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15화 (215/227)
  • < 제 74장 #2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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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의 심장이 ‘심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던전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생명체의 심장이 전신에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듯, 던전의 심장 또한 던전 곳곳에 마력을 주입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탐욕의 미궁에 마력을 공급한 것은 ‘표면의 마몬 가’에 자리한 던전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탐욕의 미궁을 완전 장악함에 따라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진정한 심장 방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던전과 가주의 관계는 긴밀했다.

    던전이 강해지면 가주가 강해졌다. 가주가 강해지면 던전 역시 강해졌다.

    던전의 영혼 루시아는 용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용호는 루시아의 모든 것이 표면의 심장 방에서 이곳 최심층의 심장 방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생히 느꼈다.

    마몬이 죽던 날 탐욕의 미궁의 영혼 역시 죽었다. 마몬은 예속 사역마인 12 사역마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 그들과의 예속 사역마 계약을 해지하였고, 그 결과 탐욕의 미궁은 마몬뿐만 아니라 12 사역마들에게서도 유리되고 말았다.

    루시아가 탐욕의 미궁의 고독을 달래주었다. 마몬과 생사를 함께한 던전의 영혼을 대신하여 탐욕의 미궁과 하나가 되었다.

    던전의 심장 방 전체에 루시아의 기운이 가득 찼다. 루시아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빛이 벽과 바닥, 천장 사이사이로 뻗어나갔다. 마치 말라붙은 강바닥을 새로운 물줄기가 적시는 것만 같았다.

    용호의 눈앞에 새파란 빛의 덩어리가 집결하였다. 공간도약의 마법이었다.

    빛은 이내 폭발했고,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는 빛 무더기 사이에서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나타났다. 루시아였다.

    등 뒤에 반투명한 나비 날개가 돋아난 루시아가 용호의 앞에서 빙그르르 회전했다. 새하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요정 같이 깜찍하죠?]

    [탐욕의 미궁을 장악한 덕분에 저도 무척 성장했답니다.]

    커다란 나비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 꽤나 귀여웠다. 하지만 용호는 루시아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날개 빼고는 그대로인데?”

    루시아는 열 살 남짓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덕분에 나비 날개가 여러 가지 의미로 더 어울리기도 했지만, ‘성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루시아가 끌끌끌 혀를 찬 뒤 답했다.

    [주인님이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쭉쭉빵빵 미녀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 유리아한테 미안하잖아요?]

    [던전에 단 둘밖에 없는 또래 친구인데 같이 커야죠.]

    루시아의 본체는 던전의 심장 방을 나가지 못했고, 유리아는 던전의 심장 방이 있는 심층까지는 혼자서 내려오지 못했다.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논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터였다. 탐욕의 미궁의 진정한 영혼이 된 루시아는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탐욕의 미궁 내라면 어디든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다.

    이제 겨우 함께 놀 수 있게 되었는데 루시아 혼자만 어른이 되어버리면 유리아가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루시아는 유리아의 친구이고 싶었지 언니이고 싶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루시아의 대답에 용호는 푸근한 얼굴이 되었다. 주변의 예속 사역마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아몬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쭉쭉빵빵이라.]

    [처음 듣는 말이지만 어쩐지 뜻을 알 것만 같군.]

    [주인의 번뇌력이-]

    아몬이 자리한 오른팔을 마구 흔들어 이야기를 도중에 끊어버린 용호는 숨을 크게 골랐다. 가만히 허공에 손가락을 놀려 탐욕의 미궁의 전체 지도를 인지하였다. 예상대로 이제 딱 한 곳만 남은 상태였다.

    용호가 아직 가보지 않은 장소. 진정한 던전의 주인이 된 지금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굳이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용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자리한 사역마들 모두가 그 장소를 알았다.

    용호는 옥좌에서 일어서기 전에 모두를 돌아보았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에게 나직이 물었다.

    “괜찮을까?”

    용호 자신이 그곳에 발을 들여도, 그곳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도.

    스카자하가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의 미궁의 진정한 주인은 이제 도련… 아니, 주인님이야. 괜찮고말고.”

    “보여선 안 될 거라도 나오면 미처 숨기지 못하고 죽은 마몬 나리 잘못이지.”

    구시온도 말을 보탰다. 유스티아와 유노는 저마다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지막으로 시트리가 용호에게 다가섰다. 용호의 오른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겹치며 말했다.

    “그 사람의 방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는 고객님의 방이죠. 그 사람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탐욕의 미궁 13층에 자리한 마몬의 방.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의 침소.

    용호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저만치서 카이완과 나란히 서 있던 카타리나가 귀를 움찔했다. 굳이 가주와 예속 사역마간의 교감을 이용할 것도 없었다. 카타리나의 속마음을 간파한 용호는 흔쾌히 명했다.

    “가자, 카타리나. 호위기사답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간식 먹어도 된다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마냥 카타리나의 꼬리가 격하게 파닥거렸다.

    카이완이 그런 카타리나의 팔을 슬쩍 끌어안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럼 난 용호 부인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마몬의 방이었다.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은 카이완도 마찬가지였다.

    오필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어 ‘저도요!’라는 말이 새어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고, 엘리고스는 이 모든 광경이 마냥 감격스럽다는 듯 연신 눈물만 닦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각각 자신의 양 옆에 따라붙자 용호는 옥좌 바로 뒤에 위치한 마몬의 방문 앞에 다가섰다. 마몬의 상징인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농구 코트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크기이니 작다 하기도 뭐했지만, 마계 사상 가장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왕의 방이라 하기에는 결코 크지 않았다. 더욱이 평범하기까지 했다.

    침대와 탁자, 몇 개인가 되는 서랍장 외에는 이렇다 할 가구조차 없었다. 침대 하나만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것이, 마치 용호 자신의 방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마몬의 방이기 때문인지 뭔가 특별하단 느낌이 들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박물관에 들어온 사람처럼 벽이나 천장 같은 세세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과한 기대였나.’

    용호는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마몬의 방에 뭔가 대단한 보물이 있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용호가 바란 것은 마몬과의 대화였다.

    엘룬과 유호유안, 마그나돈은 탐욕의 미궁 각 층에 각자의 분신을 남겨두었다. 덕분에 용호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마몬도 혹시 자신의 분신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몬에게 위기를 타파할 방법이라든가, 뭔가 획기적인 파워 업 수단 같은 것을 묻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감정이었다. 마몬이란 사내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하기야, 12 사역마들을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겠지.’

    물론 엘룬처럼 아예 싸움에 나서기 전에 분신을 남겨두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건 어쩐지 마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신왕의 심장은 대체 언제 만들어서 인계에 보낸 거지?’

    인계에서 마신왕의 심장을 얻었을 때 용호는 마몬이 남겨둔 ‘기억’을 보았다. 가만히 돌이켜 보니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마몬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마몬이 말한 선택은 무엇일까. 혹여나 천계를 막기 위해 다른 왕들과 동맹을 맺은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홀로 천계의 문을 막기 위해 나선 일이라든가.

    어느 쪽이든 아귀가 맞지 않았다. 전자는 아직 ‘배신’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굳이 후회 운운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후자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12 사역마들을 돌려보내는 것조차 완벽히 해내지 못할 정도로 급박한 와중이었다. 인계로의 문을 열어 마신왕의 심장을 보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일까. 마몬은 왜 마신왕의 심장을 인계에 남긴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자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까.

    용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구심들을 지워버렸다. 어쩌면 용호 자신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몬이 말한 후회가 꼭 천계의 문이나 다른 왕들의 배신과 연관되어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차분히 숨까지 고른 용호는 바로 다음 일에 착수했다. 탐욕을 발동시켜 마몬의 방 어딘가에 있을 비밀 방으로의 통로를 찾아냈다.

    방 자체가 탐욕에 반응했다. 카타리나가 들여다보고 있던 벽이 갈라지며 비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카타리나가 용호를 돌아보았고, 카이완은 얼른 비밀 문에 다가섰다. 드래곤의 머리가 양각된 강철 문은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용호는 품안에 손을 넣었다. 마몬의 투기장의 마지막 보상인 비밀 방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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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그릇에 담긴 새하얀 모래들이 높고 낮음으로 모양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약간의 색이 더해지니 금방 훌륭한 마계 전도가 완성되었다.

    입체화 된 마계 전도 위로 붉은 모래들이 움직였다. 크게 보아 네 개의 덩어리였는데, 모두가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붉은 모래에 맞서듯 푸른 모래 역시 마계 전도 위에서 움직였지만 그 숫자가 붉은 모래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붉은 모래에 금방이라도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너무 많아.”

    붉은 모래는 북부 군이었고, 푸른 모래는 남부 군이었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이를 악문 채 마계 전도를 노려보았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북부 군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오만, 질시, 색욕, 식탐 이렇게 네 국가의 군대였다. 오만과 질시가 저들끼리 싸우느라 소모한 군세가 있고, 식탐의 군세가 이런저런 일로 사실상 반파되었다고는 해도 자그마치 네 개 국가의 역량이 하나가 된 상황이었다.

    반면 남부 군은 격노와 폭력 두 국가뿐이었다. 남부 공백지가 있었지만, 오랜 세월 분열해 있던 그곳은 다른 국가들처럼 많은 숫자의 병력을 양산해내지 못했다.

    단순히 국가의 숫자만 놓고 비교해도 두 배 차이였다. 여기에 던전 상회의 군세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의 병력 차가 발생했다.

    “비록 숫자에서는 뒤지나 병력의 질에 있어서는 이쪽이 훨씬 우수합니다. 스켈레톤 솔져나 고블린들 따위로 이루어진 군대 따위, 설사 수십만이라 해도 우리 용 군단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격노의 왕의 곁에 앉아 있던 블루 드래곤 앙카블로사가 카랑카랑한 어조로 말했다. 하늘하늘 가냘픈 아프사라스로 폴리모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간직한 그녀였다.

    용 군단의 숫자는 기실 일 백을 겨우 헤아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의 군단으로서의 전투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계 최강이었다. 앙카블로사는 단순히 격노의 왕을 위로하고자 지금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북부 군의 총합은 분명 십만을 우습게 헤아렸다. 마계 역사상 이 정도의 대군이 하나의 무리로 집결한 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구성원 대부분이 스켈레톤 솔져나 오크 워리어, 고블린 라이더 같은 하급 병종들이었다. 이쪽에도 분명 승산이 있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탐욕의 군세 역시 있지 않습니까.”

    앙카블로사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날카롭게 놀리자 마계 전도 위로 새로운 녹색 모래가 추가되었다.

    숫자는 적었다. 정말로 한줌밖에 되지 않아 푸른 모래에 더해봐야 그리 큰 변화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질이 달랐다. 앙카블로사는 지난 며칠 동안 탐욕의 군세가 식탐의 군세를 어떻게 박살냈는지를 알았다.

    탐욕의 왕 휘하의 예속 사역마들은 비상식적으로 강했다. 예속 사역마가 열을 넘게 헤아리는데, 그들 모두가 뿔 여섯 개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찌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런데 실제로 그러했다. 죄악과 신기만 없을 뿐, 왕과 동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들까지도 예속 사역마에 속해 있었다.

    실로 전설에나 나올 법한 소수정예였다.

    앙카블로사가 탐욕의 군세 이야기를 하니 걱정만 한 가득이던 격노의 왕의 얼굴에 작게나마 미소가 번졌다.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은 화사함이었다.

    앙카블로사는 그런 격노의 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폭력의 왕은 격노의 왕의 저런 순수함과 솔직함을 좋아했었다.

    “앙카블로사 당신 말이 맞소. 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니라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할 때요.”

    기운을 차렸는지 격노의 왕이 씩씩하게 말했다. 그리고 딱 때를 맞추듯 가르디문디가 막사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났다.

    “후방에 있던 가릉빈가들이 탐욕의 왕의 지원군을 포착했습니다. 천리경을 통해 관측이 가능합니다.”

    격노의 왕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움찔움찔 거렸고, 앙카블로사는 그런 격노의 왕의 심경을 헤아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격노의 왕에게 감사하며 먼저 제의해 주었다.

    “바람도 쐴 겸 잠시 나가 탐욕의 군세가 오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흠흠, 그렇게 생각하오?”

    앙카블로사도 결국엔 쓴웃음 대신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격노의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맑게 웃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작해야 몇 분이 지난 시간.

    격노의 왕은 멍한 얼굴로 남쪽 하늘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천리경을 보았다. 키르티무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앙카블로사는 기쁨으로 채색된 당혹스러움을 토했다.

    탐욕의 왕과 그 군세는 이번에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앙카블로사는 자신들 측에도 던전 상회의 일부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적색거룡 티아메트를 필두로 한 대함대.

    수십 대의 비공정들과 수십 여 마리의 비행형 사역마들이 하나의 무리가 되어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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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가 탐욕의 왕을 격하게 환영하는 바이오.]

    < 제 74장 #2 (수정)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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