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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03화 (203/227)
  • < 제 70장 - 박투 >

    제 70장 - 박투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더욱이 그 속도가 꽤나 빨랐다.

    의식을 회복한 사마엘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 속에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몬 가를 통해 새로이 얻은 정보들과 기존에 이미 알고 있던 것들, 던전 상회의 이변이 발생한 날 아브라삭스가 지껄여댄 모든 말들로부터 단서를 모아 상황을 유추해 냈다.

    다섯 이사들 간의 전투가 도미노의 시작이었다.

    오만의 왕은 질시의 왕과 결착을 지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전쟁 중인 북부였지만 결국 기만에 불과했다. 질시의 군세 가운데 대다수는 아직도 자신들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사마엘 자신의 던전인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은 함락되었다. 오만의 왕이 아직 사마엘 자신의 세력권 전체를 흡수하지는 못했을 터였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마엘의 담당 구역은 식탐의 영토였다. 한창 일이 터지고 있는 질시의 영토와 격노의 영토는 각각 비프론즈와 아브라삭스의 구역이었다.

    식탐의 군세가 격노의 영토로 침공을 개시했다. 격노의 왕은 그녀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동부로 영격을 나섰고, 그 빈틈을 노려 던전 상회가 격노의 영토 곳곳을 공격했다.

    가르디문디가 가문의 비보를 통해 얻어낸 정보는 무척이나 단편적이었지만,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였던 사마엘은 이번에도 상황을 추측해냈다.

    던전 상회가 제대로 칼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가주들이 던전 상회를 경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 하루 만에 격노의 영토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들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현 상황에서 오만의 왕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팔부중 사원을 비롯한 몇몇 중요 지점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했을 것이 분명했다.

    마계는 넓었다. 전쟁 중인 지역에 첨병을 파견해 놓는다하여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알아낼 수는 없었다.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기껏해야 길목에서의 군사적 움직임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실시간으로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표면적이라 하나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은 아직 전쟁 중이었다. 더욱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삼일이 채 못 되었다. 오만의 왕의 던전 상회 사유화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격노의 왕 측이 휘둘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물며 마몬 가는 남부 끝에 있었다. 북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며칠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시트리와 사마엘 자신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을 터였다.

    넘어지기 시작한 도미노를 멈춰야 했다. 격노의 왕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탐욕의 왕.’

    사마엘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로서 마계 전체를 관측하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상상도 못했던 존재가 남부에 웅크리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곁에는 마몬의 12 사역마가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시트리가 바로 나태의 왕이었다. 다섯 이사들의 회의가 열릴 때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트리 앞에서 ‘나태의 왕은 여전히 은둔 중’이라는 보고를 올려대던 자신을 생각하니 웃음만이 나왔다.

    ‘막을 수 있어. 지켜낼 수 있어.’

    오만의 왕의 저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는 북부를 제압했고, 던전 상회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쪽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

    사마엘은 눈을 감았다. 카롯을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팔부중 사원이 불타고 있었다.

    넓게 퍼트린 기감으로 감지해낸 적의 숫자는 수백이 넘었다. 더욱이 그 중 스물에서 서른 가량은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던전 상회의 판별 기준으로 따지면 오성급에 해당할 사역마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하나가 있었다.

    팔부중 사원이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양측 간의 결정적인 전력 차를 만들어낸 존재.

    구시온은 기감을 거두었다. 눈짓할 것도 없이 작은 손짓으로 좌우에 명했다.

    눈치 빠른 오필리아가 제일 먼저 이해했다.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은 제각각 투기장의 사역마들을 이끌고 산개했다. 팔부중 사원 곳곳에 퍼져있는 던전 상회 사역마들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공간의 문에서 이곳까지 길 안내를 맡은 가르디문디는 자신의 아버지 비류박차를 찾아 필사적인 날개짓을 했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를 끝으로 등 뒤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구시온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수백 미터 거리를 둔 곳에서 못 박힌 듯 서 있던 자 역시 그런 구시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마주 걷는 두 사람은 고요함을 느꼈다. 구시온은 침묵했고, 오로바스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양쪽 모두가 발걸음을 멈추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추 십여 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

    오로바스는 군침을 삼켰다. 멀게나마 대화가 가능한 거리 너머에 서 있는 구시온을 몇 번이나 살펴보더니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폐부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통쾌한 웃음이었다.

    “오 이런 맙소사. 그 사람이 맞군. 그 사람이 맞아. 어린 시절 우연히 구한 영상에서 보았던 최강의 레드 데몬.”

    영상과 똑같았다. 특히 저 머리 위에 돋아난 황소의 뿔이 그러했다.

    “괴력의 구시온.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최강이라 불린 존재. 오랜 세월 나의 목표였던 자.”

    그가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아니, 애당초 어떻게 살아있는 것일까.

    호승심이 의구심을 앞섰다. 그런 세세한 것들은 집어치우고 일단은 싸우고 싶었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자세한 사정은 구시온을 쓰러트린 뒤에 들어도 늦지 않았다.

    오로바스는 이미 개방하고 있던 여섯 개의 뿔에 마력을 실었다. 나약한 팔부중들을 학살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막대한 힘을 이끌어냈다.

    더 이상의 고요함은 없었다. 대기가 요동치다 못해 비명을 질렀고, 주변의 작고 가벼운 것들이 맹렬히 진동했다. 마치 온 세상이 오로바스의 힘에 전율하는 것만 같았다.

    오로바스는 쾌락에 취했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 보다시피 사상 최강의 레드 데몬이다. 오늘 너를 꺾어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자아도취에 빠진 눈은 이미 영광된 승리를 보고 있었다.

    “최강이라.”

    구시온은 말을 아꼈다. 진정한 최강을 알려주느니 마느니 하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여섯 개의 뿔을 개방했다. 싸움에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간다.”

    구시온이 지면을 박찼다. 오로바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아몬이 허공을 갈랐다. 궤적을 따라 피어오른 녹염이 다시 한 번 크게 일어 시야 전체를 가득 채웠다.

    색욕의 왕은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녹염을 보았다. 색욕의 신기를 움켜쥔 손이 자꾸만 떨렸다.

    홍련의 마창 아몬이 분명했다. 탐욕의 죄악이 분명했다.

    설마 그가 돌아온 것일까? 그가 천계의 문을 닫고,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일까?

    “탐욕의 왕!”

    색욕의 왕이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용호가 녹염을 꿰뚫었다. 아몬의 날카로운 창끝이 색욕의 왕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

    빗나갔다. 명중하기 직전에 용호가 스스로의 팔을 비틀었다. 아몬은 본래 노렸던 곳과는 한참 떨어진 허공을 찔렀고, 색욕의 왕은 못 박힌 듯 서서 용호를 바라보았다.

    “마몬이 아냐.”

    색욕의 왕이 말했다. 동시에 용호는 아몬을 갈무리하며 물러섰다. 바로 연격을 퍼붓고자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몬이 아냐. 탐욕이지만, 마몬이 아냐. 그가 아니야.”

    색욕의 왕이 다시 말했다. 덜덜 떨리던 그녀의 손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용호의 머릿속에서 아몬이 소리쳤다.

    [적조차 유혹하는 색욕의 힘이다.]

    [예속 사역마들을 물려라. 맞서는 것은 격노의 왕과 주인뿐이어야 한다!]

    색욕의 왕의 떨림이 완전히 멎었다. 경악으로 물들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격한 분노가 어렸다.

    용호는 땅을 찍었다. 다시 한 번 녹염을 크게 일으켜 색욕의 왕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았다. 본래 색욕의 왕을 공격하고자 일으킨 불길이었지만 차마 그녀를 해할 수 없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타리나! 물러나! 카이완과 전선에 합류해!’

    브리가다를 통해 의념을 전달했다. 용호를 따라 지상에 착지하려던 카타리나는 다시 고도를 높였고, 살라미 위에 타고 있던 카이완은 입술을 깨문 채 격노의 군세 쪽으로 향했다. 부케팔로스에 탄 스컬과 스카자하도 마찬가지였다.

    “피하시오!”

    격노의 왕이 돌연 소리쳤다. 용호는 급히 자세를  낮췄고, 그런 용호의 머리 위를 검기가 베고 지났다. 용호가 일으켰던 녹염 역시 거짓말처럼 갈라져 사그라들었다.

    [신기의 힘을 일깨워라!]

    [신기를 가진 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기를 가진 왕뿐이다!]

    아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색욕의 왕이 움직임을 보였다. 격노의 왕을 몰아칠 때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기세로 용호를 향해 돌진했다.

    색욕의 신기와 아몬이 충돌했다. 용호의 왼팔에 자리한 마몬의 신기가 호화로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용호는 이를 악문 채 색욕의 왕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안 돼. 그녀를 해하고 싶지 않아.

    그녀를 해할 바에는 내가 죽는 게 나아!

    아몬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색욕의 신기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몬의 창대 위를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용호의 텅 빈 목을 향해 섬광같이 날아들었다.

    [주인이여!]

    아몬이 소리쳤다. 그리고 번개가 폭발했다. 용호는 번개의 파편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튕겨나간 용호의 자리에는 격노의 왕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큰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색욕의 왕을 견제했다.

    유혹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특히나 색욕의 왕에게 있어 이성인 용호는 더욱 유혹의 힘을 견디기 힘들었다.

    격노의 왕은 색욕의 왕에게 미치지 못했다. 용호처럼 아예 방어를 포기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유혹의 힘 때문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새하얀 팔 다리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여섯 개의 뿔을 곧이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신왕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단숨에 오마까지 끌어올린 뒤 진각을 밟았다. 색욕의 왕이 아닌 그 옆의 허공을 노려 아몬을 찌른 뒤 마력을 폭발시켰다.

    지면이 뒤흔들릴 정도의 거센 폭발은 색욕의 왕과 격노의 왕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색욕의 왕은 색욕의 신기를 휘둘러 폭발과 충격파를 베어냈고, 격노의 왕은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튕겨져 나갔다. 용호의 노림수대로였다.

    용호는 아몬을 땅에 찍었다. 용호의 무구인 동시에 예속 사역마인 아몬에 탐욕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렬한 불꽃을 일으키게 했다.

    녹염이 용호를 집어삼켰다. 색욕의 왕은 반사적으로 물러섰고, 용호는 아몬을 내버려둔 채 격노의 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직후 브리가다를 통해 카타리나의 마력을 유도해냈다. 그림자의 날개를 펼쳐 그대로 날아올랐다.

    스카자하가 말했다. 아몬 역시도 확언했다.

    신기를 가진 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기를 가진 왕뿐이었다.

    아직 미완성인 마몬의 신기로는 부족했다. 색욕의 왕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용호 역시도 죄악과 짝을 이루는 신기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아몬의 불길로 벌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식탐의 군세 머리 위를 가로지른 용호는 바로 지상에 착지했다.

    용호의 품에서 빠져나온 격노의 왕이 비틀거렸다. 용호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허리띠 풀러 봐요."

    “에?”

    격노의 왕이 멍한 얼굴로 용호를 보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한창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더욱이 탐욕의 왕이라니? 마몬 가의 가주가 탐욕의 왕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방금 자신이 마몬 가의 가주의 품에 안겨 있던 게 맞는 건가? 진짜로? 허리띠를 풀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전장 한복판에서!

    격노의 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용호는 말을 정정하는 대신 행동했다. 오른팔에 끼고 있던 격노의 신기를 빼 격노의 왕에게 내밀었다. 더 이상 탐욕의 힘으로 격노의 신기를 감추지 않았다. 식탐의 죄 또한 숨기지 않았다.

    격노의 왕은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녀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격노의 죄가 격렬히 포효했다.

    격노의 죄는 격노의 신기를 원했다.

    눈앞에 나타난 탐욕과 식탐의 죄를 증오하며 갈망했다.

    격노의 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식탐의 신기를 풀었다. 용호가 빠르게 말했다.

    “교환합시다.”

    “예, 예물?”

    이번에는 용호가 당황했다. 격노의 왕은, 드리타라슈트라는 다급히 식탐의 신기를 내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오!”

    시간이 없었다. 용호는 식탐의 신기를 허리에 둘렀다. 격노의 왕은 격노의 신기를 오른팔에 끼웠다.

    아몬의 지휘 하에 살아 움직이던 녹염이 마침내 산산이 흩어졌다. 색욕의 왕이 식탐의 군세 그 자체를 가르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왔다.

    용호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홍련의 불길로 화해 사라졌던 아몬을 재차 소환한 뒤 색욕의 왕을 노려보았다. 격노의 왕은 두근거림을 억누르듯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몬 가의 가주가 탐욕뿐만 아니라 식탐의 죄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색욕의 왕이 색욕의 신기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세상을 갈라놓을 것 같은 거대한 검기가 용호와 격노의 왕을 향해 쇄도했다.

    용호는 집중했다. 설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격노의 왕 또한 본능으로 이해했다.

    식탐과 격노.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자신들의 반쪽과 마주한 두 죄악이 소리 높여 포효했다.

    진정한 죄악의 힘을 발하였다.

    &

    < 제 70장 - 박투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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