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9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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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이 나는 새인 신수 아스트라는 하루에 만 리를 날았다.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무지갯빛 날개가 구름을 갈랐고, 아스트라의 거체는 바람을 앞섰다.
격노의 왕은 아스트라의 등 위에 앉아 명상을 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전투의지를 평정심으로 갈무리했다.
긴 호흡을 따라 보기 좋게 부푼 가슴이 오르내렸다. 전장에 나서는 와중임에도 격노의 왕은 여전히 가벼운 차림이었다. 하얗고 긴 팔 다리 모두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얇고 하얀 옷만이 가냘픈 몸 위에서 나풀거렸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허리띠 형태인 식탐의 신기가 가늘면서도 탄력있는 허리를 휘감았다. 양 팔목과 손목뿐만 아니라 발목에도 황금으로 된 장신구를 찼다. 모두가 신비한 힘을 가진 법보들이었다.
격노의 왕뿐만 아니라 그녀의 등 뒤에 도열해 있는 친위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하얀 천 옷을 입고 양팔과 다리에 황금으로 된 법보를 찼다.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야크샤인 키르티무카 하나뿐이었다.
완전히 떠오른 해 아래 어둠은 없었다. 아스트라의 등 위에 펼쳐져 있는 무형의 벽이 거센 바람을 깨트렸고, 그 파편으로부터 갖가지 냄새가 전해졌다. 키르티무카는 바람에 섞인 피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전장이 멀지 않았다. 격노의 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상을 굽어보았다.
못해도 수만은 됨직한 무리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호화롭고 현란한 마법들이 전장을 수놓았고, 마운틴 자이언트나 사이클롭스 같은 거대한 사역마들이 전장을 질타했다.
냉정히 말해 격노의 군세가 밀리고 있었다. 식탐의 군세는 그 수가 어림잡아도 격노의 군세의 두 배는 됨직했다.
격노의 왕은 호흡의 방식을 바꾸었다. 약간의 격통 속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직한 속삭임으로 신수 아스트라에게 명하였다.
아스트라가 크게 울며 비행 속도를 줄였다. 신수의 울부짖음이 바람과 함께 지상을 휩쓸었다.
지상의 존재들이 하늘을 보았다. 격노의 군세도 있었고 식탐의 군세도 있었다.
격노의 왕은 눈을 감았다. 아스트라가 상공에서 몸을 비틀었고, 격노의 왕과 친위대는 중력에 몸을 맡겼다. 자연스럽게 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람이 거셌다. 지상은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왔고, 하늘의 아스트라는 멀어졌다. 격노의 왕은 두 눈을 떠 지상을 노려보았다. 많은 것들이 보였다. 또한 많은 것들이 들렸다.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쳤다. 황금빛 법보의 힘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투기를 일시에 개방 하였다.
하늘이 섬광으로 번쩍였다. 붉은 하늘에 별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친위대 개개인은 반투명한 투기의 거인을 뒤집어썼다. 팔부중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투 종족이라 불리는 아수라들이 개발해낸 투기무장 강신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밝은 빛은 단연 격노의 왕이었다. 붉은 투기의 거인을 전신에 두른 그녀로부터 재차 황금빛이 일었다. 브리가다의 덩어리인 식탐의 신기로부터 막대한 빛이 쏟아졌다.
하늘을 쳐다보던 전장의 모두는 잠시나마 시력을 상실했다. 태양처럼 밝은 빛에 휩싸인 격노의 왕은 움켜쥔 주먹을 당겼다. 식탐의 군세가 아닌 지상을 보았고, 괴성과 함께 주먹을 내뻗었다!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의 파동이 전장을 휩쓸었다. 주먹의 타점을 중심으로 땅이 갈라졌다. 거인이 땅을 통째로 찢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먹이 지면을 강타한 순간 근방에 있던 사역마 수십이 충격파에 목숨을 잃었다. 연이어 일어난 지진이 식탐의 군세 내부를 뒤흔들었고, 다시 수백에 달하는 사역마들이 지면에 빠지거나 바닥에 나자빠졌다.
연이어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격노의 왕과 마찬가지로 투기무장을 뒤집어쓴 친위대들이 지상에 착지하며 일어난 충격파가 전장 곳곳을 휩쓸었다.
격노의 왕은 무릎을 펴 일어섰다. 지상에 강림하며 보았던 것들을 기억했다. 식탐의 신기를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브리가다 법보를 나눠받은 모두로부터 마력을 이끌어냈다. 귀신의 얼굴을 가진 투기의 거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거대한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쏟아져라, 신뢰!”
선언과 동시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쳤다. 더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무시무시한 번개폭풍이 지상을 휩쓸었다.
전장의 모두는 이제 격노의 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막대한 존재감이 그렇게 만들었다.
수만 개의 시선은 화살과 같았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고요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을 마주한 격노의 왕은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 수만 대군 사이에 당당히 서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미 벽력이라 해도 좋았다. 격노의 왕의 가냘픈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음성이 일파만파 퍼져 모두를 압도했다.
격노의 왕은 싸움을 알았다. 수만과 수만이 어울려 싸우는 전장에서 드높은 사기는 기적을 만드는 법이었다.
“일어나라! 팔부중의 전사들이여!”
“우오오오오오!”
“으아아아아아!”
격노의 왕의 외침에 침묵이 깨졌다. 수세에 몰려 있던 격노의 군세가 일시에 소리를 높이자 전장의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수만 명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왕의 등장이었다.
전장에 처음 선 신병도, 이미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노병도 모두 알고 있었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언제나 선봉에 섰다. 그녀와 함께 하는 전장에 패배는 없었다. 믿음이 실현된 순간 그들의 사기는 하늘에 닿았다.
격노의 왕은 항상 선봉에 선다.
격노의 군세가 그 사실을 알듯이, 식탐의 군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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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디문디를 마주한 용호는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식탐의 군세가 격노의 군세를 공격했다. 먼저 움직였다.
객관적으로 봐서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완전히 예측 밖의 사태였다.
식탐의 왕은 죽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식탐의 군세를 움직인 것인가. 식탐의 왕의 후계자? 십인중의 빈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실세들?
어느 쪽이든 괴이했다. 식탐의 군세에게 침공은 자폭 수나 다름없었다. 격노의 왕을 대체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더욱이 자신이나 폭력의 왕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일까?
“마몬 가의 가주시여, 공백지의 왕이시여.”
눈앞에서 들려온 부름에 용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르디문디가 용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장난기 많고 발랄한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마치 칼날을 연상케했다.
“무언가, 숨기고 계신 게 있으신지요.”
완곡하긴 하나 추궁하는 어조였다. 용호의 등 뒤에 시립해 있던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동시에 반응했다. 두 사람의 매서운 시선이 금방이라도 가르디문디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르디문디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용호만을 바라보았다. 그런 가르디문디를 마주하며 용호는 갈등했다.
격노의 왕과는 동맹관계였다. 앞으로 있을 북부와의 싸움을 함께 해나갈 좋은 동료였다. 그렇다면 진실을 고하는 것을 어떨까. 서로 간의 정보를 공유하면 작금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인 충동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금의 관계가 변질될 수 있었다. 설사 진실을 고하더라도 가르디문디에게는 안 되었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에게 직접 전해야 했다.
용호가 입술을 벌렸다. 가르디문디가 더욱 시선을 날카로이 했다. 그리고 루시아가 소리쳤다.
[주인님!]
[사마엘이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용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에게만 전달된 목소리였기에 가르디문디는 두 눈에 가득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던전의 영혼에게서 긴급한 연락이 왔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거의 쏟아내듯 말한 용호는 눈을 감았다. 루시아와의 연결을 강화하자 머릿속에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스카자하의 전택 내부였다.
“카롯! 카롯! 안 돼!”
사마엘은 눈을 뜨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비틀었다. 예속 사역마들이 떼로 몰살당한 충격을 한 번에 몰아 받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카자하가 사마엘을 얼른 끌어안았다. 마치 아이를 어르듯 그녀를 품에 안고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사마엘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 몸을 축 늘어트렸고, 오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텅 비어버린 눈으로 스카자하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사마엘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것은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유스티아가 사마엘의 하나 남은 손을 붙잡았다. 온기와 함께 정신계 마법을 주입하였고, 스카자하 역시 재차 생명력을 나눠주었다.
사마엘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하피들의 정점인 그녀는 다섯 이사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강맹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강함은 마력이나 육체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스티아는 사마엘의 정신적 상처를 보듬는 대신 오히려 강한 자극을 주었다. 사마엘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크앗!”
사마엘이 돌연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리더니 헐떡였다. 이지를 되찾은 눈으로 주변을 보았다.
“시트리 님.”
시트리는 푸른 물속에 온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과 무사함을 확인한 사마엘은 천천히 스카자하를 밀어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한 번 눈동자를 굴려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유리아. 마몬 가의 가주가 딸처럼 아낀다는 사역마. 저택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뒤로 개머리를 한 사역마와 새끼 던전 미어 캣이 자리한 것을 보면 지금 이 장소는 마몬 가임에 분명했다.
“사마엘?”
스카자하가 조심스럽게 사마엘을 불렀다. 사마엘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고, 빠르게 판단했다.
사마엘 자신의 마력이 격감했다. 예속 사역마들에게 이어져 있던 감각이 모두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뻔하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마몬 가와 시트리 사이의 관계를 믿고 소리쳤다.
“아브라삭스와 오로바스, 비프론즈가 던전 상회를 팔아넘겼습니다. 그 셋이 저와 시트리 님을 공격했습니다. 지금의 던전 상회는 오만의 왕의 하수인에 불과해요!”
루시아를 통해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용호는 눈을 떴다. 카타리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카이완은 이를 악문 채 용호를 돌아보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단순히 던전 상회의 내부 항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던전 상회가 오만의 왕에게 합류했다.
그 순간 용호는 깨달았다. 마치 벼락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만의 왕.’
식탐의 영토에서 새로이 실세가 된 이들이 영토를 지키기를 포기한다면, 자신들의 세력을 누군가에게 바친다면 그 대상은 누가 될 것인가.
오만의 왕은 질시의 왕과 아직 전쟁 중이었다. 오만의 영토와 식탐의 영토 사이에는 색욕의 영토가 있었다.
그렇다면 색욕의 왕은 어떤 입장인 것일까. 오만의 왕과 색욕의 왕이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식탐의 왕의 세력이 고스란히 오만의 왕에게 넘어갔다면, 연이어 오만의 왕이 던전 상회까지 손에 넣었다면.
그는, 그 힘으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비명이 상념을 깨트렸다. 용호는 깜짝 놀라 정면을 보았다. 가르디문디가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에 찬 눈으로 가루라의 비보이자, 그녀와 아버지 비류박차를 연결하는 깃털 모양의 통신기를 바라보았다.
가르디문디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는 직감했다.
던전 상회를 손에 넣으면 할 수 있는 일.
던전 상회의 힘으로 다른 세력을 공격하면 일어날 수 있는 일.
가르디문디가 고개를 들었다. 용호의 생각을 확신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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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9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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