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07화 (207/227)
  • < 제 71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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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대죄악을 처음으로 소유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신왕의 영혼이 분열된 것이 언제인지, 그 분열된 영혼이 칠대죄악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이 언제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어쩌면 칠대죄악을 최초로 소유했던 자는 자신이 칠대죄악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최초로 오만의 죄를 소유한 자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뭇사람들에게 ‘오만의 왕’이라 불린 최초의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초대 오만의 왕.

    지배의 마왕 벨리알.

    ‘오만의 왕가’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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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왕이 솟구쳐 올랐다. 비프론즈의 여덟 눈동자 가운데 넷이 하늘로 향했다. 손가락을 급히 놀려 언데드 드래곤들을 조종했다.

    하나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여섯이나 되었다. 몸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언데드 드래곤 여섯이 동시에 날아오르는 모습은 지상의 공포를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비프론즈는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지상에서 하늘을 올려다 본 이들도 여섯 드래곤의 웅장함보다는 하늘을 뒤덮은, 그런 여섯 드래곤을 존재함 그 자체만으로 찍어 누르는 것 같은 폭력의 왕의 위용에 몸서리쳤다.

    폭력의 왕의 거체는 이백여 미터에 달했다. 활짝 핀 날개의 양끝 사이 거리는 전신의 길이보다도 더욱 길었으니, 하늘을 향해 치솟는 여섯 언데드 드래곤들을 모두 그 안에 품고도 남았다.

    좀비 드래곤들이 폭력의 왕을 향해 저마다의 브레스를 내뿜었다. 본 드래곤들은 육탄공격을 가하려는 듯 보다 높이 날아올랐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는 브레스는 색색이었다. 폭력의 왕은 그것들을 노려보며 마력을 발산하였고, 그것만으로도 이변이 일어났다. 폭력의 왕을 향하던 브레스들이 뒤틀려 와해되거나 처음 뜻한 곳과는 다른 엉뚱한 곳으로 퍼져나갔다.

    오직 드래곤들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온다는 용언 마법의 힘이었다.

    빛과 불꽃과 번개를 머금은 세 종류의 브레스가 비산하며 눈을 현란케 했다. 그 잔흔을 마치 투창처럼 꿰뚫은 본 드래곤 세 마리가 동시에 폭력의 왕을 덮쳤다.

    하나하나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체였다. 하지만 폭력의 왕은 그런 본 드래곤들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존재였다. 어른에게 달려드는 아이보다도 못한 광경이었다.

    폭력의 왕이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몸길이의 삼분의 일에 해당할 거대하고 긴 꼬리가 무시무시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기를 찢다 못해 부숴버린 그것이 본 드래곤 한 마리를 강타했다.

    참극이었다. 본 드래곤은 날아올랐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강타당한 순간 부서진 본체의 일부 역시 마치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좀비 드래곤들이 휘청거렸다. 사상최강이란 수식어가 붙어도 좋을 꼬리치기가 만들어낸 대기의 격류 때문이었다.

    요행히 꼬리 공격을 피한 본 드래곤 가운데 한 마리가 폭력의 왕의 목을 물었다. 다른 한 마리는 폭력의 왕을 흉내내듯 전력을 다한 꼬리치기로 폭력의 왕을 후려쳤다.

    비프론즈는 절망감을 느꼈다.

    본 드래곤의 이빨은 폭력의 왕의 붉은 비늘을 뚫지 못했다. 본 드래곤 한 마리가 그 무게를 모두 실어 펼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폭력의 왕이 본 드래곤 하나를 물었다. 이미 죽어 언데드가 된 존재임에도 본 드래곤은 비명을 질렀다. 폭력의 왕의 날카롭고 강맹한 이빨은 본 드래곤의 뼈를 부수다 못해 으깨버렸다.

    사기가 폭발했다. 이미 글렀다고 판단한 비프론즈가 폭력의 왕의 입에 물린 본 드래곤을 자폭시키며 일어난 힘이었다. 지독한 죽음의 기운이 폭력의 왕을 뒤덮었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폭력의 왕을 저주하려던 사기는 폭력의 왕의 강맹함을 뚫지 못했다. 폭발하며 튀어 오른 뼛조각들이 폭력의 왕의 입 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쾌거를 거두긴 했지만 잠깐뿐이었다. 폭력의 왕이 재차 용언 마법을 펼치자 마치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원상복구 되었다.

    비프론즈는 육탄전을 포기했다. 좀비 드래곤들과 남은 본 드래곤 한 마리는 산개했다. 지상에 추락한 본 드래곤은 몸을 덜덜 떨 뿐 당장은 일어서지 못했다.

    네 마리 언데드 드래곤들이 폭력의 왕 주위를 맴돌며 마법과 브레스를 발사했다. 폭력의 왕은 그런 언데드 드래곤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했다. 순식간에 고도를 수백 미터 이상 더 높인 뒤 지상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준비했던 두 번째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다.

    폭력의 왕의 브레스는 거대한 빛의 기둥과 같았다. 언데드 드래곤들은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인 날갯짓을 했다. 드래곤 브레스가 그런 언데드 드래곤들의 사이를 관통해 지상을 향했다. 애당초 폭력의 왕의 목표는 언데드 드래곤들 따위가 아니었다. 지상에서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비프론즈였다.

    비프론즈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앙을 올려다보며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끝내 눈을 감지 않았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드래곤 브레스가 뒤틀렸다. 검고 검은, 지독한 감정의 형상화인 검은 연기가 이번에도 드래곤 브레스의 궤적을 비틀었다.

    빛이 지상을 뒤덮었다. 지표를 뚫고 들어간 드래곤 브레스가 폭발하며 주변 일대가 송두리째 소멸했다. 강력한 지진이 일어 산림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비프론즈는 건재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하늘을 보았다. 검은 연기의 주인인 오만의 왕이 허공을 밟고 오롯이 서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힘의 영역 안에 있던 자들은 드래곤 브레스의 폭발에 휩쓸리지 않았다. 질시의 신기로부터 비롯된 검은 연기가 폭발을 밀어낸 덕분이었다.

    오만의 왕은 더 이상 폭력의 왕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날아올랐다. 등 뒤에 펼쳐진 광익은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오만의 왕을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게 했다.

    폭력의 왕은 급히 고개를 쳐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자리한 오만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오만의 왕이 그런 폭력의 왕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이 휘몰아쳤다. 폭력의 왕이 의지로 발현시킨 폭염이 오만의 왕을 덮쳤다. 오만의 왕을 에워싼 질시의 검은 연기가 그런 폭염을 막아냈다. 동시에 오만의 왕이 펼친 강력한 중력마법이 폭력의 왕을 짓눌렀다.

    폭력의 왕이 날갯짓을 했다. 강맹한 의지가 중력 마법을 찢어발겼다. 고도가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결코 지상에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네 마리 언데드 드래곤이 다시 폭력의 왕에게 달려들었다. 오만의 왕이 오만의 신기를 들어올렸다.

    다시 한 번 빛과 굉음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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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계의 모든 가주들이 그러하듯이 초대 오만의 왕에게도 한 가지 권능이 있었다.

    지배의 마왕.

    지배의 권능.

    그는 자신의 피를 이은 자들과 사역마들을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모두 오만의 왕의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주변 모든 것들을 도구로 부리던 오만의 왕에게도 죽음의 때가 찾아왔다.

    오만의 왕은 그 당시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 산자의 본능이었는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둘 중 어느 것도 아닐지 몰랐다.

    오만의 왕이 다시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오만의 왕은 늙고 나약해져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고만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오만의 왕은 자신의 계승자를 지배했다. 육신을 부리다 못해 강탈했다. 그 영혼까지도 집어삼켰다.

    칠대죄악은 육신이 아닌 영혼에 머무는 것이었다. 새로운 육신을 손에 넣었지만 그는 여전히 오만의 왕이었다.

    오만의 왕은 그렇게 살아갔다. 그에게 있어 자손은 더 이상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도구에 불과했다.

    오만의 왕은 독존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오만의 죄가 하나의 핏줄에 연이어 계승된다 생각했다. 그들은 그 핏줄을 오만의 왕가라 불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오만의 왕은 마주하였다.

    그는 오만의 왕처럼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였다.

    오만의 왕의 영생이 권능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그녀의 영생은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

    남녀노소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시간으로부터 유리된 자.

    색욕의 죄를 가진 여인.

    색욕의 왕 아스모데우스.

    바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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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하늘에서만 진행되지 않았다. 생사를 가르는 격렬한 투쟁의 장이 산림 전체에서 펼쳐졌다.

    거인들의 싸움이라 하여 사역마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던전 상회의 군세는 폭력의 왕의 레어를 노렸다. 폭력의 왕의 사역마들이 그를 돕는 것을 방해하고자 했다.

    하나하나의 힘은 분명 나약했다. 하지만 일백의 사역마들이 동시에 마법을 펼치면 어떠할까? 일백의 회복술사들이 폭력의 왕을 치유한다면? 거대한 공성병기들이 언데드 드래곤들과 오만의 왕을 공격한다면?

    폭력의 군세는 비프론즈와 아브라삭스를 노렸다. 동시에 폭력의 왕의 레어를 지켰다. 하늘에서 포효하는 자신들의 주군을 돕고자 했다.

    하늘의 싸움이 웅장했다면 대지의 싸움은 처절했다. 수십, 수백, 수천이 넘는 무리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다크 엘프 예르티거의 마법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예르티거는 뛰어난 명사수였고, 이를 증명하듯 파랑에 휩싸인 마법 화살은 표적을 정확히 꿰뚫었다. 구울들을 부리던 뱀파이어 여인이 목에 박힌 마법 화살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상처로부터 새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구울들이 한층 더 격렬하게 미쳐 날뛰었다. 예르티거는 급히 두 번째 화살을 재었고, 그런 예르티거와 예르티거가 올라타 있던 나무를 하늘에서 쏟아진 집채만한 바위가 강타했다. 세뇌된 엘프들이 조종하는 거대한 대지 정령들의 소행이었다.

    예르티거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런 예르티거를 레어의 수호병인 용아병들이 뛰어넘었다. 마법 무기로 무장한 용아병들은 구울들을 썰어재끼며 세뇌된 엘프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크 전사 우르의 도끼가 지상에 추락한 그리폰의 목을 찍었다. 그리폰 위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이계의 용사가 급히 손을 놀려 우르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우르는 비명과 함께 무너졌고, 우르의 등 뒤에 있던 오크 전사들이 이계의 용사의 머리 위로 도끼를 휘둘렀다. 잔혹한 타격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드레이크들이 입에서 불꽃을 내쏘았다. 페가수스와 그리폰에 올라탄 이계의 용사들은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불꽃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드레이크들과 와이번들을 베었다.

    어린 레드 드래곤들이 노여움을 표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마법에 능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드래곤이었다. 날 때부터 이미 강맹한 육체라는 무기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불꽃은 드레이크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법의 방패로 불꽃을 막아내던 이계의 용사들이 불타올랐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드래곤의 꼬리가 강타했다.

    허나 그들이라 하여 무적은 아니었다. 연달아 이계의 용사들을 학살하며 기세를 올리던 어린 레드 드래곤의 꼬리를 거대한 강철 골렘이 붙잡았다. 괴력을 발휘해 어린 드래곤을 바닥에 처박은 뒤 목을 짓밟아 부러트렸다. 엘더 리치들이 강력한 저주 마법을 사용해 약해진 드래곤들의 목숨을 취했다. 개중에는 막 죽은 어린 드래곤을 언데드로 다시 일으키는 자도 있었다.

    혼전이었다. 폭력의 군세와 던전 상회의 군세는 양쪽 모두 공격자인 동시에 수비자였다. 전황은 무척이나 팽팽해 어느 한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폭력의 군세의 편이었다. 각종 통신과 공간계열 마법을 방해하던 아브라삭스는 초조함을 느꼈다. 주변의 산림 전체를 자신의 마력으로 뒤덮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먼 곳에서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동쪽에 자리한 용 군단이 아니었다. 폭력의 왕의 레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둥지를 튼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에게도 눈이 있었다.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왕과 오만의 왕의 싸움은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번개폭풍이 하늘과 땅을 동시에 휩쓸었다. 마법의 격류를 견디지 못한 좀비 드래곤 한 마리가 지상에 추락했고, 비프론즈는 아찔함 속에서 욕지거리를 토했다. 언데드 드래곤이 이제 겨우 셋 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 때문이 아니었다.

    폭력의 왕의 거체가 돌연 하늘에서 지상으로 향했다. 추락하는 좀비 드래곤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던전 상회의 군세 한 가운데 착지한 그는 착지의 충격만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폭력의 왕이 몸을 회전시켰다. 일격에 본 드래곤을 침묵시켰던 폭력의 왕의 꼬리가 지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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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71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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