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1장 - 용마결전 >
제 71장 - 용마결전
유리아는 요 며칠 우울했다.
스카자하 언니가 꼭 끌어안고 같이 자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때까지만 해도 참 행복하고 좋았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 일이 어그러졌다.
모두가 심각했다.
가주님도 심각하셨고, 카이완 언니도 심각했다. 심지어는 언제나 꼬리를 바둑이처럼 파닥거리는 귀여운 카타리나 언니까지도 심각했다.
상냥한 엘리고스 집사장 할아버지도 입을 꾹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셔서 무어라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주님이 날개 달린 언니랑 굉장히 예쁜 언니를 데려오고 나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했다. 스카자하 언니는 밤새도록 날개 달린 언니랑 굉장히 예쁜 언니를 돌보느라 바빴다. 같이 자자는 약속은 아예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속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인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유리아는 스카자하의 저택 마당에 쪼그려 앉아 인공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스컬 부대 아저씨들과 함께 감자를 캤더니 허리가 아팠다. - 용아병 아저씨도 만날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모르겠다. -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캔 감자로 프렌치프라이라는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이 절로 따뜻해졌다.
날개 달린 언니랑 굉장히 예쁜 언니가 오고 밤이 두 번 지났다. 가주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아래층에 내려가서 올라오질 않고 있었다. 던전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라도 뭔가 나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낑낑.”
낑낑이의 부름에 유리아는 하늘을 쳐다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유리아와 거의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낑낑이가 두 손으로 치킨 교환권을 유리아에게 내밀었다. 자기 머리만한 것을 품에 품고 다닌 탓에 온통 구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몬 가의 던전 내에서도 무척이나 귀한 ‘가주님이 직접 튀긴 치킨’ 교환권이었다.
“나 주는 거야?”
“낑낑.”
낑낑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거 받고 기운 내라는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바둑이가 자기한테 준 것도 아닌데 군침을 삼켰다.
까르르 웃은 유리아는 낑낑이를 꼭 끌어안았다. 낑낑이가 준 치킨 교환권을 꾹꾹 눌러 편 뒤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가주님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언니들도 빨리 오고. 다 같이 맛난 치킨을 먹는 거야. 좋겠지?”
“왈왈!”
“낑낑!”
낑낑이보다도 바둑이가 먼저 답했다. 그냥 우리끼리 먼저 먹는 건 어떻겠냐는 뜻을 은근슬쩍 드러냈지만 유리아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저택 안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는 벌떡 일어나 창문 너머로 저택 안쪽을 쳐다봤다. 낑낑이가 그런 유리아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 꼿꼿이 섰다. 던전 미어캣 특유의 관찰력으로 저택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냈다.
날개 달린 언니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검정 드레스를 입은, 아직은 낯선 유스티아 할머니 역시 날개 달린 언니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유리아와 낑낑이는 동시에 눈동자를 굴렸다. 저택 한 가운데 자리한 푸른 물속에서 조용히 잠든 굉장히 예쁜 언니를 보았다.
푸른 물이 절로 갈라졌다. 날개 달린 언니가- 사마엘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시트리 님!”
부름에 응답했다. 시트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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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에게는 우리라는 의식이 꽤나 희박했다.
일자왕의 후예인 그들은 홀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같은 종은 물론이고 세상사에조차 무심한 경우가 많았다. 하나하나가 나태한 개인주의자라 해도 좋았다.
폭력의 왕 휘하에 존재하는 용 군단은 드래곤의 관점에서는 꽤나 신비한 집단이었다. 드래곤들이 군단을 이룬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는 그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일족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용 군단을 이끄는 것은 ‘가장 멀리 보는 자’라 불리는 거룡 앙카블로사였다. 블루 드래곤인 그녀는 폭력의 왕의 명을 받아 군단과 함께 동부 국경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식탐의 왕을 견제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앙카블로사는 야밤을 틈타 식탐의 군세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앙카블로사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임무는 단순한 견제였지 적극적인 공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탐의 군세가 움직인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이미 격노의 군세와 충돌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앙카블로사는 마침내 날개를 펴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한창 싸움이 이뤄지고 있을 북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과는 무관한 서쪽을 바라보았다.
명령은 없었다. 무언가 새로운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앙카블로사는 한참이나 서쪽을 바라보았다. 목 뒤를 서늘하게 하는 불길함 속에서 통신 마법을 발동시켰다.
응답이 없었다. 아니, 아예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통신을 방해하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서쪽으로 향하던 마법이 뚝 끊어졌다.
앙카블로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용 군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행형 몬스터들에게 대기를 명한 뒤 측근들만을 이끌고 날아올랐다.
무언가 일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통신이 아예 이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앙카블로사는 날갯짓을 서둘렀다.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어긋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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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상회의 유통로는 마계 어디에나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마계의 서쪽, 폭력의 왕의 영토에는 그 유통로의 숫자가 다른 곳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드래곤들은 마계의 다른 가주들에 비해 던전 상회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그들은 던전 상회에서 사역마를 사들이는 것보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족들을 거느리기를 좋아했다.
유통로의 숫자가 적은만큼 선택지 역시 적었다. 아브라삭스는 그나마 폭력의 왕의 레어에서 가장 가까운 유통로를 선택했다.
식탐의 군세가 격노의 군세를 공격한 바로 그 순간 유통로의 끝에 자리한 공간의 문이 열렸다. 아브라삭스가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일회용 공간의 문이었다.
갈라진 허공의 틈 사이로 푸른 마력의 덩어리가 펼쳐졌다. 아브라삭스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이들이 폭력의 왕의 땅에 안착했다.
공간의 문이 유지된 시간은 짧았다. 기껏해야 1분에서 2분 남짓에 불과했다. 더욱이 공간의 문은 폭력의 왕의 레어에서 수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간의 문이 닫힌 그 순간 아브라삭스는 깨달았다. 발각 당했다. 이 땅에 공간의 문을 연 것을 들키고 말았다.
아브라삭스는 급히 두 팔을 벌렸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곱 개의 뿔에서 기인한 거대한 마력을 아낌없이 발산했다.
이번 기습에서 아브라삭스의 역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기 중에 마력을 흩뿌려 각종 통신 마법과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 결과적으로 폭력의 왕의 레어를 고립시킨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발산되자 녹색으로 가득 찬 산림이 진감했다. 아브라삭스는 이를 악 물었다. 이 역시 좋지 못했다. 아브라삭스 자신의 마력 때문에 산림이 진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움직임이 산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비프론즈는 여섯 개의 뿔을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본신인 거대한 거미의 모습으로 화하였다. 여덟 개의 눈동자를 각기 다른 곳으로 굴리며 주변을 파악했고, 여덟 개의 발로 지면의 진동을 감지했다.
거대한 육신을 가진 드래곤들은 다른 마왕들처럼 지하에 던전을 만드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개방된 분지나 산 높은 곳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던전은 레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 주변에 자리한 영지 전체가 드래곤의 레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레어 주변 수백 미터인 게 보통이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에인션트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일 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폭력의 왕은 아니었다. 비프론즈는 등줄기를 꿰뚫는 서늘함 속에 전율했다. 본신인 거미 마수가 아닌 인간형으로 의태한 상태였다면 식은땀을 줄줄이 흘렸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은 이미 폭력의 왕의 레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산림 전체가 폭력의 왕의 던전이었다!
던전 상회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산림 전체가 진감한 것은 폭력의 왕의 사역마들이 움직임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던전 내에 덜컥 공간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강대한 마력을 가진 이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바로 적대 행위에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폭력의 왕의 비호 하에 살아가는 종족들은 많았다. 비프론즈는 수백을 넘어 수천에 달하는 무리들이 이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면을 통해 감지해냈다. 여덟 개의 눈에는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르는 비행형 몬스터들이 포착되었다.
아브라삭스의 역할이 방해였다면 비프론즈의 역할은 지휘였다. 예상보다 적의 숫자가 많고 대응이 빨랐지만 애당초 ‘전쟁’을 생각하고 이 땅에 온 두 사람이었다.
대동한 사역마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환술사들이었다. 두 이사들의 재촉을 받은 그들은 서둘러 소환진을 완성하였다. 서른여섯 명의 소환술사들이 일시에 주문을 외우니 붉은 하늘에 밝은 빛의 무더기가 형성되었고, 이내 빛 무더기로부터 새로운 빛이 뻗어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빛으로 된 거대한 소환진 여럿이 허공에 그려졌다.
좀비 드래곤 셋과 본 드래곤 넷이 동시에 머리를 내밀었다. 하나하나가 몸길이 수십 미터는 족히 됨직 할 거대한 괴수들이었다.
연이어 일곱 언데드 드래곤들을 따라 비행형 사역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계의 용사들을 태운 그리폰과 페가수스들이 날아올랐고, 기수를 태우지 않은 야수들이 성난 울음을 터트렸다.
소환은 상공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세뇌된 엘프 정령사들이 각종 정령들을 불러냈고, 엘더 리치가 골렘들을 일으켜 세웠다. 뱀파이어 로드들이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언데드들을 소환했다.
수십이었던 무리가 순식간에 수백을 넘어 일천을 헤아렸다. 하늘을 채운 일곱 언데드 드래곤들의 위용이 실로 대단했다.
아브라삭스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그려졌다. 비프론즈 또한 약간이지만 여유를 되찾았다.
폭력의 왕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산림 전체를 진감시킨 무리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의 아종이라 불리는 드레이크와 와이번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숫자가 적게 잡아도 일백은 족히 됨직했다.
마법의 활과 정령마법으로 무장한 다크 엘프들이 숲과 하나 되어 던전 상회의 전력들을 포위했다. 용아병들이 그런 다크 엘프들을 호위했고, 마운틴 자이언트를 비롯한 여러 거인 족들이 수풀 위로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중무장한 드워프들과 오크들이 길목 곳곳에서 대형을 갖추었다.
그들 사이에 드래곤들도 섞여 있었다. 폭력의 왕의 피를 이은 레드 드래곤 일족의 청년들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가장 큰 것도 몸길이가 이십여 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숫자가 근 스무 마리에 달했다.
공간의 문이 열리고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주변 일대에 전운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규모의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저 너머에 자리한 드래곤 레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자. 죄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본신의 힘만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자.
대기가 찢어졌다. 폭발하듯 굉음이 일었다.
위대한 존재가 하늘로 솟구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아직 수 킬로미터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에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붉은 하늘 아래 지상이 검게 물들었다. 거대한 그림자에 의해서였다. 완전히 다 자란 에인션트 드래곤보다도 몇 배는 더 거대한 존재가, 몸길이 이백 여 미터에 달하는 괴수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다시 한 번 대기가 요동쳤다. 단 한 번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 산림 전체를 울부짖게 하였다.
폭력의 군세 위로 그들의 왕이 자리했다.
붉고 거대한 자.
실로 신과 같은 자.
그 엄청난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을 굽어보는 위대한 드래곤들의 왕을 감히 마주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폭력의 왕이 던전 상회의 무리를 보았다. 그는 경고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에 압도된 이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위대한 일자왕의 권능을 행사했다.
드래곤 브레스.
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주변 일대가 진감한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했다. 마치 세상 전체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가장 위대한 드래곤의 힘이 공간을 가로질렀고, 그 앞에 자리한 모든 것들을 분쇄했다. 미처 피하거나 막을 새도 없이 드래곤 브레스에 노출된 본 드래곤 한 마리가 파괴되었다. 지표 위에 거대한 선이 그어졌고, 그 거대한 직선 안에 자리했던 존재들은 모두 사라졌다.
본 드래곤의 잔해가 지상에 추락했다. 적잖은 진동이 일었지만 아무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브라삭스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드래곤 브레스가 고작 십여 미터 옆을 스쳐 지났다. 만약 그 위대한 힘이 자신을 덮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막아냈을 터였다. 어떻게든 일신을 보호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아브라삭스 자신은 누가 뭐라 해도 던전 상회 최강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막아내는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신과 같은 위용이 그러한 상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브라삭스는 비로소 실감했다.
그는 폭력의 왕이었다.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관찰자'를 자처하는 폭력의 왕은 결코 영토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백여 년 전에 있었던 전대 식탐의 왕과의 싸움이 역사에 남은 그의 마지막 전투 기록이었다. 그렇기에 간과하고 만 것일지 몰랐다.
아브라삭스는 억지로 숨을 쉬었다. 일초가 마치 영원 같았다.
이 땅은 폭력의 왕의 던전이었다. 마계의 모든 가주들은 자신의 던전에 있을 때 가장 강한 힘을 발휘했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건드리고 만 것이 아닐까.
아니었다. 아브라삭스는 이성을 회복했다. 마력을 일으켜 사고를 마비시키는 위압감을 떨쳐냈다.
폭력의 왕의 드래곤 브레스는 빗나갔다. 누군가가 정면에서 그 무시무시한 기세를 뒤틀었다. 그렇기에 드래곤 브레스는 지표 위에 사선을 그리고 말았다.
그렇게 만든 존재. 검은 연기로 형상화 된 질시의 힘으로 드래곤 브레스의 궤적을 비튼 자.
반지 형태를 한 질시의 신기에서부터 막대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신기의 주인은 장검 형태를 한 오만의 신기를 길게 늘어트렸다.
오만의 왕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마에 난 삼지안으로 폭력의 왕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마주한 순간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폭력의 왕은 오만의 왕이 질시의 신기를 다루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는 보다 중요한 것을 입에 담았다.
천둥이라 해도 좋을 폭력의 왕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전파되었다.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오만의 왕이여. 아니, ‘오만의 왕가’여.]
기묘한 호칭이었다. 오만의 왕의 얼굴에 미소라 하기에는 큰 웃음이 떠올랐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되물었다. 폭력의 왕에 비하자면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근방에 자리한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알고 있었나?”
[의심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한다.]
아브라삭스는 대화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했다. 비프론즈는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저도 모르게 오만의 왕을 돌아보았다.
다른 왕들과 달리 오만의 죄를 계승해 하나의 ‘왕가’를 이룩한 오만의 왕가.
만약 그것이 왕가가 아니라면. 오직 하나의 왕이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불가능했다. 비프론즈는 전대 오만의 왕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와 당대 오만의 왕은 달랐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만의 왕은 폭력의 왕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질시의 신기를 다루는 동시에 오만의 신기를 다루었다. 지독한 감정 그 자체인 새카만 연기와 순백의 빛 무더기가 오만의 왕을 휘감았다.
죄악의 힘은 곧 영혼의 힘이었다. 두 죄악의 힘에 수천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실렸다.
폭력의 왕은 전후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는 높이 날아오르며 두 번째 드래곤 브레스를 준비했다.
오만의 왕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천 년의 세월 끝에 완성시킨 최고의 육신을 통해 마력을 방출하였다.
비프론즈는 의혹을 떨치고 명령했다. 여섯 언데드 드래곤이 동시에 날아올랐고, 던전 상회의 군세가 폭력의 군세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하늘과 땅에서 격돌했다.
폭력의 왕. 그리고 오만의 왕- 오만의 왕가.
두 거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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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1장 - 용마결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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