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04화 (204/227)
  • < 제 70장 #2 >

    &

    눈앞에서 사라졌다.

    방금까지 분명 정면에 있었건만 갑자기 없어졌다.

    마법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단순한 것이었다.

    팡!

    인지했을 때는 이미 코앞에 있었다. 오로바스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했다. 구시온의 주먹이 허공을 격타하며 굉음이 터졌고, 날카로운 주먹이 스쳐간 자리에는 마치 칼로 벤 것만 같은 상처가 남았다.

    구시온과 오로바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두 번째 공격이 바로 연이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 듯한 왼주먹이 오로바스의 상체를 강타했다. 묵직한 일격에 오로바스는 뒷걸음질 쳤고, 구시온은 다시 한 번 오로바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짝 자세를 낮춘 채 보법을 밟아 오로바스의 측방으로 파고들었다.

    오로바스는 보는 것을 포기했다. 마력을 크게 방출함과 동시에 기감을 퍼트렸다. 찰나라고 해도 좋을 순간에 구시온의 위치와 동작을 읽어냈다. 아니, 느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몸을 움직였다. 구시온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했다. 크게 일으킨 마력으로 그의 자세를 흔들어놓고자 했다!

    쾅!

    소용없었다. 오로바스의 마력방출은 구시온을 흔들지 못했다. 오로바스가 느꼈다고 생각한 그 순간 구시온의 공격은 이미 거의 끝나 있었다. 조금 전의 몇 배나 되는 충격이 오로바스를 엄습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강타당한 부분 자체가 송두리째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부서지지는 않았다. 견뎌냈다. 강대한 마력을 품은 레드 데몬의 육신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 강철과도 같았다.

    오로바스의 본능이 소리쳤다. 상대는 강하다. 이대로 계속 공격을 허용하면 결국엔 부서질 수밖에 없다. 반격해야만 한다!

    오로바스는 이를 악물어 고통을 삼켰다. 이번에도 보는 대신 느꼈다. 오른 주먹을 움켜쥐었고, 무지막지한 마력 모두를 한 점에 집중시켰다.

    상대는 분명 빨랐다. 하지만 그런 상대도 멈출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었다.

    오로바스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구시온의 주먹이 재차 오로바스의 측방을 후려쳤고, 오로바스는 이번에도 견뎌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을 내딛기 직전 땅을 구른 것만으로 지면이 박살났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주먹이 섬광처럼 내뿜어졌다.

    허나 굉음이 울리지 않았다. 둔탁한 타격음도 없었다.

    구시온이 공격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바스는 끔찍함을 느꼈다. 자신의 공격이 중간에 가로막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구시온의 왼손이 오로바스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공격이 완성되기 직전에 붙잡아 무산시켰다. 오로바스의 무시무시한 괴력을 정면에서 찍어 눌렀다.

    상대는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괴력의 구시온.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서 최강의 물리력을 가진 존재.

    그가 오로바스를 보았다.

    사상최강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

    식탐의 죄가 말했다.

    먹고 싶다.

    씹고 싶다. 삼키고 싶다. 잡아먹고 싶다.

    식탐의 신기가 호응했다. 용호에게 알려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는지.

    눈앞에서 거대한 검기가 쇄도했다. 천지를 가를 것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용호는 검기를 향해 왼팔을 뻗었다. 허리춤에 찬 식탐의 신기가 용호를 이끌었다. 용호의 손바닥 위로 마력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찰나간의 일이었다. 용호의 왼손바닥에서부터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단숨에 용호보다 몇 배는 더 커진 그것이 ‘입’을 벌렸다. 검기를 통째로 먹어치웠다.

    검은 무언가가 사라졌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고, 기묘한 포만감을 느꼈다.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

    식탐의 죄.

    그것은 먹는 존재. 눈앞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자!

    쾅!

    격노의 왕이 지면을 박찼다.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아우라가 일었다. 오른팔에 장착한 격노의 신기로부터 강렬한 마력이 발산되었다.

    그야말로 붉은 번개였다. 섬전처럼 나아간 그녀의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다. 색욕의 왕은 급히 물러서려 했지만 어려웠다. 격노의 왕의 주먹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미터에 해당하는 지면이 일시에 붕괴했기 때문이다.

    격노의 힘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초월적인 괴력.

    그 괴력을 견뎌낼 수 있는 단단함.

    격노의 왕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끊임없이 차오르는 힘이 그녀를 흥분시켰다. 무너지는 지면의 파편을 밟고 재차 솟구쳐 오른 격노의 왕은 다시 한 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찬가지로 파편을 밟아 솟구쳐 오른 색욕의 왕을 보았다.

    색욕의 왕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것 같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박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격노의 힘이 색욕의 힘을 중화시켰다. 더 이상의 현혹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식탐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마력을 이끌어냈다. 그림자의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연달아 지면을 붕괴시켜 색욕의 왕을 추적하는 격노의 왕을 향해 날았다.

    색욕의 왕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검기 여럿이 격노의 왕을 향해 질주했다. 격노의 왕은 검기를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돌진했고, 용호가 격노의 왕을 따라잡았다. 식탐의 힘으로 검기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격노의 왕이 미소 지었다. 순수한 격노의 힘만큼이나 해맑은 미소였다. 용호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아몬을 휘둘렀다. 색욕의 왕을 향해 직접 공격을 펼쳤다.

    카앙!

    아몬과 색욕의 신기가 정면에서 충돌했다. 비록 공격이 막히기는 했지만 투로가 어그러지지 않았다. 용호는 한 데 엉킨 아몬과 색욕의 신기 너머로 색욕의 왕을 보았다. 색욕의 왕 또한 그런 용호를 보았다.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를 해할 거야?

    나를 괴롭힐 거야?

    나를- 정말 죽이려는 거야?

    [주인이여!]

    아몬이 크게 소리치며 스스로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용호는 급히 손을 놀렸다. 간신히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색욕의 신기를 막아냈다.

    아몬이 빠르게 말했다.

    [주인은 아직 식탐과 신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식탐이 색욕의 힘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중화시키는 것뿐이다.]

    [더욱이 상성이 좋지 못하다.]

    [주인은 번뇌력이 너무 강하다!]

    용호는 진심에서 우러난 욕지거리를 토했다. 색욕의 왕의 머리 위에 돋아난 빛으로 된 일곱 개의 뿔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색욕의 힘이 발생하였다.

    용호는 다시 아름다움을 느꼈다. 절대적인 매력에 금방이라도 굴복할 것만 같았다.

    [버텨라!]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떠올리며 브리가다의 힘을 이끌어냈다. 엘룬의 힘을 계승한 카타리나의 ‘정의’와 마그나돈의 힘을 계승한 카이완의 ‘열정’이 용호를 휘감았다. 유혹으로부터 용호를 지켜주었다.

    “내가 가오!”

    격노의 왕이 용호와 색욕의 왕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식하기까지 한 그녀의 공격에 색욕의 왕은 재차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린 용호는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식탐의 군세 한복판이었던 싸움의 장소가 어느새 팔부중의 방어선 근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격노의 왕이 색욕의 왕을 몰아쳤다. 색욕의 왕은 격노의 왕의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어느 순간 색욕의 신기를 크게 휘둘러 격노의 왕을 잠시나마 물러서게 한 뒤 응집시킨 색욕의 힘을 발하였다.

    마치 파도와 같았다. 색욕의 왕을 중심으로 하여 퍼져나간 색욕의 힘이 팔부중들을 엄습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림잡아도 수십을 헤아리는 숫자였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공격 목표를 바꿨다. 절반은 경애해 마지않던 자신들의 왕을 향해 돌진했고, 나머지 절반은 저마다의 무기로 스스로의 가슴을 헤집었다.

    사방에서 피분수가 일었다. 격노의 왕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격노의 왕!”

    용호가 소리치며 격노의 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수직으로 비상해 팔부중들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격노의 왕을 공격했던 팔부중들은 스스로의 실패를 자책하듯 일시에 자결했다. 용호의 팔에 안겨 있던 격노의 왕이 괴성을 토했다. 색욕의 왕은 멈추지 않았다. 곳곳에서 자결이 연이어졌다.

    “으아아아아!”

    격노의 왕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소유자의 분노가 격하면 격할수록 더 강한 힘을 이끌어내는 격노의 특성이었다.

    용호는 더 이상 격노의 왕을 붙잡을 수 없었다. 몸부림을 쳐 용호의 품을 빠져나온 격노의 왕은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마침 짐승처럼 색욕의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연달아 지면이 붕괴했다. 격노의 왕이 휘두르는 일격 하나하나가 지진을 야기했다.

    색욕의 왕은 그런 격노의 왕의 공격을 손쉽게 회피했다. 그녀는 색욕의 왕이기 이전에 검마였다. 마계 제일의 검사라 불렸던 자였다. 강해진 마력에 비례하듯 너무나 단순해진 격노의 왕의 공격은 결코 그녀를 해할 수 없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의념을 통해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제지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려는 그녀들에게 물러설 것을 명했다.

    색욕의 왕에게 현혹되어 죽어나가는 팔부중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격노의 왕의 공격은 팔부중의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왕들의 싸움이 워낙 엄청난 탓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식탐의 군세와 팔부중들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흐름이 계속되면 설사 싸움에 이기더라도 산처럼 쌓인 팔부중의 시신을 마주해야 할 판이었다.

    용호는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결착을 서둘러야 할 때였다.

    마신왕의 심장이 발동하였다. 여섯 번째 발톱이 가슴을 파고들며 육마를 발동시켰고, 용호의 머리 위로 빛으로 된 일곱 번째 뿔이 돋아났다.

    용호는 식탐의 신기에 집중했다. 격노의 왕과 색욕의 왕을 향해 몸을 날리며 재차 식탐의 힘을 발동시켰다. 색욕의 왕으로부터 발산되는 색욕의 마력 그 자체를 먹어치웠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색욕의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생겨난 마력의 공백은 새로운 뒤틀림을 낳았다. 색욕의 왕에게 지배당하던 팔부중들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강력한 유혹의 힘을 머금은 색욕의 마력을 먹어치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처음 검기를 먹어치웠을 때처럼 그 대상이 명확한 것도 아니었기에 용호는 미쳐 날뛰던 격노의 마력까지 먹어치워야만 했다. 서로 다른 두 마력이 식탐 안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뛰었고, 용호는 마력을 쏟아 부어 간신히 폭발을 억제했다.

    식탐과 격노만이 색욕의 힘을 중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색욕의 힘 역시 식탐의 힘을 중화시켰다. 그렇기에 더욱 더 마력의 소모가 컸다.

    하지만 마력의 공백지를 만들어낸 효과는 분명 있었다. 잠시 주춤했던 격노의 왕은 이내 다시 색욕의 왕을 향해 달려들었고, 색욕의 왕은 갑작스런 마력의 상실 때문에 비틀거렸다. 용호는 아몬을 움켜쥐었다. 격노의 왕을 돕기 위해 진각을 밟았다. 색욕의 왕을 상대한 이래 처음으로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전력을 발휘했다.

    마치 오랜 세월 손을 맞춰온 것처럼 용호와 격노의 왕의 호흡은 절묘했다. 격노의 무시무시한 마력을 다소 잃는 대신 이성을 회복한 격노의 왕이 주공을 맡았고, 용호는 그런 격노의 왕을 보조하며 색욕의 왕을 밀어붙였다.

    아무리 마계 제일의 검사라 불린 색욕의 왕이었지만 용호와 격노의 왕이 협공을 하니 여유를 보일 수 없었다. 죄악간의 충돌이 아닌 순수한 힘과 기술을 겨루는 공방이 순식간에 수십 합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결착이 났다. 아몬이 색욕의 왕의 어깨를 꿰뚫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일어난 녹염이 어깨와 팔을 일시에 불태웠다.

    분명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추가타를 가하기는커녕 아몬을 손에서 놓아 홍련의 불길로 되돌린 뒤 바로 연격을 퍼부으려는 격노의 왕을 제지했다. 다급히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뒤 색욕의 왕과의 거리를 벌렸다.

    용호의 직감은 정확했다. 색욕의 왕의 육신이 돌연 폭발했다. 용호는 급히 발동시킨 식탐의 힘으로 정면에서부터 밀려오는 폭발과 충격을 먹어치워 스스로와 격노의 왕을 지켰다.

    격노의 왕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색욕의 왕은 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가주였다. 그녀에게는 마왕으로서의 권능이 있었다. 폭발한 것은 색욕의 왕의 육신이 아니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그녀의 육신은 연기로 화해 허공에 흩어졌다.

    빠른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멀어진 연기가 저만치 먼 곳에서 재구성되었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 위치라 할 수 있을 식탐의 군세 너머였다.

    재구성된 색욕의 왕은 용호와 격노의 왕을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다시 연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격전에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색욕의 왕이 도주했다. 식탐의 군세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용호와 격노의 왕을 홀로 대적하기 어려워 도주한 것이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호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 전장에는 색욕의 왕만이 있었던 것일까.

    오만의 왕이 없었다.

    던전 상회의 세 이사들 또한 없었다.

    그들 모두가 팔부중을 공격하고 있다?

    생각하기 어려웠다.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차라리 모두가 함께 격노의 왕을 공격하는 것만 못했다.

    용호는 오만의 왕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았다.

    만약 오만의 왕의 목적이 격노의 왕의 말살이나 팔부중의 궤멸만이 아니었다면.

    그 외에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무엇이 그 두 가지보다 우위에 설 수 있을까. 죄악과 신기는 물론이고 세력까지 거느린 격노의 왕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까.

    용호는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팔부중의 본진이 있는 서쪽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죄악이 없음에도 왕의 자리에 오른 자.

    강대한 용 군단을 거느린 마계 최강의 드래곤.

    ‘폭력의 왕.’

    그였다.

    그밖에 없었다.

    < 제 70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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