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11화 (211/227)
  • < 제 72장 #3 >

    “오만의 왕은 말 그대로 숨 가쁜 기습을 통해, 소위 전격전이라 해도 좋을 방식을 통해 현존하는 왕들을 일망타진하고 단숨에 마계를 제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죠.”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는 시트리가 말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 알았다.

    오만의 왕은 탐욕의 왕의- 용호의 존재를 몰랐다. 아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던전 상회의 이사 가운데 하나인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를 잃었고, 식탐의 군세와 색욕의 왕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격노의 왕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폭력의 왕의 것이 되었거나 아니면 소실되었을 거라 생각한 식탐의 죄는 시작부터 그의 적에게 돌아가 있었다.

    “폭력의 왕은 오만의 왕에게 정수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폭력의 왕을 쓰러트린다는 오만의 왕의 계획은 성공했을지언정, 폭력의 왕을 통해 한층 더 높은 단계에 오르려 했던 그의 계획은 실패했죠. 더욱이 그는 분명 큰 타격을 입었을 터입니다.”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폭력의 왕의 자폭에도 불구하고 오만의 왕이 죽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오만의 왕이 보인 힘이 너무나 강대하였다.

    빛으로 된 여덟 개의 뿔과 여섯 장의 광익, 머리 위에 떠오른 거대한 광륜. 실로 신과 같은 힘과 위용이었다.

    시트리와 폭력의 왕의 관계는 본래 그리 깊지 않았다. 마계라는 공간에서 공존한 시간만을 논한다면 천 년을 헤아릴 수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일은 손에 겨우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던전 상회 이사와 왕 사이의 표면적인 대화를 짧게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관계가 바뀐 것은 겨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탐욕의 신기를 통해 과거 마몬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폭력의 왕은 시트리의 진짜 정체 또한 간파해냈다.

    폭력의 왕에게 마계를 지배한다는 야욕은 없었다. 그는 세계의 관찰자로서 지식을 추구할 따름이었다.

    폭력의 왕이 먼저 시트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나태의 죄악이나 신기를 탐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보다 소상한 그날의 이야기와 마지막 싸움이 펼쳐진 장소의 위치 정도였다.

    폭력의 왕을 직접 마주한 시트리는 마몬에 대한 그의 순수한 경의가 진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시트리는 폭력의 왕과 계약을 맺었다. 특별한 마법적 계약을 통해 그날의 일을 보다 생생하게 폭력의 왕에게 전달하였고, 그 대가로 폭력의 왕은 시트리의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었다.

    용 군단이 돌연 동부 국경 지대로 움직여 식탐의 왕을 안절부절 못하게 한 것은 시트리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폭력의 왕이 격노의 왕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용하라 말했던 것이 시트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녀의 의지가 개입된 결과였다.

    폭력의 왕과의 대화는 시트리에게도 의외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마몬의 최후가 얽힌 그 날의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생각처럼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시트리는 폭력의 왕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아직도 남은 오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유지했던 계약 관계였다.

    그리고 그 계약 관계는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효용을 발휘하였다. 폭력의 왕이 죽음을 각오하고, 아브라삭스가 지레 겁을 먹어 대기 중에 퍼트려 놓았던 방해 마법을 해제한 그 짧은 순간 시트리는 계약을 통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시트리는 폭력의 왕을 생각했다. 폭력이라는 이명과 달리 지혜롭고 현명했던 왕을 추억하며 말을 이었다.

    “폭력의 왕의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가 남긴 용 군단과 그가 만들어준 시간을 이용해야만 해요.”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이야기를 길게 이었기 때문인지 시트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사마엘이 그런 시트리를 대신해 이야기를 이었다.

    “최상의 경우는 오만의 왕이 극심한 부상을 입고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가 죽었을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낙관론이겠죠. 때문에 오만의 왕이 큰 부상을 입어 시간이 만들어졌다는 가정 하에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빛으로 된 마계 전도 가운데서 식탐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사마엘은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식탐의 영토를 가리켰다.

    “던전 상회를 이용한 기습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과 북의 전면전 양상이 펼쳐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공략해야 할 것은 역시나 식탐의 영토입니다. 식탐의 영토에는 현재 왕이 없고, 갑작스런 이변으로 인해 내부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더욱이 아직 제 손안에 있는 유통로를 통해 기습 역시 가능하죠. 이번에는 우리가 오만의 왕의 뒤통수를 때릴 차례입니다.”

    하루아침에 주인이 식탐의 왕에서 오만의 왕으로 바뀌었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병력을 투입해 격노의 군세를 공격했음에도 얻은 것이 없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지시사항을 내릴 오만의 왕이 격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작금 식탐의 영토는 혼란의 도가니라 해도 좋을 터였다.

    숨을 가다듬은 시트리가 다시 말을 받았다.

    “굳이 점령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고객님이 하셨던 치고 빠지기식 던전 공략을 보다 큰 규모로 하기만 해도 된답니다. 중요한 것은 던전의 정수를 모아 사랑하는 고객님의 던전의 영혼- 루시아를 성장시켜 탐욕의 미궁을 완전 장악하는 겁니다.”

    [에?]

    갑작스런 호명에 놀랐는지 루시아가 멍한 목소리를 토했다. 시트리는 잠깐이나마 엷은 미소를 머금은 뒤 용호를 보았다.

    “마몬의 신기를 완성하세요. 탐욕의 미궁을 완벽히 점령해 진정한 던전의 주인이 되어 던전의 힘을 모두 이끌어내세요. 신과 같은 힘을 자랑하는 오만의 왕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고객님이 과거의 마몬과, 그 사람과 동등한 조건에 서야만 해요.”

    던전의 힘은 곧 가주의 힘이었다.

    던전의 성장은 곧 가주의 성장을 야기했다.

    탐욕의 미궁은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 해도 좋을 마몬의 던전이었다. 그렇기에 최강의 던전이었다.

    탐욕의 미궁을 완전 정복하라는 말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마몬의 신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트리의 마지막 말이 용호를 자극했다.

    “잠깐, 잠깐만요 시트리.”

    마몬과 동등한 조건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용호는 그 말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용호만이 아니었다.

    “시트리.”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구시온이었다. 그는 성난 눈으로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일으킨 기세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스카자하의 저택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구시온에게 향할 지경이었다.

    “구시온.”

    시트리는 차분히 그를 불렀다. 그 차분함이 구시온을 더욱 성나게 했다.

    “마몬 나리께서는 세 개의 죄악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 용호 나리는 탐욕과 식탐의 죄악 두 가지를 가지고 계시지.”

    용호가 마몬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세 번째 죄악과 신기가 필요했다.

    다소 괴상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신기의 경우는 쉬웠다. 결국엔 도구였기에 손에 넣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죄악은 아니었다. 죄악을 얻기 위해서는 죄악의 소유자를 죽여만 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죽여 죄악을 손에 넣는단 말인가. 색욕의 왕을? 최대의 적인 오만의 왕을?

    뒤늦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은 카타리나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카이완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시트리를 보았다.

    구시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의 으르렁거림이나 다름없이 말했다.

    “네 목숨을 나리께 바치겠다는 이야기를 지껄일 셈이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시트리의 영혼은 망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이 죄악을 가진 왕이었고, 무려 일곱 개나 되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죽여 정수를 취한다면 용호는 세 번째 죄악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을 터였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시트리는 구시온을 마주했다. 성난 황소 같은 그를 마주했음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구시온, 당신은 절 싫어하지 않았나요?”

    “시트리!”

    노호성이 스카자하의 저택을 뒤흔들었다. 아니, 생명의 정원 전체를 요동케 했다.

    격한 반응은 구시온만의 것이 아니었다. 용호는 구시온과 반대로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시트리를 죽여 그 힘을 취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시트리가 그런 용호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스카자하를 마주하였고, 어느새 홍련의 불길로 피어오른 아몬의 속삭임을 들었다.

    시트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호의 손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이런 식의 신파극을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감동하고 말았다. 약간은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걱정하지 마세요. 고객님에게 뒷일을 맡기고 마음 편히 혼자서만 도망치듯 죽을 생각은 없어요. 전 마몬의 연인이었던 사람. 그를 닮아 어마어마한 욕심쟁이인걸요?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지시는 것도, 자식을 주렁주렁 낳으시는 것도 보고 싶어요.”

    시트리의 시선이 카타리나와 카이완에게 향했고, 카타리나는 움찔했다. 카이완조차도 갑작스런 이야기에 민망해졌는지 귓불을 붉혔다.

    시트리의 얼굴에 절로 푸근한 미소가 어렸다.

    “탐욕의 힘은 소유. 그렇기에 오직 탐욕의 왕만이 할 수 있는 일.”

    더욱이 이제는 탐욕의 신기도 있었다. 신기의 기본적인 기능은 죄악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고객님은 카이완이 가진 왜곡의 권능도, 티그리우스가 가진 합체의 권능도 사용하실 수 있어요. 오랜 세월 권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을 예속 사역마로 삼으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가주들이 사랑하는 고객님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설사 같은 방식으로 권능을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권능을 발휘할 수 없죠. 가주가 다른 가주의 예속 사역마가 되는 순간 권능이 무척이나 약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나마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아예 사라질 수도 있고요.”

    용호는 달랐다. 카이완과 티그리우스는 가주이던 시절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고, 용호 역시 그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용호에게 부족한 것은 그저 숙련도뿐이었다.

    탐욕의 죄 덕분이었다. 탐욕은 자신의 품에 들어온 힘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권능은 가주가 가진 영혼의 힘. 죄악 또한 같아요. 권능이 가주의 힘이라면 죄악은 왕의 힘이죠.”

    이제는 시트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제 영혼은 지금도 천계의 힘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있어요. 때문에 제 영혼과 이어지는 것은 사랑하는 고객님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왕이 하나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의 얼굴에 당혹과 놀라움이 번진 것이었다.

    시트리는 용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용호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격노의 왕을 예속 사역마로 삼으세요. 그녀의 육신과 영혼뿐만 아니라 죄악까지, 모든 것을 손에 넣으세요.”

    당치않은 말이었다. 격노의 왕은 팔부중의 왕이었다. 그녀가 용호의 동맹이고, 용호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것과 격노의 왕이 용호의 예속 사역마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트리는 뜻을 꺾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을 표하려는 용호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좋아요.”

    아직 시간이 있었다. 격노의 왕을 취하는 것은 오만의 왕과의 결전 직전이어도 좋았다.

    “당신은 탐욕의 왕. 마계 제일의 욕심쟁이죠. 그러니 해내실 거라 믿어요. 해내실 수 있죠?”

    용호의 손을 놓은 시트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윙크까지 해보였다. 시트리 때문에 잔뜩 열을 냈던 구시온은 멍청한 얼굴이 되었고, 스카자하는 눈을 껌벅였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어쩐지 모를 한숨을 동시에 토했다. 유스티아는 새삼 자신의 카드패를 뒤적거렸다. 스컬이 오랜만에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사람. 모두가 혼란스런 가운데 아몬이 홀로 불길로 속삭였다.

    [결국엔 번뇌력인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탐욕의 죄와 신기만이 은근한 힘을 발하였다.

    제 72장 - 탐욕의 왕 끝, 제 73장 - 대공습으로 이어집니다.

    < 제 72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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