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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14화 (214/227)

< 제 74장 - 드리타라슈트라 >

제 74장 - 드리타라슈트라

사자좌의 리처드는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과묵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과묵함은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마몬의 12 사역마들이 한 자리에 모인 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하여간 저놈 입 무거운 거 하고는.”

입으로는 툴툴 거리는 구시온이었지만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스카자하가 구시온의 팔을 끌어안은 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리처드를 푸근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탐욕의 미궁 제 11층에 자리한 대연회장.

사자좌의 리처드는 용호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췄다. 워낙에 덩치가 큰 그였기에 그렇게 자세를 낮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용호와 눈높이가 맞았다.

용호도 구태여 말을 늘이지 않았다. 사자좌의 리처드를 용호 자신의 열한 번째 예속 사역마로 받아들였다.

마몬의 신기에 파란 빛이 더해졌다. 리처드의 힘인 ‘신뢰’를 상징하는 파란 빛이었다.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의 생명.

학살의 악마 바포메트의 죽음.

달을 베는 엘룬의 정의.

여덟 손의 바루나의 창조.

태양의 기사 아스클레피오스의 명예.

음양의 유호유안의 조화.

괴력의 구시온의 용기.

침묵의 전사 리처드의 신뢰.

대지를 질타하는 마그나돈의 열정.

길을 인도하는 유스티아의 인내.

별을 헤아리는 유노의 사랑.

마몬의 신기 표면에 부착된 원형 판에서부터 열한 개의 은은한 빛이 일었다. 아몬이 홍련의 불길로 속삭였다.

[나 또한 그대를 인정한다, 나의 주인이여.]

[새로운 탐욕의 왕이여.]

마침내 열두 번째 빛이 더해졌다. 홍련의 마창 아몬을 상징하는 붉고 밝은 선홍색이었다.

용호와 연결된 예속 사역마들은 느낄 수 있었다. 예속 사역마가 아닌 일반 사역마 계약을 맺은 유노와 유스티아 역시도 열두 개의 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마몬의 신기가 완성되었다.

엘리고스가 유스티아의 인내를 이어받았으니, 이제 유노의 사랑을 이어받을 열두 번째 예속 사역마만 있으면 되었다.

용호는 마몬의 신기로부터 힘을 거두었다.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것으로 리처드를 일으켜 세운 뒤 1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탐욕의 미궁 12층을 개방합니다.]

루시아가 말했고, 용호가 앞장섰다. 마몬의 12 사역마들과 용호의 새로운 12 사역마들이 그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의 층들과 달리 탐욕의 미궁 12층은 오직 마몬의 12 사역마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한발 한발 나아갈 때마다 어둠이 절로 물러났다. 마몬과 12 사역마의 힘이 충만한 12층에는 단 한 마리의 던전 몬스터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컬의 뒤를 따라온 부케팔로스를 또 다시 어영부영 쫓아온 살라미는 연신 눈을 껌벅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이어 엘리멘탈 드래곤’을 넘어 ‘그레이트 파이어 엘리멘탈 드래곤 엠퍼러’라는 휘황찬란하다 못해 용호의 취향을 의심케 하는 이름을 가진 존재로 진화한 살라미였지만 그래도 살라미는 살라미였다. 주변에 충만한 마력이 살라미를 흥분케 했다.

12층의 구조는 단순했다. 한 가운데 커다란 원형 홀이 있었고, 열두 개의 방이 그런 홀을 빙 둘러 자리했다.

카이완이 옆에 선 카타리나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물었다.

“뭐 좀 기억나는 거 없어? 전생의 기억이라든지.”

탐욕의 미궁 각 층이 12 사역마들의 수호지였다면 12 층은 개인공간이었다. 자연 일상적인 추억이라면 이쪽에 더 많이 어려 있을 터였다.

유노에게서 엘룬의 환생임을 인정받은 카타리나는 뭐라도 기억해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엔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릴 따름이었다.

“으으… 없어요. 하나도 생각 안 나요.”

정말로 엘룬의 환생이 맞기는 한 걸까.

카타리나가 홀로 침울해하는 가운데, 카타리나의 축 처진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호구기사 엘룬의 환생다운 모습이었다.

루시아가 12층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새로운 12 사역마에 속하는 용호의 예속 사역마들 역시 가만히 홀에만 머물지 않았다. 물려받은 힘에 이끌린 것처럼 12 사역마들의 방으로 향했다.

카이완이 카타리나의 팔을 끌어안은 채 엘룬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쳐다보던 용호는 피식 웃으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새삼 아몬을 거머쥔 채 정면에 위치한 아몬의 방안에 들어섰다.

넓지만 황량한 공간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벽과 바닥, 천장 사이에는 이렇다 할 장식조차 없었다. 방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가장 안쪽에 홀로 자리한 낮은 크기의 제단이 다였다.

그런데 어째 눈을 뗄 수 없었다. 홀린 듯 제단에 다가선 용호는 창을 꽂아둘 수 있는 구멍과 그 주변의 장식들을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설마.”

[그렇다, 나의 주인이여.]

[이곳은 나와 주인이 처음 만난 장소이다.]

[아마도 투기장과 같이 특별한 이어짐이 있었기에 주인은 이곳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몬이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적잖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마몬 가의 가주 자리에 오른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오래된 옛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참으로 아련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가주님이랑 처음 포옹했어요.”

어느새 나타난 카타리나가 약간은 뻐기듯이 카이완에게 속삭였다. 카이완은 인상을 구겼고, 용호는 키득 웃었다.

아마 위에서 추락한 다음에 같이 바닥을 뒹굴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 때가 처음이기는 했지.’

용호 자신이 여자와 끌어안고 바닥을 뒹군-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카타리나가 처음 진화를 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아몬의 방과 어딘지 모를 공간을 연결한 곳이 진화 장소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따질 필요까지는 없었다.

민첩성 강화라며 굳이 카타리나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던 자신을 떠올린 용호는 그간 잊고 있었던 자신의 특성을 담담이 인정했다. 엉큼한 거 맞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번뇌력이 상승하고 있다.]

아몬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용호는 카타리나와 카이완과 더불어 아몬의 방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스컬이 용호에게 다가섰다.

“스컬스컬.”

스컬의 양 손에는 무척이나 커다란 낫이 들려 있었다. 길고 날카로운 칼날과 새카만 낫대가 일체형인 물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몬의 신기로부터 죽음을 상징하는 보랏빛이 은은하게 일었다.

“바포메트의 낫인가.”

스컬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의 낫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바포메트의 분신 격인 존재였다.

바포메트가 온전한 죽음의 화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저 낫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포메트의 위험성을 경계한 마그나돈은 바포메트와 낫을 각기 따로 유폐해 그 힘을 약화시켰다.

“스컬스컬.”

스컬의 요구는 단순했다. 그는 바포메트의 낫과의 합체 강화를 원했다.

사역마와 아티펙트를 결합시키는 합체 강화는 여느 진화와 달리 오직 한 번만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가능한 뛰어난 성능을 가진 아티펙트와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좀 더 뛰어난 아티펙트만을 찾다가는 정작 때를 놓칠 수 있었다. 오만의 왕과의 결전이 다가온 지금 더 좋은 아티펙트를 기다린다며 합체 강화를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요 며칠 동안 마몬 가는 식탐의 영토를 기습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12 사역마들의 합체 강화를 위한 아티펙트 선정도 있었다.

탐욕의 미궁 보물고와 무기고, 시트리가 가진 던전 상회의 특급 마법기만을 모아둔 창고, 사마엘이 보유한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의 전설이라 해도 좋을 경매품들.

카이완은 늘상 노래하던 대로 드래곤하트를 골랐다. 용호가 애용하는 실버 드래곤 아머의 재료가 된 실버 드래곤 로드 에르나사가의 드래곤하트였다. - 용호는 아낌없이 주고 떠난 에르나사가를 위해 묵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각각 사마엘의 특별 경매품목에서 ‘녹색 신의 격노’와 ‘녹색 신의 분노’를 골랐다. 각각 팔과 다리에 장착하는 투갑이었다. 둘 모두 ‘녹색 신’이라는 이계의 강력한 무신의 힘이 실린 물건이었다.

티그리우스는 마그나돈이 생전에 사용하던 마법 지팡이를 골랐고, 카타리나는 고민 끝에 엘룬의 애검인 월광검을 선택했다. 사마엘이 고른 것은 시트리의 창고 안에 고이 보관되고 있던 고대왕의 심장이었다. 브리가다로 만들어진 마법기였는데, 아무래도 용호에게서 받는 마력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선택 같았다.

구시온과 리처드를 비롯한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이미 합체 강화를 했거나 합체 강화를 원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무장을 갖추는 선에서 만족하였다.

[주인님, 12층의 장악이 끝났습니다.]

[탐욕의 미궁의 마지막 층인 13층을 개방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의 방을 살피던 모두가 다시 홀에 모였다. 1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13층에 자리한 것은 마몬의 방과 탐욕의 미궁의 진정한 심장 방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한 발걸음만을 옮기던 시트리조차도 약간이나마 눈시울을 붉혔다.

계단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13층에 도착하자 마몬을 상징하는 거대한 드래곤의 문장이 양각된 강철 문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용호는 다시 문을 열었다. 탐욕의 미궁의 심장 방은 탐욕의 왕을 감지했고, 순응으로 왕을 환대하였다.

심장 방은 단조로웠다. 마몬의 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와 돌로 만든 낡고 오래된 옥좌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옥좌가 아니었다.

스카자하는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고, 구시온 역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유노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스티아는 눈물보다 더한 감정을 실은 미소를 머금었다.

용호가 천천히 옥좌에 다가섰다. 아무 것도 없는 옥좌였지만 용호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아몬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는 주인을 위한 자리이다.]

[그분 또한 흡족해하실 것이 분명하다.]

용호는 마몬의 옥좌를 어루만졌다. 과거와 현재의 12 사역마들의 시선을 받으며 옥좌에 자리했다.

이번에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감정을 터트렸다. 용호 역시 그들의 감정을 공유했다. 옥좌에 앉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탐욕의 미궁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호가 처음 가주 자리에 올랐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탐욕의 미궁과 표면의 마몬 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했다.

사역마라고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밖에 없던 시절. 마왕의 방에 깔려 있는 붉은 양탄자 위에 거적을 깔고 침식을 했던 그 때.

고블린 존과 론을 시작으로 새로운 사역마들이 마몬 가에 추가되었다. 작게 만든 간이 함정과 고문실을 보며 엘리고스가 활짝 웃었고, 감옥 창살 너머로 유리아와 바둑이가 첫 만남을 가졌다. 스컬이 바닥을 돌맹이마냥 뒹굴거렸다. 리쿰과 버그림이 여러 사역마들과 힘을 모아 던전을 조금씩 개량해 나갔다.

그 이후에 펼쳐진 모든 일들.

용호만이 아니었다. 심장 방 안에 있던 모두가 기억을 볼 수 있었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가 위대한 탐욕의 왕을 뵙습니다.”

오필리아가 용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얼굴 가득 눈물을 쏟아내던 엘리고스가 오필리아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목이 매여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행동만으로도 충분했다. 스컬 역시 껄껄껄 웃는 대신 절도 있게 예를 표했다.

새로운 12 사역마만이 아니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 역시 똑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용호에게 다가섰다.

“사랑하는 고객님, 나태의 왕 시트리가 경애하는 탐욕의 왕을 뵙나이다.”

그 순간 탐욕의 미궁에 자리한 모두는 알 수 있었다. 표면의 마몬 가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리쿰과 버그림도 느꼈고, 바둑이와 낑낑이와 함께 감자를 캐던 유리아 역시 깨달았다.

[탐욕의 미궁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사랑하는 주인님, 탐욕의 미궁은 이제 온전히 주인님의 것입니다.]

루시아가 말했고, 심장의 방뿐만 아니라 탐욕의 미궁 전체에 새로운 마력이 주입되었다.

탐욕의 왕 마몬으로부터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탐욕의 미궁이 마몬 가의 품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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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4장 - 드리타라슈트라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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