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13화 (213/227)

< 제 73장 #2 >

그분이 누구인지는 되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접시 물에 코를 박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카타리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이완의 얼굴에 새로운 기대가 떠올랐다.

‘설마? 진짜로?’

용호가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의 환생인 것은 아닐까?

용호는 마몬 이래 최초로 탐욕의 죄악을 가지고 태어났다. 더욱이 마몬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마몬의 단짝이라 해도 좋을 아몬까지 부리지 않던가.

더욱이 용호가 이뤄낸 모든 것들이 있었다.

용호의 행보는 하나하나가 기적이라 해도 좋았다. 용호는 누가 뭐라 해도 특별한 존재였다.

카이완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연신 침을 삼켰다. 그러다 돌연 도리질을 했다.

‘아, 안 돼.’

생각해보니 시트리가 있었다. 용호가 만약 마몬의 환생이라면 시트리와의 관계는 어찌된단 말인가. 유노는 자신이 말하는 환생이 카이완이나 카타리나가 생각하는 환생과 다르다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더욱이 시트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가 문제였다.

카이완은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유노를 보았다.

유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당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던 유노의 목소리였다.

“많이 닮으셨지만 아니에요.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은 온전히 새로운 탐욕의 왕이십니다.”

유노는 말을 마치며 카이완 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이야기 역시도 용호보다는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위한 것 같았다.

카타리나는 눈을 깜박이며 귀를 천천히 파닥거렸고, 카이완은 어쩐지 모를 안도의 숨을 토했다.

묘한 기분이 든 것은 용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마몬의 환생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저도 모르게 특별한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유노가 다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참 신기하네요. 마치 마몬 전하께서 새로운 탐욕의 왕 전하와 함께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용호도 납득이 되었다. 지금 용호 자신은 참으로 많은 마몬의 유산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마몬과 함께한다 해도 좋았다.

작은 해프닝이 마무리 되자 용호의 바로 옆 허공에 홍련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지금껏 조곤조곤 말을 잇던 유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몬!”

[오랜만이다, 유노.]

[반가움을 천천히 나누고 싶지만 때가 좋지 못하다.]

[현재 마몬 가는 무척이나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

아몬은 작금의 상황을 짧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유노는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마몬 가에 닥친 위기도 위기였지만, 몇 가지 요소들이 그녀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질시의 죄를 손에 넣은 오만의 왕. 그런 오만의 왕을 돕고 있는 색욕의 왕.

천 년 전과 엇비슷한 구도였다. 칠대죄악 가운데 탐욕과 격노와 식탐이 마몬 가와 함께 했고, 오만과 질시와 색욕이 마몬 가를 적대했다.

“시트리는? 그녀도 아직 살아 있지?”

[살아 있다. 현재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천계의 독에 중독된 상태다.]

천계의 독이란 말에 유노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변했다. 그녀는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용호에게 바로 말했다.

“새로운 탐욕의 왕이시여,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 전하를 시험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겠지요. 전하를 인정합니다. 위대한 마몬께서 정립해 주신 저의 힘을 전하께 보태겠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었기에 용호는 바로 왼손에 장착한 마장을 들어올렸다. 유노가 가볍게 마장을 어루만지자 연한 분홍빛이 몇 개 안 남은 마장의 구멍을 채웠다.

처녀좌, 별을 헤아리는 유노의 힘은 사랑.

모든 감정의 집합체라 해도 좋을 그것.

아몬은 이미 용호의 것이었으니 이제 사자좌의 리처드 하나만 남았다. 그의 인정만 받으면 12 사역마의 힘이 모두 모이는 셈이었다.

하나 남은 구멍을 바라보던 유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용호를 보았다.

“하지만 전하, 전 전하의 예속 사역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제 영혼 역시 시트리와 마찬가지로 천계의 힘에 오염된 상태입니다.”

시트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표정이 굳은 이유였다. 유노는 천계의 힘에 영혼이 오염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탐욕의 미궁과 마몬의 신기는 12 사역마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둘의 힘을 모두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온전한 12 사역마를 갖추셔야 합니다.”

용호에게는 현재 열 명의 예속 사역마가 있었다.

시작을 함께 한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용호가 최초로 예속 사역마로 삼은 스컬.

남부 공백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용호에게 투신한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

용호의 반려이자, 마몬 가가 일어설 기반을 마련해준 카이완.

마몬에 이어 용호를 모시기로 맹세한 구시온과 스카자하.

복수를 위해 용호에게 영육을 바친 사마엘.

언제 어디서나 함께해준 홍련의 마창 아몬.

구시온과 필적하는 전투력의 소유자인 사자좌의 리처드를 거두어야 했으니 용호의 12 사역마에는 이제 오직 한 자리만이 남은 셈이었다.

“전 별을 헤아리고 인연을 살핍니다. 사랑의 힘을 이어받기 알맞은 자가 이미 탐욕의 왕 전하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군요. 인연의 끈이 느껴져요.”

카타리나가 얼른 카이완을 돌아보았고, 카이완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노가 누굴 말하는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예속 사역마로 삼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지만.’

엘룬의 환생체인 카타리나는 엘룬의 힘인 ‘정의’를 계승했다.

카이완 자신은 마그나돈의 ‘열정’을 이어받았고, 오필리아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명예’를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스컬과 티그리우스는 각각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과 ‘조화’를 선택했다.

스카자하와 구시온은 ‘생명’과 ‘용기’였고, 리처드의 힘은 ‘신뢰’였다.

사마엘이 바루나의 ‘창조’를 이어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유스티아의 ‘인내’와 유노의 ‘사랑’이었다.

엘리고스가 인내와 사랑 둘 중 어떤 것을 계승할 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아니었다.

카이완은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와 사랑을 연결시켜보았다. 다소 분한 이야기였지만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완 자신의 개인감정을 제쳐두고 생각한다면 격노의 왕의 예속 사역마 화는 그야말로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용호에게 격노의 죄뿐만 아니라 자그마치 왕의 힘이 더해질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가능할까?’

격노의 왕은 팔부중의 왕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녀 하나만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이 존재했다.

예속 사역마는 이름 그대로 예속된 존재였다. 자신의 주인에게 영육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생사여탈권까지 바친 존재였다. 카이완 자신도 상대가 용호였기에 수락한 것이었지, 다른 이였다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예속 사역마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격노의 왕이 용호의 예속 사역마가 된다는 것은 곧 팔부중 전체가 용호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연 격노의 왕이, 팔부중의 수장인 그녀가 그런 결정을 내릴까? 아무리 그녀가 용호를 좋아한다 해도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물론 한 가지 변수는 있었다.

바로 오만의 왕이었다. 폭력의 왕이 마신이라고까지 표한 그의 손에 팔부중은 물론이고 남부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격노의 왕도 생각을 바꿀지 몰랐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노의 왕이 용호의 예속 사역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머릿속이 복잡함 그 자체가 된 카이완이 인상을 찡그렸다. 용호가 그런 카이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용호야?”

용호는 대답하는 대신 약간 높은 허공을 응시하며 명령했다.

“루시아, 유노를 일반 사역마로 등록시켜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루시아가 즉각 사역마 등록을 개시했다. 일반 사역마 등록은 예속 사역마 등록과 달리 영혼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유노도 거부하지 않았다. 더욱이 유노가 지금 머물고 있는 저택을 나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반 사역마 등록이라도 해야만 했다. 유스티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용호는 천장과 바닥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위에는 마지막 12 사역마인 사자좌의 리처드가 있었고, 아래에는 탐욕의 미궁 12층과 마지막 층인 13층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호구리나, 네가 골라봐.”

카이완이 일부러 장난치듯 말했고, 카타리나는 입술을 삐쭉 내민 채 꼬리를 빳빳이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

폭력의 왕의 죽음을 전후로 하여 많은 것들이 변하였다.

오만의 군세는 더 이상 질시의 군세와 거짓 전쟁을 하지 않았다.

마계의 국가들은 모두 ‘왕’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기에 존속될 수 있었다. 질시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 가주들은 더 이상의 저항을 생각하지 않았다. 식탐의 왕 휘하의 가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깃발을 바꿔 들고 오만의 군세에 합류했다.

오랜 세월 침묵으로 일관하던 색욕의 군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큐버스와 인큐버스 같은 몽마들뿐만 아니라 사바트의 주최자이자 참가자인 여러 마녀와 음마들이 군단의 주축을 이뤘다. 색욕의 군세에 유혹당한 여러 던전 몬스터들과 마수들이 군단의 전위를 맡았다.

마몬 가의 기습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식탐의 군세였지만 여전히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만의 왕에게 항복한 세 가주 가운데 살아남은 두 가주는 - 다른 한 가주는 사마엘에게 목숨을 잃었다. - 마몬 가의 기습으로 파괴된 던전들뿐만 아니라 공백지와 인접한 남부 일대를 과감히 포기했다. 전 병력을 북부로 모아 색욕의 군세와 단단한 연계를 이루었다.

오만의 왕이나 색욕의 왕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단의 움직임이 그들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이제는 대놓고 오만의 군세를 보조하는 던전 상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북부가 움직이니 남부 역시 움직였다. 마치 서로 이가 맞물린 톱니바퀴를 보는 것 같았다.

영토 내에 존재하는 던전 상회의 모든 유통로를 파괴한 격노의 군세는 색욕과 식탐의 군세에 맞서기 위해 국경 지대에 집결하였다. 서부에서 날아온 용 군단이 그런 격노의 군세와 함께 했다.

금방이라도 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았다. 격노, 식탐, 색욕, 질시 네 개의 영토가 맞물리는 국경지대를 지배하는 것은 끔찍한 긴장과 고요였다.

폭력의 왕의 죽음으로부터 나흘째가 되는 날 가릉빈가들로 구성된 팔부중의 정찰 부대 하나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오만의 영토에서 활동하던 정찰부대였던 터라 언제 연락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그들이었다. 때문에 팔부중들은 정찰 부대의 죽음을 애도할지언정 그들의 죽음에 이상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식탐의 영토 변방에 있던 작은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국경 지대에 집중된 상황이었기에 마을이 소멸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자들은 무척이나 적었다. 그나마 눈치 챈 자들도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마몬 가의 공습이 만들어낸 여러 피해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엠브리오에 의해 파괴된 공백지 서부에서 떠돌이 몇이 사라졌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자들이었기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애당초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린 드래곤 카이델리온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 밖으로 새어나온 것은 간신히 쥐어짜낸 것 같은 중얼거림에 불과했다.

그는 아직 젊다 못해 어렸지만 그렇다 해도 드래곤이었다. 본신으로 화해 있었기에 그 몸길이가 십여 미터에 달했다.

하지만 카이델리온은 날아오르지도, 땅을 박차지도 못했다. 새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손이 카이델리온의 목을 거칠게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허공에 난 뒤틀림을 커다란 팔 하나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틀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뒤틀림 너머의 존재가 이쪽으로 넘어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이델리온은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 단순한 물리력이 아님을 직감했다. 목을 조르는 손에서부터 발생한 힘이 영육 모두를 파괴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몸부림치던 카이델리온이 결국엔 눈을 감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에 균열을 만들며 회전하던 뒤틀림이 작아졌다. 조금이라도 뒤틀림을 키우기 위해 몸부림치던 뒤틀림 너머의 빛나는 존재는 이내 포기한 듯 거대한 팔을 회수하였다.

거대한 팔과 함께 그린 드래곤 카이델리온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소멸은 마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다른 소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뒤틀림이 소멸했다. 잠시 열렸던 세상간의 통로가 닫혔고, 먼 곳에서 또 다른 통로가 열렸다.

아직 그 숫자가 적었다.

하지만 통로가 열리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점점 더 커다란 뒤틀림이 발생했다.

삭풍이 휘몰아쳤다. 남과 북이 서로를 노려보며 전쟁을 개시한 그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침식은 시작되었다.

제 73장 - 대공습 끝, 제 74장 - 드리타라슈트라로 이어집니다.

< 제 73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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