔부중의 수장들은 다시 한 번 마몬 가의 힘을 절감했다.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마법진에 힘을 불어넣었다.

    탐욕의 미궁으로부터 전송받은 마력뿐만 아니라 12 사역마와 팔부중 수장들의 마력까지 집어삼킨 마법진에서부터 환한 빛이 일었다. 용호와 격노의 왕이 마주선 곳으로 마력이 집중되었다.

    용호가 하려는 것은 단순한 예속 사역마의 계약이 아니었다.

    예속 사역마가 된 가주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거느리고 있던 예속 사역마들을 모두 해방해야 했고, 던전의 영혼과의 연결 역시 끊어야만 했다.

    용호는 격노의 왕에게 그 모든 것들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특별한 계약을 준비했다.

    마계에 예속 사역마 계약을 최초로 만들어낸 유노와 유스티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들은 예속 사역마 계약에 필요한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높이는 대신 예속 사역마가 되는 격노의 왕의 많은 것들을 보존하였다.

    새로운 예속 사역마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기존의 예속 사역마들을 잃지 않는다.

    던전의 영혼과의 연결 역시 유지한다.

    집결된 마력은 정제되었다. 하얀 빛줄기가 용호와 격노의 왕을 휘감았다.

    [예속 사역마 계약을 진행합니다.]

    [주인님, 예속 사역마의 증표를 전달해 주세요.]

    용호는 격노의 왕의 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 위에 브리가다 팔찌를 채워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버그림이 온갖 솜씨를 부려 만든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빛이 용호와 격노의 왕을 완전히 뒤덮었다. 반지를 전달함에 따라 예속 사역마의 계약이 완성되었다.

    변화가 일어났다. 12 사역마들은 자신들과 용호 사이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됨을 느꼈다. 격노의 왕은 직접적인 영혼의 연결에 전율했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용호와 격노의 왕 둘 모두 예속 사역마 계약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용호에게는 자그마치 열 한 명이나 되는 예속 사역마가 있었고, 격노의 왕에게도 키르티무카과 가르디문디가 있었다.

    하지만 달랐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경험해본 예속 사역마 계약과 지금의 계약은 천지차이라 해도 좋았다.

    죄악을 가진 왕이 다른 왕의 예속 사역마가 되는 계약이었다. 마계가 열린 이래, 탐욕의 왕 마몬이 예속 사역마 계약을 만들어낸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용호는 격노의 힘을 느꼈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브리가다를 통해 전해지는 탐욕과 식탐의 마력에 몸을 떨었다. 고통과 쾌락 속에 열기로 가득 찬 숨을 토했다.

    탐욕, 식탐, 격노.

    과거 탐욕의 왕 마몬의 영육 아래에서 하나가 되었던 세 죄악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마신왕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마몬의 신기 또한 반응했다. 주인을 찾지 못했던 마지막 힘을, 별을 헤아리는 유노의 사랑을 드리타라슈트라에게 전달했다.

    스카자하의 생명, 스컬의 죽음, 카타리나의 정의, 사마엘의 창조, 오필리아의 명예, 티그리우스의 조화, 구시온의 용기, 리처드의 신뢰, 카이완의 열정, 엘리고스의 인내, 드리타라슈트라의 사랑.

    그리고 아몬.

    12 사역마가 모두 갖춰줬다. 이제야 비로소 마몬의 신기가 완성되었다.

    용호는 깨달았다.

    탐욕의 왕 마몬이 마몬의 신기를 만든 진짜 이유. 그가 마몬의 신기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

    마몬의 신기가 세 개의 죄악을 하나로 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흩어져 있던 그들에게 본래는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시트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세 죄악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나태를 느꼈다. 가슴의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용호를 바라보았다.

    용호의 머리 위로 빛으로 된 뿔이 돋아났다. 하나에서 시작한 그것은 단숨에 일곱 개까지 늘어났다. 더욱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덟 번째 뿔.

    세 죄악이 하나 되어 탄생시킨 거대한 힘!

    12 사역마들이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토했다. 격노의 왕이 스스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괴성을 토했다.

    용호는 포효했다. 전율 속에 마몬이 이룩했던 경지를 엿보았다.

    &

    던전 요새에 모여 있던 팔부중들은 무언가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동 던전 비마나와 탐욕의 왕이 타고 온 적색거룡 티아메트를 간간히 돌아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예속 사역마 의식은 끝났다. 의식에 막대한 힘을 소비한 12 사역마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몸져누웠고, 그들 모두가 회복하는 데는 거의 반나절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드리타라슈트라다.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적색거룡 티아메트의 선실 하나에 세 여자가 모였다.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일상화된 팔부중 사이에서 나고 자란 격노의 왕은 카타리나나 카이완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격노의 왕의 모습에 카이완은 여러모로 긴장했다. 헛기침을 한 번 터트리더니 약간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속 사역마로든 뭐든 우리가 선배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왕 대우 안 해 줄 거야. 알았지?”

    “그러려무나.”

    격노의 왕은 이번에도 선뜻 답했고, 카이완은 어쩐지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너무 유치하고 예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던 와중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말은 방금 저리했지만 상대는 어찌되었든 왕이지 않은가.

    과연 격노의 왕. 상상했던 것 이상의 강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얌전히 옆에 서 있던 카타리나가 카이완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왜?”

    “흠흠. 저도 카이완 님보다 선…….”

    카이완은 눈을 부라렸고, 소심하게 말을 잇던 카타리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카타리나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한 카이완이 다시 격노의 왕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내밀어진 상태인 격노의 왕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카이완이야. 얘는 호구리나고.”

    “가주님의 호위기사인 카타리나입니다.”

    한창 호무룩, 아니 시무룩하고 있던 카타리나가 얼른 정정했다. 꼬리가 발딱 선 것을 보니 꽤나 발끈한 모양이었다.

    격노의 왕은 헤하고 잠시 입을 벌리더니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우리는 잘 맞을 것 같구나. 그렇지?”

    눈을 껌벅이던 카타리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카타리나와 격노의 왕의 모습에 카이완은 신음을 삼켰다.

    ‘큭, 이 호구들.’

    격노의 왕도 격노의 왕이었지만 좋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카타리나는 또 뭐란 말인가.

    카이완은 얼른 손을 뻗어 카타리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대로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 안 돼. 호구리나는 내꺼야. 내 편이라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격노의 왕은 이번에도 카이완을 빤히 바라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디문디에게 미리 받은 조언대로 약간은 말투를 바꿔 답했다.

    “그래.”

    카이완은 이번에도 심음을 삼켰고, 카타리나는 귀와 꼬리를 파닥거렸다.

    &

    의식이 진행된 날 내내 북부 군 측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새로운 천계의 구멍 역시 열리지 않았다.

    둘 모두 남부 군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천계의 문을 제외한 나머지 천계의 구멍은 모두 불완전하다.]

    [크기가 크면 클수록 긴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가만히 방치해두면 언젠가는 문이 닫힌다.]

    일반적인 뒤틀림의 특성이었다. 천계의 구멍은 그 너머에 천계가 있다는 것이 특별할 뿐, 이계와의 일시적인 연결로라는 점 자체는 다른 뒤틀림들과 동일했다.

    [그러니 다소 무책임한 이야기지만 손이 닿지 않는 범위 밖에서 발생하는 구멍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최선이다.]

    [천계의 문을 최대한 신속히 봉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몬의 시대에는 조금 다르게 대응했었다. 마몬은 물론이고 12 사역마들까지 모두 나서서 천계의 구멍을 닫으러 다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마몬의 시대와는 달리 현재 마몬 가는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북부 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지금 함부로 전력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

    천계의 구멍에 의한 피해는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신인이 출현할 정도의 구멍이 열리면 자유도시나 던전 같이 꽤 큰 규모를 가진 곳도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싸움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끝내는 것이 용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몬의 이야기가 끝나자 가르디문디가 말을 받았다.

    “북부 군의 진로가 크게 변경되었습니다. 모두 지도를 봐주십시오.”

    이동 던전 비마나의 대회의장 한 가운데에는 모래로 만들어진 마계 전도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북부 군을 나타내는 붉은 모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노의 영토 동부 국경 지대 근방에 모여 있던 북부 군이 북서쪽으로 향했다. 아직 합류하지 못했던 북부 군 역시 그러했다.

    “아예 싸움을 멈추고 후퇴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색욕의 군세와 식탐의 군세는 저마다의 영토로 돌아갔을 겁니다.”

    하나로 뭉친 붉은 모래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가르디문디가 계속 말했다.

    “북부 군은 병력을 여럿으로 나눠 파상공세를 펼치는 대신 대규모 병력을 기반으로 한 판 싸움을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수집한 정보에 따른 북부 군의 예상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계 전도 위에 빛으로 된 선이 죽 그어졌다. 격노의 영토 곳곳에 자리한 팔부중들의 집단 거주지들을 관통하는 형태였다.

    제법 타당한 예측이었다. 하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한 판 싸움을 강요할 것이라면 굳이 침투로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설마하니 천계의 구멍이 재차 열리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대충 알 것 같군.”

    구시온이 돌연 말했고, 스카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법에 서툰 구시온을 대신해서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가르디문디가 그렸던 빛의 선 위로 새로운 빛의 선이 그려졌다. 가르디문디가 예상한 침투 경로와 다소 다른 그것은 격노의 영토와 질시의 영토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지를 지났다.

    던전도 자유도시도 아무 것도 없는 땅이었다. 북부 군이 구태여 지나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유노와 유스티아는 신음을 삼켰고, 스카자하는 북부 군을 이끄는 것이 오만의 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공백지.

    아무 것도 없는 땅.

    용호는 직감했다. 시트리가 마몬의 12 사역마를 대신해 알려주었다.

    “천하고도 수백 년 전 그 날, 천계의 문이 열렸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

    < 제 75장 - 마몬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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